시사위크=이영실 기자 배우 염혜란이 영화 ‘내 이름은’으로 관객 앞에 섰다. 특정한 이념이나 메시지에 머무르기보다 ‘사람’에 대한 이야기로 나아가려는 시도 속에서 그는 왜 이 작품을 선택해야 했는지 연기로 증명해 보인다.
‘내 이름은’은 촌스러운 이름을 지우고 싶은 18세 아들 영옥과 까맣게 잊힌 1949년 제주의 아픈 기억을 되찾으려는 어머니 정순의 궤적을 좇는 이야기다. ‘부러진 화살’ ‘남영동 1985’ ‘소년들’ 등 사회의 이면을 날카롭게 통찰해 온 정지영 감독이 메가폰을 잡고 염혜란이 주연을 맡았다. 제76회 베를린국제영화제에서 먼저 공개돼 호평을 얻었다.
제주 4·3 사건을 배경으로 한 영화에서 염혜란은 과거의 상처를 끌어안은 채 현재를 살아가는 인물 정순을 연기했다. 정순은 비극의 한복판을 지나왔지만 그 기억에 짓눌린 채 머무르지 않는 인물이다. 현재의 삶을 살아가며 자신의 방식으로 시간을 견뎌왔다. 과거를 외면하려는 태도에서 시작해 결국 기억과 마주하게 되는 과정까지, 인물의 변화는 크지 않지만 깊게 축적된다.
염혜란은 감정을 과도하게 드러내기보다 절제된 표현으로 쌓아 올리며 인물의 시간을 설득력 있게 완성한다. 진정성 있는 열연으로 작품의 여운을 더 짙게 만든다. 최근 시사위크와 만난 그는 작품을 택한 이유와 인물에 다가간 과정 등 작품에 관한 다양한 이야기를 전했다.
-관객과 만나는 소감은.
“너무 대의적인 면만 강조되는 것 같아서 부담스럽긴 하다. 그렇게 접근하면 대중분들이 보기 고통스럽게 느껴질 수 있다. 역사적인 무게감이 크기 때문이다. 시나리오를 봤을 때 작품의 매력은 문학성, 서정성, 일상성에 있었다. 그런 것들을 생각하고 보면 좋겠다. 텀블벅에 함께해준 분들이 많이 봤기 때문에 이제 진짜 일반 관객들을 만날 시간이라서, 어떤 이야기를 하실까 냉정한 이야기를 할 것 같아 긴장이 된다.”
-제주 시사회 분위기는 어땠나.
“가장 감동적인 것은 정치적인 분들이 오면 부담스러운데 그렇지 않고 영화하는 분들, 글을 쓰시는 분들이 와서 보시고 나를 꼭 안아주고 손을 잡아줬다. 고맙다고 이야기하면서 마음을 다해서 손을 잡아줄 때 감동적이었다. 그런 분들이 굉장히 많았다. 이 이야기가 예민하고 어려워서 어떻게 받아들일지 굉장히 떨렸는데 배우로서 엄청 감동을 받았다.”
-쉽지 않은 이야기임에도 작품을 택한 이유는.
“배우라는 직업 자체가 이야기를 직접 쓰지 않는 이상, PD를 하지 않는 이상 하고 싶은 이야기를 할 수 없는 존재다. 나라는 도구를 통해서 내가 원하는 이야기를 하게 될 때는 굉장히 좋은 기회라고 생각한다. 정지영 감독님이 이 작품을 하신다고 했을 때 뭔가 숙명처럼 느껴지는 게 있었다. 감독님이 이 이야기를 어떻게 다루실지 궁금하기도 했다. 우려되는 부분도 있었다. 이 이야기가 문학적으로든 영화적으로든 재미가 없으면 그냥 선동하는 영화일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그런 선동하는 영화에는 참여하고 싶지 않았다. 그런데 선동하거나 이런 느낌 없이 그냥 문학 작품으로도 굉장히 재미있었다. 그래서 하게 됐다.”
-하고 싶은 이야기였다는 것은 이 소재 자체에 대한 의미일까.
“맞다. 나는 정지영 감독님이 이 이야기를 하면 돈이 바로 모일 줄 알았다. 그런데 어렵더라. 굉장히 어려웠다. 작년에 찍고 올해 개봉하지만 더 오래전부터 제안을 받았던 작품이다. 투자나 영화가 만들어지는 것까지 굉장히 어려운 작품이었다. 왜 이 이야기를 하는 게 이렇게 어렵지 그런 생각이 들었다. 문제는 이제 78주기가 돼서 누군가는 기억도 못하는 그런 사건이 되고 있다는 거다. 과거보다 훨씬 더 교과서에 명확하게 실려 있고 정의 내려진 사건인데도 왜 이 이야기를 하는 게 색깔처럼 보이고 이 이야기를 하는 게 어려운 이야기가 돼야 하는 거지 이런 생각이 들더라. 그런 지점에 있어서 이 이야기는 필요한 이야기라고 생각이 든다.”
