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위크=이영실 기자 영화 ‘휴민트’는 류승완 감독의 필모그래피에서 또 하나의 분기점에 놓인 작품이다. 거칠게 분출하던 분노 대신 차분히 눌러 담은 감정, 마초적 쾌감보다 인물의 고독과 이별을 응시하는 시선이 전면에 자리한다. 정보와 관계가 교차하는 세계 속에서 결국 혼자로 남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따라간다.
류승완 감독은 이번 작품에서 액션의 방식보다 태도를 먼저 고민했다고 밝혔다. 인신매매라는 민감한 소재를 다루며 ‘보여주는 방식’이 또 다른 착취가 되지 않도록 카메라의 거리를 조율했고 서스펜스 역시 요란한 장치 대신 인물의 정서 위에 쌓아 올렸다는 설명이다. 총격과 추격이 이어지는 장면마저 감정선의 연장선에 놓이며 응축된 감정이 폭발하는 순간을 설계했다.
그가 말하는 ‘휴민트’는 세상을 구하겠다는 거창한 명분보다 눈앞의 사람을 지키지 못한 자의 선택과 책임을 묻는 이야기다. 관계를 맺되 오래 머물 수 없는 이들의 숙명, 그리고 그 고독이 스크린 위에 길게 잔상처럼 남기를 바랐다. 액션 영화의 외피를 두르고 있지만, 감독이 하고 싶었던 건 결국 ‘사람’에 관한 영화다.
-개봉 후 관객의 반응을 어떻게 느끼고 있나. ‘왕과 사는 남자’에 비해 다소 아쉬운 흐름을 보이고 있는데.
“실제로 내가 느끼고 있는 체감은 간만에 극장에 활력이 돈다는 것이다. 지난해 설하고만 비교해도 완전히 달라진 거라 감사하다. 그리고 장항준 감독이 잘 돼서 좋다, 진짜. ‘왕과 사는 남자’ 촬영감독도 나와 평생 같이 일하던 감독이고, 유해진도 친하다. 커피차도 보내고 현장에 응원도 가고 그랬다. 어쨌든 서로 다른 성향의 영화 두 편이 나와서 관객들이 극장에 가고 그러니 좋다. 무대인사 하면서 관객을 만나고 있는데 감사한 마음이다.”
-처음 구상할 때 떠올린 이미지나 키워드가 있다면.
“제목이 ‘휴민트’잖나. 이 세계 안에 처해 있는 인물들, 처음과 끝에 자기 집이 아닌 곳에서 깨어나고 잠드는 사람, 그리고 관계를 되게 촘촘히 맺고 있고 여러 이중삼중의 관계망 안에 있지만 결국 혼자 있는 사람의 이야기다. 키워드라고 한다면 이별, 헤어지는 사람들의 이야기였다. 그게 되게 중요한 키워드였다. 액션 영화이긴 하지만, 액션에 도달할 때의 감정이 내가 기존에 다루던 것처럼 분노 게이지를 막 올려서 복수를 한다거나 나쁜 놈들을 때려잡는 쾌감이 아니라, 차분하게 잡아놓은 감정선 안에서 그것이 응축돼 폭발하는 형태로 만들고 싶었다. 그렇게 하면 같은 액션을 보더라도 조금 더 감정적으로 풍부한 느낌을 받을 것 같았다. 마초적이고 피상적인 액션 이상의 감정적 울림을 주는, 더 끝내주게 느껴지는 액션을 만들고 싶었다. 그러다 보면 본질적으로 해결 방법은 액션의 테크닉보다는 결국 인물을 다루는 태도나 방식이 더 중요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많이 했고, 스태프들과도 그런 이야기를 많이 했던 기억이 난다.”
-시작과 끝을 같은 형식으로 구성한 이유는 무엇인가.
“수미상관으로 그렇게 노골적인 형식을 한 것이 처음인데, 그게 아마 그 조 과장이 조인성이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 같다. 어쩌면 이 이야기는 조 과장이라는 사람이 겪고 회고하는 형식이다. 애초 기획 단계에서부터 이 인물을 세워놓지 않고 했다면 좀 다른 형태가 됐을 수도 있다. 영화를 보고 나면 관객마다 기억에 남는 장면들이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겠지만, 이 영화만큼은 오롯이 사람이 잔상에 남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되게 컸다. 마지막에 조 과장이 눕기 직전 얼굴 클로즈업은 진짜 최소한의 조명만 썼다. 조인성을 데리고 그런 조명을 쓰면 안 되는데, 배우도 되게 좋아했다. 그 어둠 속에 잠긴 얼굴을. 그 배우를 데리고 어떻게 하면 한 편의 영화를 열고 닫을 수 있을까 생각하다가 그런 방식을 선택하게 됐다.”
