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수첩] ‘왕과 사는 남자’ 천만 열풍에 들어갈 수 없는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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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사위크=이민지 기자  장항준 감독이 해냈다. 영화 ‘왕과 사는 남자’가 ‘파묘’(2024) 이후 2년 만이자, 사극 영화로는 네 번째로 천만 관객을 돌파했다. 6일 기준 1,600만 관객을 넘어서며 역대 흥행 3위에도 이름을 올렸다. 극장가에는 모처럼 활기가 돌고, ‘N차 관람’ 열풍까지 이어지고 있다.

최근 CGV는 ‘왕과 사는 남자’ 관객 100명 중 8명이 ‘N차 관람객’이라는 분석을 내놓았다. 웬만한 작품이 아니고서야 OTT로 작품을 보는 요즘 시대에 N차 관람객 열풍이라니, ‘왕사남’ 인기를 새삼 실감케 한다. 다만 이 같은 흥행을 바라보며 마냥 웃을 수만은 없다. 누군가 같은 영화를 여러 번 보는 동안, 누군가는 아직까지도 작품을 만나보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대표적으로 청각장애인 관객이 그렇다.

청각장애인은 개인마다 정도의 차이가 있지만, 비장애인처럼 음성을 온전히 인지하기 어렵다. 작품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자막이 사실상 필수적이다. 누군가는 ‘조금 기다렸다가 집에서 OTT로 보면 되지 않느냐’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극장에서 같은 장면에 웃고, 숨죽이고, 감정을 나누는 경험은 단순한 ‘관람’을 넘어선다. 같은 공간에서 타인과 감정을 공유하는 문화적 경험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청각장애인은 한국인임에도 한국영화에 더 높은 진입장벽을 마주하게 된다. 해외영화는 번역 자막이 기본적으로 제공되는 반면, 한국영화는 대부분 자막이 없어 화면만으로 서사를 이해해야 하기 때문이다. 

이에 2019년 천만 관객을 돌파한 영화 ‘기생충’ 상영 당시, 청각장애인들은 “우리도 ‘기생충’을 보고 싶다”고 호소하며 국가인권위원회에 차별 진정을 제기했다. 대상에는 CGV와 메가박스, 문화체육관광부, 영화진흥위원회 등이 포함됐다.

그나마 ‘왕과 사는 남자’는 4월 ‘가치봄’ 전국 상영을 통해 청각장애인의 진입 장벽을 낮췄다. 가치봄 상영회는 한국시각장애인협회와 한국농아인협회가 영화진흥위원회, 복권위원회의 지원을 받아 진행되는 상영회다. 영화 상영 시 음성 및 한글 자막 형태의 화면 해설을 제공해 시‧청각 장애인은 물론 비장애인도 동일한 환경에서 작품을 즐길 수 있도록 접근성을 높인 상영 방식이다.

한국농아인협회 취재 결과, 현재 가치봄 상영을 신청한 청각장애인 수는 2만명을 넘어섰다. ‘왕과 사는 남자’를 극장에서 보고자 하는 청각장애인의 수요가 얼마나 많은지를 보여주는 대목이다.

빠르게 발전하는 기술을 접목한다면 이러한 장벽은 충분히 낮출 수 있다. 이미 미국에서는 대형 영화관에 ‘Auracast’를 활용해 청각장애인의 접근성을 높이고 있다. Auracast는 최신 보청기에 탑재되는 기능으로, 극장에서 송출되는 소리를 보청기로 직접 수신할 수 있게 하는 기술이다. 

국내에서 시도된 ‘AI 자막 안경 서비스’도 주목할 만하다. 지난해 샤롯데씨어터는 국내 공연장 최초로 ‘AI 자막 안경 서비스’를 선보였다. AI 자막 안경은 관객이 착용하면 배우들의 대사가 실시간으로 안경 렌즈에 표시되는 방식이다. 모바일 컨트롤러를 통해 자막의 위치와 크기도 조정할 수 있다. 이를 극장에 적용할 경우, 비장애인은 별도의 불편 없이 관람을 이어갈 수 있고 청각장애인은 같은 공간에서 같은 장면을 함께 즐길 수 있다.

‘천만 관객’이라는 기록이 진정으로 ‘대중적인 영화’라는 의미를 가지려면, 그 숫자 바깥에 남겨진 사람들까지 함께 할 수 있어야 한다. ‘자막 제공’을 넘어 이들의 진입장벽을 낮출 방법은 이미 충분히 존재한다. 다음 천만 영화는 이들과 극장에서 함께 할 수 있는 사회가 되길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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