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위크=김두완 기자 헌법 개정을 둘러싼 충돌이 시작됐다. 23일 국민투표법 전부개정안이 국회 행정안전위원회 전체회의를 통과했다. 재외국민의 국민투표권을 보장하고, 낡은 투·개표 절차를 정비하는 내용이 골자다. 법안이 본회의 문턱을 넘을 경우 헌법개정안을 국민투표에 부칠 수 있는 법적 기반이 마련된다. 정치권 일각에서 “개헌의 전제 조건이 갖춰졌다”는 평가가 나오는 이유다. 다만 여야는 처리 과정과 시점을 둘러싸고 정면 충돌하고 있는 모양새다.
◇ 10년 넘게 방치된 ‘헌법불합치’… 왜 지금 고치나
국민투표법은 1962년 제정됐다. 이후 1987년 직선제 개헌을 포함해 총 6차례의 헌법개정 국민투표가 실시됐다. 그러나 법률 체계는 사실상 오랫동안 개정하지 않았다. 결정적 계기는 2014년 헌법재판소 판단이다. 헌재는 당시 “국민투표권은 선거권과 마찬가지로 헌법상 보장된 참정권”이라며 주민등록이나 국내거소 신고가 없는 재외국민의 투표권을 배제한 현행 규정에 대해 헌법불합치 결정을 내렸다.
2015년 말까지 개선 입법을 하라고 요구했지만, 관련 법은 10년 넘게 개정되지 않았다. 그 사이 공직선거법은 선거권 연령을 18세로 낮추고 사전투표제 등을 도입했지만, 국민투표법은 이를 반영하지 못했다. 결과적으로 현행법 체계로는 재외국민 투표 절차가 마련돼 있지 않아, 중요 정책 국민투표나 헌법개정안이 제안되더라도 실무적으로는 혼란이 불가피하다는 지적이 이어져 왔다.
이번 국민투표법 전부개정안은 그 구조 자체를 손봤다. 가장 큰 변화는 재외국민 투표 절차를 별도로 설계한 점이다. 해외에 거주하거나 체류 중인 국민도 재외투표인명부에 등록하면 투표할 수 있도록 하고, 국외부재자 신고와 재외투표인 등록신청 절차를 명문화했다. 공관마다 재외국민투표관리위원회를 설치하도록 한 것도 이 때문이다. 헌재가 지적했던 ‘권리는 있으나 행사할 수 없는 상태’를 제도적으로 해소하겠다는 조치다.
투표권 기준도 선거 제도와 일치시켰다. 개정안은 ‘국회의원 선거권이 있는 사람’을 투표권자로 규정했다. 결과적으로 만 18세 이상 국민이 국민투표에 참여하게 된다. 선거권은 이미 18세로 낮아졌지만 국민투표법은 이를 반영하지 못했던 불균형이 정리된 셈이다.
투표 방식 역시 공직선거와 유사한 틀로 정비됐다. 사전투표, 거소투표, 선상투표를 도입해 이동이 어렵거나 일정상 투표소 방문이 힘든 유권자도 참여할 수 있도록 했다. 투표·개표 절차 전반을 공직선거법 체계에 맞춰 운영하도록 한 것은 관리의 일관성과 예측 가능성을 확보하려는 장치다. 국민투표를 예외적 이벤트가 아니라 상시 작동 가능한 제도로 전환한 것이다.
헌법개정안 국민투표의 일정도 명확히 했다. 개헌안이 국회를 통과하면 30일에 해당하는 날의 직전 수요일에 투표를 실시하도록 규정했다. 대통령은 국회 의결 다음 날까지 국민투표일과 투표안을 공고해야 한다. 절차 지연 가능성을 최소화하고 일정의 강제성을 높인 구조다. 개헌 확정 요건 역시 ‘투표권자 과반수의 투표와 투표자 과반수의 찬성’으로 분명히 했다.
투표운동 규정도 재편됐다. 문자·인터넷·전자우편 등을 활용한 투표운동을 허용하고, 방송 토론과 광고 제도를 도입했다. 대신 공무원의 지위 이용, 단체 명의 동원, 과열 집회 방식 등은 제한했다. 표현의 자유를 넓히되, 공정성과 질서를 동시에 관리하겠다는 설계다.