-인신매매 사건을 소재로 삼은 이유는.
“‘베를린’을 준비할 때 취재하면서 알게 됐다. 영화 속에 등장하는 블라디보스토크를 배경으로 한 인신매매 사건도 실제로 그때 들었던 이야기다. 다른 국가들에서 벌어진 이야기들은 그냥 서술하는 것도 힘들 정도였다. 그 이야기를 들었을 때 느낀 건 분노였다. 너무 화가 치밀어 올랐다. 유럽에서 담배 밀수를 한다는 이야기는 많이 들리지만 사람을 사고판다는 건 있으면 안 되는 일이지 않나. 그 분노가 시발점이 됐다. 어쨌든 거기에는 희생자들이 있을 것이고, 이 범죄를 추적해 응징해야 하는 역할을 부여받은 사람, 큰 파도 안에 휩쓸려 희생자의 포지션에 놓였음에도 무너지지 않고 스스로 다시 일어나는 사람, 그리고 거기에 관계돼 있어 과거 선택의 실수 때문에 현재에 속죄하고 싶은 사람, 이런 구도로 극을 한번 만들어보고 싶다는 생각으로 왔다.”
-민감한 소재를 다루면서 가장 고민했던 지점은 무엇인가.
“이 소재를 선택하는 순간 편하고 불편하고의 문제는 이미 넘어선 거였다. 화가 나는 일이니까 불편할 수밖에 없지 않나. 여기에서 우리, 만드는 사람들에게 주어진 숙제는 우리의 시선이 이 대상을 착취하면 안 된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카메라와 대상 사이의 거리를 세팅하는 게 되게 조심스러웠다. 이를테면 이것을 강조한다거나, 구경거리처럼 다루지 않는 것이 중요했다. 후반 작업하면서도 많이 들었던 말이 있다. 후반부에 등장하는 폐쇄 공장 지하 이미지들 중 하나라도 도드라져 보이면, 그걸 CG팀에서 다 막았다. 혹시라도 스크린 안에서 그 대상에 대한 착취의 시선이 생길까 봐서였다. 그럼에도 이 소재 자체를 어쨌든 다뤄야 했다. 취재한 그대로 하기에는 우리가 감당하기 어려운 부분도 있었고, 그렇다고 이걸 아름답게 예쁘게 처리할 수 있는 문제도 아니었다. 그래서 고민이 되게 많았다. 현장에서도 스태프들이 심적으로 힘들고 조심스러워했다. 우리가 가상의 이미지를 만드는 것도 아니니까, 이 소재 자체가 가져다주는 어려움은 따를 수밖에 없었다.”
-후반부 장면에서 유리관 속 여성들의 모습, 그것을 방패로 이용하는 액션에 대해 불쾌하다는 반응도 있는데. 이에 대한 생각은.
“그럴 수 있다. 내가 들었던 것 중에 가장 충격적인 건 실제로 동남아에서 단체로 유리관에 들어가 있고, 그 자리에서 바로 경매가 이루어지는 일들이 있다는 이야기였다. 그런데 그렇게는 도저히 할 수가 없었다. 그 사람들의 상태 자체도 너무 처참했고, 그대로 옮기는 건 불가능했다. 그래서 우리 딴에는 이것을 가장 순화하려고 했다. 그 표현이 맞는지 모르겠지만. 지금 이런 행위가 발생하고 있다는 전제 아래, 그 행위를 벌이는 대상들에게 영화 속에서라도 단죄를 하고 싶었다. 그런 고심 끝에 지금의 세팅을 한 것이다. 액션 장면을 구성하다 보면 또 이것을 어떻게 해야 더 흥미로운 세팅이 될까 고민하게 되는데 그런 시선에 대해, 거기까지는 미처 생각을 못 했구나 싶었다. 새겨들을 만한 부분이라고 생각한다. 앞으로는 그런 부분을 더 사려 깊게 짚어가면서 만들어야겠다고 느꼈다. 그런 지적도 감사하게 받아들이고 있다. 애초 출발이 단순히 자극적으로 보여주기 위해 시작한 건 아니었다. 만약 제 출발이 그랬다면 더 세심하게 봤어야 했을 것이다. 그런 부분에 대해서 스스로도 많이 배우고 있다.”