-정지영 감독은 어떤 연출자였고 현장에서 강조한 것은 무엇이었나.
“진짜 거장이신 게 감독님이 생각이 크시다. 거리낌이 없고 두려워하거나 망설이지 않는데 그게 나와 굉장히 다르다. 나는 작고 늘 고민하고 늘 갈팡질팡한다. 감독님은 이 작품을 위해 한 가지 생각, 오로지 세상에 내놓아야 한다는 생각으로 여든이 넘은 나이에도 직접 다 찾아가서 돈을 마련했다. 그런 일념은 어디서 나오는지 너무 대단하다. 의무감이 아니라 영화적 재미로 보게 될 수 있다는 게 든든한 일이다. 감독님께서 명확한 원칙이 있었다. 제주 이야기가 지금까지는 독립영화로 많이 나왔는데 본인은 대중 상업 영화를 찍고 싶다는 게 명확했다. 작가주의를 고수하지 않겠다는 거다. 그건 독립영화여서 수준이 낮거나 이런 게 아니라, 어떤 특정한 작가주의로 흐르는 영화가 아니라 많은 사람이 볼 제주 4·3 대중 영화를 만들고 싶다는 거다. 그런 명확한 지점이 있어서 거기에 집중해야 되겠구나 생각했다. 결이 조금은 다르게 나오겠구나, 지금까지 내가 보던 어떤 독립영화와는 다르게 나오겠구나 그런 생각을 했다.”
-정순은 어떤 인물로 다가왔나. 어떤 감정이 들었는지.
“정순이 현대 질곡사를 다 몸으로 체험한 강인한 엄마이자 엄마의 상징이라는 감독님의 말씀도 있었지만, 그보다 더 인상적이었던 것은 현대 한국인들의 지금 상태에 대한 이야기였다. 굉장히 어려운 고통과 큰 사건을 겪었지만 그것을 기억하지 못한다고 해서 크게 불편한가라는 지점을 말씀하셨다. 그게 그렇게 크게 불편한 일인가, 꼭 알아야 되는가라는 질문이었다. 정순의 마음 상태도 처음에는 그렇다. ‘굳이 알고 싶지 않고 크게 문제 되지 않는다, 그냥 먹던 약이나 달라’는 식이다. 그 모습을 현대 한국인의 모습에 빗대어 말하고 싶다는 점이 굉장히 인상적이었다. 그래서 오히려 과거를 계속 짊어지고 있는 인물보다 마음이 덜 무거웠다. 그 상태로 계속 연기를 해야 했다면 이 고통이 매번 찾아오기 때문에 힘들었을 텐데, 이 작품은 그 고통을 마주하게 되는 지점까지 가는 이야기라서 처음부터 그렇게 짓눌리거나 힘들지는 않았다. 그게 참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뒤로 갈수록 더 무거워지겠지만 서서히 접근해 나가면 되겠다고 느꼈다. 캐릭터가 가질 수 있는 문학성, 영화의 창조성, 내가 덧입힐 수 있는 캐릭터성을 더 시도해 볼 수 있어서 다행이었다.”
-작품을 통해 전하고 싶은 이야기는 무엇인가.
“이 이야기가 정치적인 이야기가 될 수밖에 없을 만큼 누군가가 인정하지 않았던 부분이 있고, 그걸 또 이용한 사람들도 있고 도구로 쓰였던 것 같긴 하다. 그런데 우리 영화는 사랑에 대한 이야기다. 사랑에 관련된 이야기가 되기를 원한다. 평화와 관련된 이야기가 되기를 원한다. 이념적인 걸 떠나서 생각할 수 없는 문제이긴 하지만, 78주기가 된 이 시점에서 어떤 이야기들을 해야 될지가 더 중요한 것 같다.”
-엔딩곡 가창도 직접 했다. 부르게 된 과정은.