◇ “입법 공백 해소” vs “강행 처리”
더불어민주당은 이번 개정안을 ‘헌법불합치 해소를 위한 불가피한 입법’으로 규정하고 있다. 23일 행안위 전체회의에서 신정훈 위원장은 “헌법재판소 결정 이후 10년 넘게 방치된 입법 공백을 더 이상 미룰 수 없다”는 취지로 법안 처리를 설명했다. 재외국민의 국민투표권을 실질적으로 보장하고, 선거 제도와 불일치했던 절차를 정비하는 것은 국회의 책무라는 주장이다. 개헌 여부와 무관하게 필요한 제도 정비라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같은 날 회의에서는 여야 의원 간 설전도 이어졌다. 국민의힘 서범수 의원은 “국민투표법 개정이 개헌의 블랙홀로 이어질 수 있다”며 소위원회 재논의와 공청회 절차를 거칠 것을 요구했다. 그는 위헌 결정이 있었던 점은 인정하면서도 “여야 간 개헌에 대한 일정한 합의가 이뤄진 뒤 국민투표법을 정비하는 것이 순서”라고 주장했다. 법 개정이 곧바로 개헌 논의로 확산될 수 있다는 점을 우려한 것이다.
이에 더불어민주당 윤건영 의원은 “헌법불합치 결정 이후 12년 동안 국회가 일을 하지 않았다”고 반박했다. 그는 “국민투표가 사실상 불가능한 상태를 그대로 두는 것이 더 큰 문제”라며, 이번 개정은 개헌과 별개로 참정권을 회복하는 조치라고 주장했다. 윤 의원은 과거 국민의힘이 집권 여당 시절에도 국민투표법 개정 필요성을 언급했던 점을 거론하며 정치적 입장 변화에 의문을 제기했다.
반면 국민의힘은 처리 과정과 정치적 맥락에 문제를 제기했다. 송언석 원내대표는 24일 의원총회에서 “법안심사 소위원회에서 충분한 논의 없이 전체회의에 상정돼 일방 처리됐다”며 절차적 정당성을 비판했다. 그는 위헌 판단과 직접 관련된 부분을 넘어선 조항이 포함됐다는 주장도 내놓으며, 법안의 범위와 내용에 대한 추가 검토가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국민의힘은 본회의 상정을 서두르지 말고 충분한 논의를 거쳐야 한다는 입장이다.
이번 여야간 충돌은 조문 수정 여부를 넘어 의사 일정 주도권을 둘러싼 공방으로 번지는 양상이다. 국민의힘은 ‘강행 처리’라는 표현으로 절차 문제를 부각시키고 있고, 민주당은 ‘위헌 상태를 더 이상 방치할 수 없다’는 점을 전면에 내세우고 있다. 장기간 계류된 법안을 직권상정으로 처리한 선택이 불가피했는지를 두고 해석이 갈린다.
국민투표법 개정을 둘러싼 쟁점은 크게 세 갈래다. 첫째는 이번 개정이 실제로 ‘개헌’ 논의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느냐다. 헌법개정안은 국회 의결 후 30일 이내 국민투표에 부쳐야 한다. 이를 규율하는 법 쳬계가 정비되지 않으면 절차 자체가 작동하기 어렵다는 점에서, 이번 개정은 개헌 논의의 현실적 전제 조건이라는 평가가 나온다.
둘째는 투표운동 규정의 변화다. 정당의 광고와 방송 토론이 허용되면서 국민투표가 선거와 유사한 캠페인 국면으로 전환될 가능성이 제기된다. 직접민주주의 확대라는 긍정적 해석과 함께, 정당 중심의 동원 경쟁으로 흐를 수 있다는 우려도 동시에 나온다. 향후 개헌 국민투표가 현실화될 경우 정치적 긴장도가 상당할 것이라는 전망도 정치권에서 거론된다.
셋째는 시점이다. 국민투표법은 오랫동안 계류돼 있었지만, 개헌 논의가 수면 위로 오르는 시점과 맞물려 처리됐다는 점에서 정치적 해석이 뒤따른다. 민주당은 헌법불합치 해소라는 점을 강조하고 있지만, 국민의힘은 개헌 정국을 염두에 둔 사전 정비라는 시각을 보이고 있다.
국민투표법 개정은 절차법 정비라는 성격이 강하다. 다만 본회의를 통과할 경우 개헌 국민투표는 제도적으로 가능한 단계에 들어서게 된다. 이후 개헌 논의가 실제로 속도를 낼지 여부는 정치권의 합의에 달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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