-채선화가 자칫 서사적 장치, 도구로 소비되기 쉬운 역할이었는데 하나의 주체로서 기능했다. 어떤 고민을 했나.
“아내도 있고 딸도 있다. 여성을 다룰 때 집에 굉장히 강력한 검열관이 두 명 있는 거다.(웃음) 모든 인물을 다룰 때 가급적이면 시나리오 단계에서 이름을 번호로 쓰지 말자고 다짐한다. 이게 쉽지 않다. 인물이 많다 보면 번호로 쓰는 게 편할 때도 있고, 스태프들도 헷갈리지 않으려면 차라리 번호가 나을 때도 있다. 통상적으로는 ‘영사관1’ 이런 식으로 가기 쉬운데, 이번에는 북한 쪽 인물들도 금태, 은표, 동철처럼 다 이름을 줬다. 스태프들은 금·은·동으로 나눠 불렀다. 그건 우리의 태도라고 생각한다. 결국 사람이 찍히는 건데, 사람으로 다뤄야지 소모적으로 다루면 안 된다고 봤다. 결과는 관객의 몫이지만, 모든 인물을 다룰 때 스스로가 주체적인 모습을 한순간도 보여주지 못한다면 매력이 없다고 생각한다. 현실에서도 너무 기대는 사람보다는 독립적인 사람에게 매력을 느끼지 않나. 채선화는 ‘휴민트’라는 제목에서 휴민트를 발생시키는 원인이자 결과까지 가게 되는 인물이다. 이 인물을 단순히 액션 영화에서 소비되는 역할로 두면 액션의 동력 자체가 힘을 잃고, 어떤 서스펜스도 생기지 않는다. 마지막 여성 탈출 장면도 여러 버전이 있었다. 조 과장과 박건이 들어가 부수는 방식도 있었지만, 그건 선화가 하는 게 맞다고 생각했다. 선화의 손에 의해 이루어져야 했다. 총 맞고 쓰러지는 인물들도 서로를 구해내고, 자기 스스로 지키는 형태로 가야 한다고 봤다. 나 역시 그런 사람들에게 매력을 느낀다. 그런 모습이 멋있다고 생각한다.”
-대중성을 확보하기 위해 내러티브에 초점을 맞춘 것은 무엇인가.
“100명 이상의 관객이 숨을 죽이고 볼 수 있을 만한 서스펜스를 만들고 싶었다. 극장 안에 침묵이 돌 때 지루해서 도는 침묵과 집중해서 도는 침묵은 다르지 않나. 그동안 유머를 구사하는 방식을 많이 해왔는데, 이 영화는 그런 방식보다는 전통적인 서스펜스를 구사해보고 싶었다. 다만 요란하게 끼를 부리는 방식이 아니라 온전히 인물에게 집중하는 방식이었다. 오랜만에 스크린에서 배우들을 보는 매력, 클로즈업을 봤을 때 ‘이게 맞아, 극장에서 영화 보는 맛이야’라고 느낄 수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스펙터클한 액션도 액션이지만 섬세한 모습들을 잘 표현해서 극장을 나설 때 여운이 길게 남는 영화를 해보자고 생각했다.
이게 어떤 과학적인 데이터로 만드는 건 아니기 때문에, 너무 익숙하면 본 것 같아 질리고, 또 너무 새로우면 거부감이 생긴다. 결국 익숙함과 새로운 것의 조화를 어떻게 만드느냐의 문제라고 생각했다. 대신 장르 영화를 만들면서 스스로 만들어내는 공식이나 패턴에 갇히면 안 된다고 봤다. 온전히 사람에게 집중하는 방식이 오히려 새로울 수 있지 않을까 싶었다. 차곡차곡 인물의 정서와 관계의 밀도를 쌓아두고 후반부에는 클라이맥스의 시간을 조금 더 당겨 한 번에 몰아치는 방식이 새롭지 않을까 그런 생각을 해봤다.”
