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마이데일리 = 곽명동 기자]장항준 감독은 데뷔작 ‘라이터를 켜라’(2002)의 성공 이후 차기작 '불어라 봄바람'(2003)의 부진으로 긴 슬럼프를 겪으며 무력감에 빠졌다. 그는 드라마 ‘싸인’(2011)과 ‘드라마의 제왕’(2012)의 각본을 쓰며 이야기꾼으로서의 건재함을 알렸고, 특유의 입담으로 예능계를 종횡무진하며 대중적 친밀도를 높였다. 영화계의 시야에서 잠시 벗어난 듯 보였던 이 시기는 오히려 그가 대중의 정서를 읽고 서사의 밀도를 다지는 소중한 밑거름이 되었다. 이후 스릴러 ‘기억의 밤’(2017)으로 화려하게 재기한 그는 ‘리바운드’(2023)와 ‘오픈 더 도어’(2023)를 거치며 연출의 호흡을 가다듬었고, 마침내 ‘왕과 사는 남자’를 통해 정점에 올라섰다. 그의 필모그래피는 코미디, 스릴러, 스포츠, 사극을 자유롭게 넘나들지만, 그 장르의 밑바닥에는 ‘약자의 저항’이라는 일관된 메시지가 뜨겁게 흐르고 있다.

‘라이터를 켜라’의 주인공 봉구(김승우 분)는 내세울 것 없는 백수다. 그에게 300원짜리 라이터는 전 재산이자 자신의 존재 가치를 증명하는 최소한의 권리다. 반면 조폭 두목 양철곤(차승원 분)에게 라이터는 “그깟 거 하나 사주면 되지 않느냐”며 가볍게 무시할 수 있는 하찮은 물건일 뿐이다. 이처럼 영화는 라이터라는 상징물을 통해 ‘불합리한 강자’와 ‘힘없는 약자’의 대립 구도를 선명하게 드러낸다. 작품 전반을 관통하는 풍자와 유머의 기저에는 부당한 권력에 굴하지 않겠다는 소시민의 저항 의지가 꿈틀거린다. 이는 권력 관계에서 밀려난 개인이 자신의 존엄을 끝까지 지켜내려는 처절한 몸부림으로 읽힌다.

장항준 감독이 실화를 바탕으로 한 ‘리바운드’에 매료된 것도 같은 맥락이다. 그는 단 6명의 선수로 전국대회 준우승을 일궈낸 기적 같은 실화를 스크린에 옮기며 엘리트 체육의 피라미드 구조에서 소외된 ‘변방의 약자’들을 조명한다. 해체 위기와 부상, 탈진이라는 한계를 딛고 당대 최강인 용산고에 맞선 부산중앙고의 분투는 단순히 승패를 넘어 “너희는 안 될 것”이라는 사회적 편견에 정면으로 맞서는 저항의 몸짓이다.

최신작 ‘왕과 사는 남자’의 단종(박지훈 분) 역시 비운의 약자다. 그러나 장항준은 그를 수동적인 희생자로 남겨두지 않는다. 수양대군에게 왕위를 찬탈당하고 강원도 영월로 유배된 단종은 촌장 엄흥도(유해진 분)를 비롯한 백성들과 정을 나누며, 거대 권력에 맞설 내면의 힘을 기른다. “설령 거사가 실패하더라도 잘못된 역사를 바로잡기 위해 목숨 걸고 저항했다는 기록이 후대에 전해질 것”이라는 단종의 대사는 감독이 전하고자 하는 핵심 메시지를 관통하는 선언이다. 이 작품을 통해 단종은 ‘잘못된 역사’를 바로잡으려 했던 능동적 주체로 재해석된다.
1600만 명의 관객 동원은 단종과 장항준 감독이 보여준 ‘저항'의 서사에 대한 국민의 '응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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