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왕과 사는 남자’에 담긴 장항준 감독의 시선과 태도

시사위크
장항준 감독이 영화 ‘왕과 사는 남자’로 관객을 만났다. / 쇼박스
장항준 감독이 영화 ‘왕과 사는 남자’로 관객을 만났다. / 쇼박스

시사위크=이영실 기자  영화 ‘왕과 사는 남자’는 1457년 청령포, 마을의 부흥을 위해 유배지를 자처한 촌장과 왕위에서 쫓겨나 유배된 어린 선왕의 이야기를 그린다. 한국 영화 최초로 역사 속 익숙한 단종의 비극을 새로운 시각으로 풀어낸 작품으로, 지난 4일 개봉해 호평 속에 흥행 순항을 이어가고 있다. 

메가폰은 장항준 감독이 잡았다. 장항준 감독은 이미 결말을 알고 있는 익숙한 서사를 다시 왕위에 오를 수 있었던 가능성이 아니라 그 가능성이 좌절된 자리에서 남겨진 관계와 감정, 그리고 우리가 그 비극을 어떻게 기억해야 하는가로 확장한다. 

그의 필름 속에는 권력의 정점에 선 수양대군은 등장하지 않고 권력의 폭력은 직접적으로 재현되지 않는다. 대신 두메산골의 삶, 밥을 나누는 풍경, 자연의 이미지가 스크린을 채운다. 그 안에서 속물적 동기로 출발한 엄흥도(유해진 분)와 삶을 포기한 듯 보이던 단종 이홍위(박지훈 분)는 서로를 통해 변화한다. 

장항준 감독은 이 관계를 ‘충(忠)’이라는 역사적 언어가 아닌, 인간적인 ‘정(情)’의 차원에서 다시 바라본다. 그 선택은 이 비극을 대하는 영화의 태도를 보여준다. 최근 장항준 감독을 만나 영화의 출발과 연출 전반에 대한 이야기를 들어봤다.

-공개 후 반응이 좋다. 관객을 만나는 소감은. 

“기분이 좋다. 정말 기분이 좋고 다행이라는 생각이 든다. 나뿐만 아니라 배우, 스태프 등 모든 사람들이 아침에 일어나면 ‘왕과 사는 남자’를 검색하고 있다. 그런 즐거운 시절, 설레는 시간을 보내고 있다. 시사회에서 울고 웃으면서 봤는데, 정말 많이 울었다. 꼭 가족들과 함께 보고 싶다. 티켓을 끊어서 같이 갈 생각이다. 밖에서 맛있는 음식을 먹어도 가족들과 함께 먹고 싶어지는 것처럼, 이 작품도 ‘엄마에게 보여주고 싶다’는 느낌을 갖게 하는 것 같아서, 그런 마음이 들었다는 점에서 굉장히 기분이 좋다.”

-결말이 정해진 이야기를 한다는 게 감독으로서 되게 큰 고민을 안겼을 것 같다. 어떤 마음으로 임했나.

“그래서 처음에는 이 작품을 안 하려고 했다. 결말이 뻔하고 뒤로 갈수록 밝은 이야기도 아니고. ‘이걸 꼭 해야 하나’라는 생각을 많이 했다. 어떻게든 결말을 바꿀 수 없을까, 제발 바꿀 수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했다. 한양으로 올라가서 수양을 끌어내리고 단종을 다시 왕위에 앉히고 광천골에 진짜 당나귀가 들어왔으면 좋겠다는 상상도 했다. 한명회를 진짜 효수하고 그랬으면 좋겠는데… 그런 생각들을 잠깐 떠올려봤다. 

하지만 결국 역사의 정체성, 이 역사 속에서 우리가 느껴야 할 것, 잊지 말아야 할 것이 있기 때문에 결말을 바꾸지는 못했다. 이 영화가 흥행이 안 될 수도 있고, 투자조차 쉽지 않겠다고 생각했던 이유도 이미 모두가 알고 있는 비극적인 결말이 정해져 있기 때문이었다. 이야기가 어떻게 끝나는지를 다 알고 있으니까 말이다. 그런데 생각이 바뀌게 된 계기가 바로 영화 ‘서울의 봄’이었다. 쿠데타를 막지 못했다는 사실도, 비극적으로 끝난다는 것도 모두가 알고 있는데도 관객들이 극장으로 향하지 않았나. 그걸 보면서 용기를 얻었다. 얼마 전 김성수 감독과 술자리를 함께한 적이 있는데, 그때도 이야기했다. ‘형, 진짜 ‘서울의 봄’ 때문에 이 작품 그냥 밀어붙인 거야’라고.”

장항준 감독이 수양대군을 등장시키지 않은 이유를 전했다. 사진은 한명회를 연기한 유지태. / 쇼박스
장항준 감독이 수양대군을 등장시키지 않은 이유를 전했다. 사진은 한명회를 연기한 유지태. / 쇼박스

-수양대군을 등장시키지 않은 이유가 있나. 

