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영종의 ‘평양에선 지금’] 거칠어지는 김정은의 ‘고슴도치 전략’

시사위크
이영종 한국국가전략연구원 북한연구센터장북한학 박사
이영종 한국국가전략연구원 북한연구센터장
북한학 박사

‘자라보고 놀란 가슴 솥뚜껑보고 놀란다’는 옛말이 있다. 어떤 일로 크게 충격을 받고 마음을 졸이던 차에 뭔가 엉뚱한 일이 터지는 바람에 혼비백산하거나 낭패를 보는 경우를 이르는 속담이다.

남북관계 복원을 추진하던 이재명 정부도 이런 상황에 처한 형국이다. 이전 윤석열 정부 당시 벌어진 군 당국의 대북 무인기 침투 사건을 ‘내란’의 한 축으로 단죄하려던 와중에, 민간인에 의한 유사 사건이 재발한 것이다. 북한 당국이 이를 강력하게 문제 삼고 나서면서 자칫 돌파구를 만들려던 구상에 차질이 생기는 것 아니냐는 우려가 나왔다.

사태가 심각하다는 걸 직감한 때문인 듯 이재명 대통령이 직접 나서 유감표명을 하는 상황까지 벌어졌다. 이재명 대통령은 지난 6일 국무회의 석상에서 “우리 정부의 의도는 아니지만 일부의 무책임하고 무모한 행동으로 불필요한 군사적 긴장이 유발된 데 대해 북측에 유감의 뜻을 표한다”고 밝혔다.

앞서 지난 2월 대북 주무부처인 통일부 정동영 장관은 “이재명 정부는 남북 간 상호 인정과 평화공존을 추구한다”며 긴급 진화에 나선 바 있다. 그러자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의 여동생인 김여정이 나서 “도발행위에 대해 공식 인정하고 다시 한 번 유감과 함께 재발방지 의지를 표명한 데 대하여 높이 평가한다”며 다소 누그러진 입장을 밝혔다.

하지만 북한의 격렬한 대남 차단벽치기는 여전한 상태다. 김정은 위원장은 2월 하순 노동당 9차 대회 연설에서 “가장 적대적인 실체인 대한민국과 상론할 일이 전혀 없으며 한국을 동족이라는 범주에서 영원히 배제할 것”이라고 비난을 퍼부었다. 또 이재명 정부를 겨냥해 “한국의 현 집권 정권이 겉으로 표방하는 유화적인 태도는 서투른 기만극이고 졸작”이라고 반감을 드러냈다.

김정은 위원장의 이런 발언은 이재명 정부가 집권 이후 제시해온 남북관계 개선과 한반도 정세 안정·관리 노력에 찬물을 끼얹는 일로 해석됐다. 향후 5년간의 통치구상을 선보이는 당 대회 석상에서 ‘한국 붕괴 가능성’까지 위협하는 언동으로 적대적 대남노선의 강화를 밝혔다는 점에서다.

남북 간 긴장과 적대를 최대치로 끌어올리는 발언과 달리 미국에 대해서는 온도차를 보였다. 김정은 위원장은 미국에 대해 “평화공존과 영원한 대결 모두에 준비돼 있다”며 대화 가능성을 시사했다. 김정은 위원장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헌법에 명기된 우리 국가의 현 지위를 존중하며 대(對)조선 적대시 정책을 철회한다면 우리도 미국과 좋게 지내지 못할 이유가 없다”고 강조했다. 물론 ‘헌법에 명기된 지위’라는 게 ‘핵보유국’을 의미한다는 점에서 걸림돌이 없지 않겠지만, 서울과 워싱턴을 대하는 김정은 위원장의 인식과 태도에는 온도차가 확연하다.

이런 국면에서 우리에게 중요한 건 노동당 대회를 계기로 가시화할 북한의 군사·대남 노선 변화나 새로운 전술·전략이다. 미국과의 대립이나 관계 재설정을 의식한 핵과 대륙간탄도미사일(ICBM)에 치중했던 김정은 위원장의 대외·군사 정책 방향이 지난 당 대회를 통해 한국 쪽으로도 상당한 무게를 싣는 양상을 보인다는 점에서다.