-로케이션과 촬영 과정에서 어려웠던 점은 무엇이었나.
“일단 실제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찍고 싶었는데 지금 전쟁 중이다. 거기에서 교전이 벌어지는 건 아니지만, 영화라는 게 은행 거래도 해야 하고 물류도 이동해야 하는데 그런 부분이 힘들어서 로케이션을 찾는 데 애를 먹었다. 촬영하는 동안 환율이 올라서 정말 미쳐버리는 줄 알았다. 스펙터클을 강조하기보다 인물의 되게 세세한 감정선을 더 살리고 그리고 싶다고 했잖나. 그래서 길거리에 요란한 보조 출연도 다 뺐다. 일부러 온전히 포커스를 인물들에게만 집중하게 하려고 했다. 그러다 보니 인물이 걷는 거리의 풍경 하나도 가급적이면 그 공간의 건축물이나 바닥 같은 것까지 다 따졌다. 다행히 그곳이 십수 년 전 ‘베를린’을 촬영하면서 로케이션을 해봤던 곳이어서, 리가라는 도시를 다시 가 샅샅이 뒤지면서 하나하나 세세하게 골랐다. 내부 장면은 북한 식당과 한국에서 세트를 지어 찍었고 초반부 마하도르 장면을 제외하고는 다 현지에서 찍은 것이다. 그럴 때는 방법이 하나밖에 없다. 같이하는 스태프들의 힘으로, 이것이 가장 좋은 곳인가, 우리의 느낌과 가장 맞는 곳인가를 계속 물으면서 선택해 간 결과다.”
-액션 설계 과정도 듣고 싶다.
“액션이 펼쳐질 때 인물들의 정서와 스타일을 어떻게 구성할지에 대한 인물 중심의 큰 그림이 있었고, 실제 교전 장면의 디테일은 공간을 정해놓고 군사 작전 짜듯이 구성했다. 인물 포지션을 두고, 진입은 어떻게 하고, 엄폐는 어떻게 하고, 탄환 확인은 어떻게 할지 등 실제 작전처럼 동선을 짰다. 예전에는 총격 장면을 액션팀이 중심이 돼 구성했다면, 이번에는 군사 자문이 먼저 큰 동선을 짰다. 또 자문해 준 기자와 실제 국정원 출신 교관을 모셔와 우리나라 특수부대의 성공 사례 자료를 참고했다. 성광탄을 터뜨리는 장면도 실제 비밀 교전팀의 성공 사례를 바탕으로 구성한 것이다. 그런 식으로 현실성을 최적화하는 방향으로 갔다. 다만 조 과장과 박건, 황치성의 마지막 장면은 스토리에 필요한 지점이었다. 그 부분에서는 내가 오래전부터 존경해 온 세계에 대한 일종의 경의이기도 했다. 솔직히 찍으면서 ‘드디어 내가 이걸 찍는구나, 내 카메라로’라는 생각이 들었다.”
-조 과장(조인성 분)과 박건(박정민 분), 채선화(신세경 분)의 관계를 삼각관계로 해석하는 시선도 있는데.
“전혀 생각 안 했다. 그렇게 가서도 안 된다고 생각했다. 사람에 대한 도리나 염치 같은 거라고 생각했다. 초반에 이 인물(조 과장)은 휴민트에게 약속을 했지만 결국 지키지 못한 사람이 된다. 조직의 입장에서 보면 비효율적인 사람일 것이다. 너무 감정적으로 휘둘리고, 조직의 이익보다 개인 간의 신의에 더 흔들리는 사람이니까. 그런데 그렇기 때문에 이 영화가 가능했다고 본다. 목적을 가지고 수행하는 이야기는 많지 않나. 오히려 그런 비효율성이 더 매력적이었다. 무엇이 더 중요한가, 선택의 문제라고 생각했다. 많은 사람들이 이런 일을 시작할 때 자신의 신념으로 출발한다. 누구를 구하겠다고, 세상을 구하겠다고 한다. 그런데 세상을 구했는데 바로 내 옆에 있는 사람이 죽어가고 있다면, 세상을 구하는 게 무슨 소용인가 하는 질문이 있다. 영화를 만들 때도 비슷한 딜레마에 많이 빠진다. 어려운 장면을 찍고 위험한 촬영을 하다 보면 ‘이게 뭐라고 이렇게까지 갉아먹으면서 해야 하나’ 하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현장에서 늘 그런 윤리적 딜레마에 부딪힌다. 그런데 이 세계에 있는 사람들은 얼마나 더 큰 윤리적 딜레마 속에 있겠나. 그 흔들리는 면이 되게 흥미로웠다. 그래서 누구도 이해 못 하는 고독, 어떤 관계도 길게 지속하지 못하는, 숙명적으로 이별을 해야만 하는 관계를 맺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이 영화에서 중요했다.”