“한명회 존재 자체가 이미 그 기능을 다 하고 있다고 봤다. 실제로도 수양은 전면에 나선 적이 없다. 나서야 하는 순간이 오더라도 나서지 않았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정치적 입지나 이미지에 영향을 미치기 때문에 피했을 것이라고 봤다. 한명회가 수양의 역할을 충분히 하고 있다고 판단했다. 수양이 왕이 되는 데 가장 결정적인 역할을 한 인물도 한명회다. 그런 이유로 한명회라는 인물을 그리고 싶었다. 그리고 진짜 악의 축은 보이지 않을수록 더 무섭잖나. 수양이 등장하면 몰입을 깰 것도 같았다. 잠깐의 등장만으로도 배우로 인식되면서 몰입이 깨질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되면 중요하지 않은 역할이 돼버린다. 우리 영화 안에서는 그렇다. 영화 초반에 크레딧을 전혀 넣지 않았다. 그런 정보들이 강원도 두메산골, 수백 년 전 조선이라는 공간과 시간으로 돌아가는 데 방해가 된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몰입을 깰 수 있는 요소들은 수양뿐만 아니라, 불필요하다고 생각되는 것들까지 모두 배제했다.”

-초반 노루 사냥 장면과 호랑이 이미지가 갖는 의미는 무엇이었나.

“노루 사냥은 상당히 중요했다. 이곳은 한양이 아니다. 권력의 중심도 아니다. 그러나 여기에도 먹고사는 문제는 존재하고, 무언가를 죽여야 하고, 무언가를 쫓아가야 하는 사슬은 존재한다. 다만 다른 형태의 사슬이 존재하는 삶의 현장이라는 점을 보여주고 싶었다. 반면 한양에서는 사람을 죽이는 현장, 권력의 이해관계가 치열하게 부딪히는 현장이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호랑이에 대한 이미지 역시 굉장히 중요했다. 흔히 호랑이를 산중의 왕이라고 표현하지 않나. 그렇다면 진짜 왕은 누구인가라는 은유다. 수양인가, 아니면 물러난 단종인가라는 질문을 던지고 싶었다.”

-호랑이 CG에 대한 아쉬운 반응도 많은데.

“시간문제였다. 사실 한두 달 정도 더 작업을 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이야기를 들어보니 호랑이 털이 있는데, 털 하나하나를 작업하고 렌더링을 받아야 한다. 그런데 한 프레임, 그러니까 24분의 1초를 만드는 데 16시간이 걸린다고 하더라. 그렇다면 이 자체에 훨씬 더 많은 시간을 필요로 한다. 호랑이가 어떻게 보이는지 계속 수정해 나가야 하는데, 그런 오류를 조정할 시간이 충분하지 않았던 게 사실이다.” 

-엄흥도는 속물적 동기로 시작했지만 모든 걸 내던지는 희생을 택한다. 가장 계산적인 인간이 비합리적인 선택을 하게 되는 힘은 무엇이라고 정의했나. 

“극 안에서는 어떤 인물이든 성장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홍위도 마찬가지고, 엄흥도 역시 마찬가지다. 주요 인물들의 감정을 따라가다 보면 성장의 과정에서 완전히 비합리적인 선택을 하게 되는데, 그 선택 자체를 성립시키기 위해서는 어찌 보면 우리와 닮아있는 세속적인 인물이 필요하다고 봤다. 익숙한 세속성, 어찌 보면 귀엽기도 하고 속이 훤히 들여다보이는 면들에 대해 관객이 웃음을 짓고 공감하며 동질감을 느끼게 되기를 바랐다. 그렇게 인물과 동화된 상태에서 홍위를 만났을 때, 우리가 흥도의 시선으로 영화를 바라보게 되지 않을까 생각했다. 처음에는 힘없고 나약한 왕으로 보였던 홍위가 조금씩 자기 모습을 찾아가는 과정, 다른 양반들에게서는 느끼지 못했던 따뜻함을 왕족에게서 느끼고 군주로서의 연을 느끼게 되는 순간들이 중요했다. 그러면서 ‘진짜 따르고 싶다’ ‘이 사람이 제자리로 돌아갔으면 좋겠다’는 마음이 관객에게도 자연스럽게 들기를 바랐다. 그런 감정에 도달하기 위해 인물과 함께 끝까지 같이 가야 한다고 생각했고, 그런 방향으로 설계했다.”

장항준 감독이 이홍위(왼쪽)와 엄흥도의 관계가 영화의 핵심이라고 했다. / 쇼박스
장항준 감독이 이홍위(왼쪽)와 엄흥도의 관계가 영화의 핵심이라고 했다. / 쇼박스

-엄흥도와 이홍위의 관계, 그 변화를 그리는 게 무엇보다 중요했을 것 같은데. 

