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라임경제] 1967년 3월2일, 서울 마포 동도중학교 교무실. 따스한 햇살이 창문으로 쏟아져 들어오고 있었고, 교장 선생의 교무회의 훈시가 길어져 나른함과 지루함이 몰려 올 때 쯤.
갓 부임한 생물담당 심봉석은 메모지에 낙서를 하기 시작했다. 동그라미를 그리다 그만 교제 중이던 연인의 얼굴을 그리기 시작했고, 애틋한 그리움이 보태져 한 편의 시를 쓰게 됐다.
◆제목은 '얼굴'
동그라미 그리려다 무심코 그린 얼굴 내 마음 따라 피어나던 하얀 그때 꿈을 풀잎에 연 이슬처럼 빛나던 눈동자 동그랗게 동그랗게 맴돌다가는 얼굴 동그라미 그리려다 무심코 그린 얼굴 무지개 따라 올라갔던 오색빛 하늘나래 구름 속에 나비처럼 나르던 지난날 동그랗게 동그랗게 맴돌다 가는 얼굴 |
회의가 끝나자 그는 선배 선생인 음악담당 신귀복에게 그 시를 주어 곡이 붙여졌다. 신 선생은 음악시간에 이 곡을 연주하며 불렀었고, 음률이 입에 붙은 학생들은 금방 따라부르기 시작해 얼마 안 있어 전교생이 아는 노래가 됐다.
◆크게 기뻐, 악보 건네
1974년 어느날, 내성적인 성격의 윤연선(본명,윤금옥)은 우연히 듣게 된 '얼굴'이란 노래에 마음을 빼앗겼다. 몇 번의 망설인 끝에 신귀복의 허락을 얻기 위해 학교를 찾아갔다. 이미 이 노래는 소프라노 홍수미에 의해 가곡으로 불려진 바 있었으나 대중적 인기를 얻진 못했다.
통성명에 이어 찾아온 연유를 알게 된 신선생은 그녀를 음악실로 데려가 손수 피아노를 치며 테스트를 했다. 트로트창법으로 노래하는 가수가 아닐까 걱정했던 그는 그녀가 동요처럼 맑고 순수하게 노래를 부르자 크게 기뻐하며, 그녀에게 악보를 건넸다.
그 해 그녀의 세 번째 음반에 수록했으나 반응을 얻지 못했고 몇 달 후 '고아, 얼굴'이란 타이틀로 독집을 발매해 인기가 오를 쯤이었다. 갑자기 긴급조치 9호인 '공연활동 정화대책'이 발동되면서 '고아'란 노래가 판매금지 조치의 첫 곡으로 지정되자, 같은 앨범에 있던 '얼굴'도 다시 수면밑으로 들어갔다. 이 때 레코드회사는 재빠르게 '얼굴'만을 타이틀로 재발매한 게 대박을 쳤다.
1970년대 중반 많은 곡들이 사치풍조와 왜색을 조장한다는 이유로 철퇴를 받고 사라질 때, 서정성이 강한 이 곡은 방송과 다운타운가의 반복적인 신청곡이 됐고 앨범도 날개 돋친 듯 팔려나갔다.
◆음악 교과서에까지
캠퍼스 안에서, MT 간 잔디밭에서, 학교앞 주점 곳곳에서 어깨동무한 젊은이들 뿐 아니라 초등생과 경노당의 노인들까지 좋아했다. 안개속에서 들리는 듯한 몽환적인 곡조에, 우수에 젖은 윤연선의 목소리, 서정적인 가사와 통기타 선율이 어우러져 결국 교과서에 까지 실리며 국민가요가 됐다.
그녀는 전북 순창에서 태어나 전남 광주에서 중학교, 서울서 혜화여고를 졸업하고 1971년에 동국대 가정학과에 입학했다. 그 다음해 SM의 이수만과 함께 '평화의 날개'라는 앨범을 내면서 데뷔했다. 그 당시 유명한 배우 윤양하(1940~2021)를 친오빠, 성우 윤수경을 언니로 둔 윤연선은 이 노래를 부르며 누구의 얼굴을 떠올렸을까!
훤칠한 키에 연예인답지 않게 수줍음이 많은 성격의 그녀는 나이 50까지 미혼이었다. 대학시절 아주 깊이 사랑했던 남자가 있었는데, 그는 고려대 의대생이었고 이를 안 그의 부모는 잘 키운 아들이 딴다라 출신과 사귄다며 노발대발한 까닭에 결국 헤어지고 말았다. 그를 못잊어 였을까!