이는 딸 주애로의 4대 세습을 꿈꾸는 김정은 위원장이 체제 유지를 위한 ‘고슴도치식 전략’을 쓰는 것으로 볼 수 있다. 한국과의 체제경쟁에서 사실상 완패한 현실 속에 생존을 위한 대남 격리조치 카드를 꺼낸 것이다. 전례 없는 강력한 차단벽이다.

이 같은 전략은 무엇보다 한국의 드라마·영화와 가요 등 한류문화에 자극받은 측면이 크다. 청소년과 신세대를 중심으로 K-컬처에 빠지면서 북한 체제의 근간이 흔들린다는 위기감을 김정은 위원장이 느끼고 있다는 얘기다. 실제 북한은 2020년 12월 반동사상문화배격법을 만들어 한국 드라마·영화를 단순 시청하기만 해도 징역 5~15년형을 처하는 강력한 처벌조항을 만들었다.

실제로 드라마를 본 중학생 2명을 징역 9년형에 처하는 공개재판 장면이 외부에 알려지기도 했는데, 이런 가혹한 처벌에도 불구하고 들불처럼 번지는 한류문화를 막을 수는 없었다. 김정은 위원장으로서는 이대로 가다가는 체제유지는 물론이고 딸 주애에게 권력을 넘겨주려는 구상에도 차질을 빚을 것이란 위기감을 느꼈을 수 있다.

문제는 이런 절박감에 더해 최근의 국제정세까지 김정은 체제를 옥죄고 있다는 점이다. 새해 벽두부터 베네수엘라의 니콜라스 마두로 대통령이 미군 특수부대에 의해 자신의 침실에서 부부동반으로 전격 체포되는 일이 벌어졌다. 또 두 달도 지나지 않아 미국과 이스라엘의 공습으로 37년 간 신정(神政) 체제를 이끌어온 이란의 알라 하메네이가 참수당하는 상황이 터졌다.

김정은 위원장 입장에서 무엇보다 끔찍한 건 하메네이가 정밀타격에 의해 부인, 손주 등 가족과 함께 몰살당했다는 대목일 것이다. 군 수뇌부를 포함해 모두 49명이 한꺼번에 숨지는 참변이 벌어지는 걸 지켜본 입장에서는 극도의 공포감을 느꼈을 가능성이 크다.

김정은 위원장과 북한 지도부는 당분간 수세적인 입장을 고수하면서 국제정세의 흐름, 특히 미국 트럼프 정부의 대외 군사행보에 촉각을 곤두세울 것으로 보인다. 차단벽을 쳐놓은 대남 문제에서 상당기간 변화를 기대하기 힘든 것도 이런 배경에서다.

이재명 정부의 고민도 깊어질 수밖에 없다. 북미관계의 페이스메이커(pace-maker) 역할을 통해 남북관계의 복원을 꾀하려던 구상에 차질이 생겼다는 점에서다. 

이란전쟁으로 3월말에서 4월초로 예정됐던 트럼프 대통령과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의 정상회담은 5월 중순으로 미뤄졌다. 미중 정상회담을 위해 베이징에 오는 트럼프 대통령이 김정은 위원장에게 러브콜을 보내면 상황에 따라 북미 정상회담이 가능할 것이란 관측에도 변수가 적지 않아 보인다. 무엇보다 트럼프 대통령에게 북한 문제에 집중할 수 있을 정도의 여력이 있을 것인지 불투명하다. 이란 사태에서 볼 수 있듯이 ‘협상에 나서도 미국이 때린다’는 인식은 김정은 위원장의 대미접근에 신중함을 더하게 될 것이 분명하다. 남북 간 당국대화 재개와 교류·협력 복원으로 국정 지지율의 마지막 단추를 꿰려던 이재명 정부의 마음이 급해질 수밖에 없는 모양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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