-류승완 감독의 멜로도 생소했는데 반응이 좋다.
“사실 박정민 배우도 그렇고 나도 그렇고 그쪽에 이렇게 많이 관심을 가질지 예상 못 했다. 물론 영화 속 관계를 만들면서 인지하고 있었지만, 실제로 선화, 박건이 식당 뒷골목에서 만나는 장면은 현장에 나가서 이야기를 많이 나누면서 조마조마하게 찍었다. 연출 경력이 20년이 훨씬 넘는데, 그동안 키스 장면을 한 번도 찍어본 적이 없다. 그래서 다른 감독들한테 ‘키스 장면은 어떻게 찍냐, 각은 어떻게 맞추냐’고 물어보기도 했다. 그런데 이번 영화에서는 장르적인 계산보다는 이 이야기의 흐름을 자연스럽게 따라가자는 생각이 더 컸다. 멜로 드라마다, 멜로 액션이다 이런 식의 카테고리는 개봉을 앞두고 관객에게 안내하기 위해 붙이는 것이지, 만들 때는 중요하지 않았다. 중요한 것은 결국 사람과 사람의 관계였다. 두 사람이 과거의 연인이었다는 설정이 이들만의 관계 루트를 만들어주긴 하지만, 만약 본격적인 멜로 감정을 전면에 드러내야 한다고 생각했다면 부담이 컸을 것 같다. 오히려 과거를 보여주지 않고 현재 상태에만 집중하면서 그들의 사연에 따라가다 보니, 관객들도 그런 부분을 부담 없이 봐주시는 게 아닐까 생각한다.”
-박정민이 멜로를 아주 잘 소화했다. 현장에서의 모습은 어땠나.
“박정민이 엄청 체중 감량을 하고 왔다. 스태프들도 깜짝 놀랐다. 다른 사람 같다고 할 정도였다. 언제나 그렇듯 준비가 철저하고 역할에 깊이 몰입하는 배우다. 우리가 흔히 조각 같은 얼굴을 가진 배우들은 많지 않나. 그런데 스크린에 투영됐을 때 매력을 느끼게 하는 배우는 외모가 아니라 태도가 찍히는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가만히 서 있어도, 뒷모습을 찍어도 그 사람의 마음이 느껴지는 장면이 있다. 그건 결국 배우의 상태가 찍히는 것이라고 본다. 배우가 얼마나 준비하고 어떤 태도로 현장에 임했는지가 화면에 남는 거다. 감독이 최적의 앵글을 찾고 조명을 맞출 수는 있지만, 그걸로 두 시간을 버틸 수는 없다. 박정민은 원래 앞에서 설치는 걸 잘 못 견디는 사람이다. 그런데 이번에는 스스로 조 과장은 남한 쪽 인물이니까 스태프들을 더 챙기겠다고 하고, 본인은 북한 배우들과 어울리면서 분위기를 만들겠다고 하더라. 현장에서 막내처럼 움직였는데, 어느새 형이 돼 그렇게 해주는 모습을 보고 되게 고마웠다. 원래 그런 사람이 아닌데 이렇게까지 노력하는구나 싶었다. 쉬어야 할 텐데 술도 잘 안 마시는 친구가 같이 조깅하고, 같이 밥 먹으러 다니고, 원래는 혼자 사색하는 걸 좋아하는 사람인데 그렇게 애쓰는 걸 보면서 고마웠다.”
-조인성과 세 번째 작업이었다. 이번 현장은 어땠나.