세월이 흘러 2002년 12월, 홍대 근처 20평 남짓의 카페 '얼굴'. 윤연선이 운영하고 있던 이 곳에 젊은 처자 두 명이 나이 지긋한 한 남자를 데리고 들어왔다. 마침 그날 그녀가 나오지 않아 만나지 못하고 돌아갔다. 며칠 후 다시 찾은 이들은 결국 그녀를 만났고, 의대생이었던 남자와 그의 두 딸이 상봉을 한다. 이렇게 두 딸의 적극적인 간접 구애 덕분에 윤연선과 의사 민성삼씨는 그 다음해 결혼을 하게 된다.(2003,한국일보)
◆기사 한 줄이 인생바꿔
민씨는 1남2녀를 두고 있었고, 93년 이혼한 상태였다. 민씨는 가끔 애들에게 가수 윤연선이 자신의 첫사랑이었으며, 자신의 뜻과 달리 아픈 이별을 하게 됐었다.
그러던 중 어느 신문사 문화부 기자가 윤연선이 30년만에 콘서트를 여는데 다른 통기타 가수들도 출연하며, 그녀가 아직 혼자 살고 있다는 기사를 덧붙인 것이 계기가 됐다. 사랑을 배신하고 30년이나 혼자 살게 만든 남자를 다시 만나게 되었을 때 그녀는 어떤 마음이었을까.
그녀는 말한다. "너무 오랜 세월이 흘러서 남자에 대한 미움도 야속함도 사랑의 아픔도 다 잊고 살았었는데, 그 남자를 다시 보니 어제 일처럼 옛 사랑의 감정이 다시 살아나더라"라고.
젊은 시절부터 수도 없이 불렀을 '얼굴'은 야속하고 미웠지만 그래도 그녀가 사랑했던 그 남자의 얼굴이 아니었을까! 그녀는 지금 직접 낳지는 않았지만 그녀의 양딸들과 친딸들처럼 또 친구처럼 이쁘게 살고 있다는 후문이다.
◆복귀신이 주례
그 당시 이 노래를 있게 한 '얼굴'의 주인공은 김말순 선생이었다. 그녀는 심봉석 선생과 캠퍼스커플이었고 나중에 덕수중학교 교장을 역임했다. 심 선생과 순위고사에 나란이 합격한 후 서로 각자의 학교에서 부푼 꿈을 안고 직장생활을 했으나 만나는 시간이 적어지자 이에 대한 의견충돌로 헤어진 상태였다.
그러나 그가 쓴 얼굴이 널리 알려지면서 우연치 않게 다시 만났고 결혼에 골인했다고 한다. 신귀복 선생이 근무한 동도중과 금옥여고 제자들은 같은 선생님 밑에서 배운 인연으로 결혼하는 경우가 있었는데, 그때마다 신선생이 주례를 맡았다. 부탁하는 제자들 사이에 신 선생의 이름을 거꾸로 하면 복귀신이라 우스게소리가 돌았기 때문이라는 후문이다.
(주간한국.2003)
가요 '얼굴'은 사회교육방송을 타고 해외에 까지 알려져 악보를 요구하는 1만여 통의 공문이 왔었고, 이렇게 유명세를 탄 신선생에게는 각 학교의 교가 작곡요청이 쇄도해 국립경찰대를 비롯 서울과학고, 불암초, 공진중 등 84개교의 교가가 만들어졌다.
신 선생은 이태리 밀라노 유학시절 '얼굴'을 행진곡풍으로 편곡해 베르디음악원 교수시험에 이태리인 11명을 제치고 선발된 이력도 있었다. 그는 우리 음악계의 거목으로 5 ,6차 고등학교 음악교과서 저자였고 천년학, 오솔길 등 동요 100여 곡과 가곡 300여 곡을 작곡했으며, 금옥여고, 국립국악고 교장, 모교인 경희대 음대교수를 역임했다.
◆'얼굴' 들으며 멍 때리기
따듯한 봄날, 윤연선의 '얼굴'을 들으며, A4지의 여백에 동그라미 그리다 내 안에 있는 그리운 얼굴을 그리며 멍 때리는 때를 가져봄도 좋을 듯하다.

이상철 위드컨설팅 회장/칼럼니스트·시인·대지문학동인/ 한국HR서비스산업협회 회장(前)/국회 환노위 정책자문위원/ 국회의원 보좌관(대구)/ 쌍용그룹 홍보실 근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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