“내가 직접 노래를 하나 했으면 좋겠다고 해서 굉장히 많은 이야기가 오고 갔다. ‘친구’라는 노래를 불렀으면 좋겠다고 감독님이 말씀하셨을 때 ‘싫다’고 했다. 너무 명곡이고 고(故) 김민기 선생님의 목소리를 발끝도 못 따라간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너무 부담스러웠다. 간주가 나오는 순간 사람들이 떠올리는 이미지와 정서가 있을 텐데 그걸 따라갈 수 없다고 말씀드렸다. 그런데 감사하게도 유족분들께서 허락을 해주셨다. 고 김민기 선생님이 돌아가신 이후 이 노래뿐만 아니라 많은 노래들에 대한 제안이 있었는데 굉장히 조심스러워하셨다고 들었는데, 이 작품에는 사용할 수 있게 허락을 해주셨다. 너무 감사했다. 그래서 최대한 나의 방식대로 불러봐야겠다는 마음이 들었다. 최대한 멋이나 기교를 내려놓고 불러야겠다고 생각했다. 들으면 들을수록 가사가 잘 맞는다고 느껴져서 역시 감독님의 말이 맞았다고 생각했다.”
-보리밭 춤 장면도 인상적이었다. 준비 과정은.
“배우가 힘들수록 관객들은 재미있게 보신다는 어떤 기본 원칙이 있다. 액션도 그렇고 몸으로 힘든 도전을 할수록 관객분들은 감동을 받는 지점이 있다. 몸이 안 따라줘서 문제지.(웃음) 춤에 대해서는 관심이 많고 결국 몸을 떠나서는 연기가 안 되는 것이라서 춤을 배울 기회가 있다면 잘하고 싶은 마음이 있다. 짧은 시간 안에 정서를 표현하는 춤을 추게 되는 건 굉장히 어려운 일이고 시간이 많이 필요하다. 뭔가를 표현하면 할수록 오히려 손해라는 생각이 들었다. 한국무용은 아주 느린 박자에서 호흡을 유지해야 하는 것들이 있어서 작품과도 잘 맞지 않을까 생각했다. 나는 처음에는 조금 다른 결이었으면 했다. 살풀이춤이 너무 붙는 느낌이 있어서 조금 다른 춤이면 어떨까 했는데, 결국엔 춤이라기보다 어떤 춤사위, 몸짓 같은 것이어서 굉장히 잘 어울린다는 느낌을 받았다.”
-해당 장면 촬영은 어떤 마음으로 임했나.
“춤도 춤이지만 보여줘야 할 것들이 무엇일지 생각했다. 진혼이나 위로는 기본 베이스라고 생각했는데 거기에서 무언가가 더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 이야기가 과거에 머물러있지 않고 앞으로 우리는 이 사건을 어떻게 바라봐야 할지, 나보다 어린 세대는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이야기하는 몸짓이 돼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 지향점 때문에 그저 슬프기만 하거나 단순한 진혼으로만 머물러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앞으로 나아갈 때는 조금 다른 방향이 돼야 하지 않을까 하는 바람을 더 담았다.”
-베를린영화제에서 직접 느낀 해외 관객들의 반응은 어땠나. 제주 4·3 사건과 이 영화를 어떻게 받아들이는지 인상 깊었던 반응이 있다면.
“한국의 특수한 상황을 담고 있어서 처음에는 과연 이해하실 수 있을까 걱정이 있었다. 제주도 사투리도 낯설고 맥락도 쉽지 않을 것 같았다. 그런데 오히려 누구보다 공감해 주셨다. 여러 리뷰가 있었지만 가장 인상 깊었던 건 ‘나는 소중한 사람을 잊지 않았고, 사랑하는 사람을 아직도 기억하고 있다’는 반응이었다. 한국에서는 이 이야기를 색깔로 보는 경향이 있다. 제주 4·3 사건을 둘러싼 정치적 관점이나 지역적 배경이 다르다 보니 더 예민하게 받아들이는 측면이 있다. 반면 베를린 관객들은 이 이야기를 보편적인 인간의 이야기로 받아들였다. 누가 옳고 그른지를 따지기보다, 가슴 아픈 역사적 사건 속에서 사랑하는 사람을 잊지 않는 이야기로 이해하는 태도가 굉장히 자유롭고 귀하게 느껴졌다. 그렇게 받아들일 수 있는 이야기인데, 우리나라에서는 왜 여전히 어려운 이야기로 남아 있어야 하는지에 대한 생각도 들었다. 물론 우리 사회의 특수한 상황이 있겠지만, 이런 이야기가 더 보편적인 시선에서 읽히면 좋겠다고 느꼈다. 그래서 이번 작품이 과거에 머무는 이야기가 아니라 특정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넘어, 보다 보편적인 이야기로 확장되기를 바란다.”
-꾸준한 작품 활동을 이어오는 것은 물론, 원톱 주연작까지 연이어 선보이며 바쁜 행보를 이어가고 있다. 전성기라는 평가가 나오고 있는데 스스로는 어떻게 느끼나.