“이름을 잘 지은 것 같다. 인성이 좋다. 유머 감각도 있고, 타인에 대한 배려도 잘한다. 집안도 어머님은 권사님이고, 본인은 법률스님과 어울리면서 종교적 화합이 집안에서 이뤄지고 있다.(웃음) 한 해 한 해 나이를 먹을수록 참 품위 있게 나이를 먹어가는구나, 더 멋있어지는구나 느꼈다. 조 과장은 원래 이름이 조 과장이 아니었다. 조인성을 떠올리면서 조 과장으로 정했다. ‘휴민트’ 속 조 과장과 조인성이 굉장히 비슷하다. 혼자 살고, 일만 하고, 자기 연기가 마음에 안 들면 괴로워하고, 옆에서 누가 다치면 자기가 더 힘들어하는 사람이다. 되게 비슷하다.”
-조 과장이 걷는 장면이 여러 번 등장한다. 조인성의 강점을 활용하기 위함이었나. 길게 잡은 특별한 의도가 있었나.
“조인성을 짧게 잡는 게 더 힘들다.(웃음) 사실 박건도 혼자 길게 걷는 컷들이 있다. 그런데 결국 관객들 마음속에 남는 건 조인성이 걷는 이미지인가 보다. 하하. 나는 그 이미지가 되게 강렬했다. 강하게 나를 강하게 이끌었다. 결국은 혼자 남는 사람들, 이별한 사람들, 혼자 걸어야만 하고 어느 순간 혼자 남아 있는 사람들. 그게 무슨 의미냐고 할 수 있겠지 나는 그 이미지가 이 영화를 느끼게 해주는 장면이라고 생각한다. 런웨이처럼 보인다고 하는데 일부러 그렇게 걸으라고 할 수도 없다. 원래 모델 워킹을 했던 사람 아닌가. 오히려 그 모델 워킹을 빼려고 한 거다. 그런데 워낙 길고 체형이 그렇다 보니. 다른 세계의 사람이잖나. 나랑 마시는 공기도 다른 사람이다.”
-박해준은 첫 작업이었다. 어땠나.
“배우의 스펙트럼이 굉장히 넓다고 느꼈다. 서민적인 역할도 어울리고, 귀족을 연기해도 어울리고, 악역도 되고, 가까운 내 편 같은 인물도 된다. 그런데 눈을 자세히 보면 로버트 듀발 같은 눈빛이 있다. 주름과 함께 묘하게 닮은 지점이 있다. 이 배우의 마성은 어디서 오는 걸까 생각해 봤다. 중년의 나이인데도 폼을 잡는 게 전혀 없다. 일부러 분위기를 띄우려고 까부는 것도 아니고, 그냥 본인 자체가 단단한 사람이라는 느낌이 든다. 잘 흔들리지 않고, 누구와도 관계가 늘 좋다. 스트레스 받을 법한 상황에서도 ‘허허’ 하고 넘긴다. 촬영 중 긴 총격 시퀀스를 찍을 때도 그 반동과 반복되는 소리가 배우에게는 큰 스트레스다. 가죽 코트도 굉장히 무겁다. 그런데도 힘든 티를 안 낸다. 그렇게 스트레스 없어 보이는 배우를 못 봤다. 이 사람의 힘이구나 싶었다. 오랜만에 ‘본받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던 배우다.”
-이번 작품이 감독에게 어떤 의미로 남았나.
“이 영화를 마치고 개봉한 지금 이 순간, 나는 되게 홀가분하다. 하고 싶은 건 다 해봤다는 느낌이다. 내일 죽어도 호상이라는 생각이 들 정도다. 그런데 숙제로 남는 것들도 있다. 예상하지 못했던 반응들에 대해서는 ‘아, 이건 내가 더 생각해 봐야 할 문제구나’ 하고 받아들이게 된다. 그래도 이 영화가 고마운 건, 어쩌면 하나의 분기점이 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나의 취향과 정말 하고 싶었던 것들을 20여 년 동안 여러 형태로 다 해본 느낌이다. 그래서 다음 영화는 지금까지와는 꽤 다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다.”
-차기작은.
“지금은 ‘베테랑3’다. 이제 그쪽으로 집중할 수 있는 시간이 생겼다. 초벌 각본은 다른 작가가 쓰고 있었고, 내가 본격적으로 집중하는 건 이제부터다. 2편이 1편의 성공에 대한 나름의 부채감을 정리하는 과정이었다면, 지금 준비하는 3편은 관객이 좋아했던 서도철을 다시 귀환시켜 돌려드리는 작품이 될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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