“전성기인 것 같으냐고 물으면 매번 그렇게 이야기하고 싶지 않다고 했는데 전성기가 맞는 것 같긴 하다.(웃음) 이걸 전성기라고 하지 않으면 도대체 무엇을 전성기라고 해야 하나 싶기도 하고, 욕심이 많다는 생각도 든다. 그런데 나는 욕심이 많아서라기보다 좋은 이야기도 나의 결과보다 더 크게 느껴지고, 안 좋은 이야기도 긍정적인 비판이겠거니 생각한다. 항상 가운데로 마음을 유지하고 싶은 마음이 있다. 전성기라는 것은 나중에 더 실감하게 될 것 같다. 지금도 전성기라고 느끼지만 몇 년 지나 힘들 때 ‘그때가 전성기였다’고 더 진심으로 느끼게 될 것 같다. 지금은 몸으로 느낀다기보다 머리로 ‘전성기겠구나’라고 느끼는 정도다.”
-작품에서 맡는 역할과 책임이 커지면서, 이전보다 캐릭터를 깊이 있게 파고드는 데 물리적인 한계나 고민을 느끼는 부분은 없나.
“오히려 반대인 것 같다. 조연일 때는 겹치기를 할 수 있었다. 작품은 6개월을 찍어야 하는데 내 분량은 많지 않기 때문이다. ‘더 글로리’도 분량이 많지 않았고, ‘폭싹 속았수다’는 말할 것도 없다. 나온 것에 비해 너무 큰 사랑을 받았다고 생각한다. 겸손하려고 하는 게 아니라 객관적으로 그렇게 느낀다. 그렇기 때문에 6개월을 찍었어도 시간이 많이 필요하지 않았고, 필요한 때에만 현장에 가면 됐다. 그래서 다른 작품도 할 수 있었다. 그런데 주연이 되니까 그렇게 할 수 없더라. 많은 배우들이 한 작품, 한 캐릭터에만 몰입하기를 원한다. 나도 그렇다. 오로지 이 작품을 위해서 생각하고, 몸을 만들고, 머리도 과감하게 자를 수 있다. 조연일 때는 머리를 자르고 싶어도 다른 작품과 겹쳐서 못 하는 경우도 있다. 한 작품에 집중하다가도 또 다른 작품으로 전환해야 한다. 주연이 되면서 좋은 점은 오로지 이 작품에만 집중하라는 시간이 주어진다는 것이다. 그래서 도망갈 수도 없고 핑계도 댈 수 없다. ‘바빠서 못 했다’는 말도 할 수 없다. 그래서 더 무거워지는 것 같고 부담감도 크다. 하지만 굉장히 좋은 일이라고 생각한다. 책임도 온전히 제 몫이 되지만 복 받은 일이다.”
-지금 하고 있는 연기적 고민, 방향성에 대한 생각도 듣고 싶다.
“뭔가 고정화되고 색깔이 하나로 규정되는 것을 싫어한다. 이렇게도 쓰이고 저렇게도 쓰일 수 있는 어떤 중간의 상태로 늘 존재하고 싶다. 도전해 보고 싶은 작품을 만나서 더 깨지고 싶고, 두렵지만 그런 방향이 내가 추구하는 것이다. 항상 그런 생각을 한다. 아직 들키지 않아서 좋은 평가를 받고 있다는 생각이다. 내 안에 있는 여러 모습이 아직은 조금 달라 보이지만, 진짜로 다른 것을 했을 때는 부족하다는 평가를 받을 수도 있고, 다른 배우가 더 잘 어울렸을 거라는 이야기를 들을 수도 있을 거다. 정답이 있어서라기보다 그냥 나를 좋게 봐주시는 지점이 있었던 것 같다. 그런 과정을 통해서 연기에 어떤 정답이 있다고 생각해 왔던 건 아닐지 돌아보게 됐다. 그 지점은 나의 착각일 수도 있고, 보는 사람마다 다르게 느꼈을 수도 있다. 그런데 나는 그걸 하나의 정답처럼 생각해 왔던 것 같다. 그러다 보니 더 풍성해지지 못한다는 느낌도 있었다. 그래서 앞으로는 더 풍성해지고, 예상 밖의 것들을 해낼 수 있으면 좋겠다. 그런 점이 나의 장점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캐릭터에 다가가고, 내가 모르는 인물에 접근하려는 노력 자체를 부정하고 싶지는 않다. 하지만 그 노력만으로 충분하지는 않다고 생각한다. 좋은 배우라면 그건 기본이고, 거기서 더 나아가 예상을 벗어나는 지점을 만들어내야 한다고 본다. 그런 부분에서 아직 부족한 배우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앞으로는 그런 고민을 더 하게 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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