“그 지점이 살아나지 않으면 이 영화는 실패라고 생각했다. 홍위와 흥도의 감정, ‘정(情)’이라고 할지 ‘충(忠)’이라고 할지 ‘의(義)’라고 할지, 그런 것들이 살아나지 않으면 이 영화는 기능하기 어렵다. 두 사람은 서로에게서 배우는 관계라고 봤다. 흥도는 홍위를 보면서 배우고, 홍위는 진짜 백성들의 삶을 보게 된다. 만약 재위 기간이 길었다면 보지 못했을 것이다. 궁궐에 계속 머물렀다면 알 수 없었을 삶이다. 유배지에서 이 소년 왕은 궁궐 안에서는 알 수 없었을 진짜 백성들, 가장 아래에 있는 사람들의 삶을 보고 그들의 소망과 그들이 무엇을 즐기고 무엇을 원하는지를 보며 생각했을 것이라고 본다. ‘진짜 왕은 어떤 일을 해야 하는가’라는 질문이다. 조선이 사대부의 나라이기도 하지만, 백성이 근간이라는 의미를 이 어린 왕이 알게 되지 않았을까 싶었다. 그렇기 때문에 다시 그 자리로 돌아가야 한다는 생각에 이르렀을 것이라고 본다. 힘 있는 권력과 신분이 주도하는 조선은 초기에는 그렇지 않았지만, 중기에 들어 변질된다. 태조부터 세종대왕까지 이어졌던 신분과 관계없이 인재를 등용하던 구조가 어느 순간 완전히 사라지고 신분제가 고착화되는 시점이 온다. 그런 흐름 속에서 단종이 다시 복위해 그 자리에 올랐다면 또 다른 시대가 열리지 않았을까 생각했다. 훨씬 더 좋은 조선, 사대부가 권력을 독식하지 않는 조선은 어땠을까 생각했다.”

-단종은 어린 왕이자 비극적 서사로 알려진 인물이지만, 영화에서는 삶을 포기한 상태에서 점차 자신의 자리를 되찾으려는 인물로 그려진다. 이렇게 설정한 이유와 단종에 대한 감독의 해석이 궁금하다.

“단종이 어떤 사람이었는지는 정확히 알 길이 없지만, 다시 정의를 실현해야 하고 수많은 사람들이 희생된 대가로 남겨진 이 인물이 성군의 자질을 갖춘 사람이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렇다면 힘없이 나약한 인물이어서는 안 된다고 봤다. 실제 역사를 봐도 단종이 나약하고 힘이 없었다는 기록은 하나도 없다. 오히려 굉장히 총명했고 학문적인 습득도 빨랐으며, 사리 분별이 명확했고 활쏘기도 잘해 세종대왕이 상당히 총애했던 손자였다. 문종 역시 끔찍할 정도로 아꼈던 아들이었다. 

비극은 열두 살에 즉위했을 때 이미 할아버지와 할머니, 아버지와 어머니가 모두 세상을 떠난 상태였다는 것이다. 지켜줄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할아버지인 세종대왕은 돌아가시며 문종과 대신들, 그리고 문종의 형제들에게까지 단종을 잘 부탁한다고 유언처럼 남겼고, 그 이야기를 수양도 들었다. 문종 역시 고명대신들뿐만 아니라 수양에게도 ‘이 아이를 잘 부탁한다’고 말했다. 왕실에서 그만큼 아끼고 총명하다고 여겨진 인물이었다. 

이홍위, 곧 단종이라는 인물은 어떤 모습이어야 하는가를 계속 고민했다. 우리가 알고 있는 나약한 이미지들은 대부분 후대에 만들어진 것이다. 정치적 희생양, 정치적 결과로 만들어진 이미지의 산물일 뿐이다. 어떤 강인한 인물도 정치적으로 제거되면, 외형이나 성취에 대한 기록이 남지 않을 경우 ‘나약해서 졌다’는 이미지로 남게 된다. 실패한 운동선수가 정말 실력이 없어서 실패한 것은 아니지 않나. 경쟁에서 밀렸을 뿐이다. 계백장군 역시 전쟁에서 패배했지만, 나약해서 진 것이 아니지 않나. 단종 역시 그렇지 않았을 것이라는 가정에서 출발했다.

영화 초반 단종이 유배길에 오르며 삶을 포기한 듯한 표정을 짓는 장면에서도 그렇게 생각했다. ‘이제 나는 어떻게 하지’라는 자기 연민의 표정이 아니라, 자신을 따르고 아끼던 사람들이 자기 때문에 모두 죽었다는 감정의 표정이라고 봤다. 이기적인 슬픔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런 상태로 유배지에 도착했는데도 또다시 위험이 다가오니, 이제는 가만히 당하고 있을 수 없다고 느꼈을 것이다. 살아야겠다고, 살고 싶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 안에는 흥도라는 존재도 있었고, 그런 지점들이 이 인물을 그리는 데 있어 중요하게 작용했다.”

​자신만의 이홍위, 단종을 완성한 박지훈. / 쇼박스​
​자신만의 이홍위, 단종을 완성한 박지훈. / 쇼박스​

-밥을 나누는 장면이 반복적으로 등장한다. 이 장면에 담긴 의미와 연출 의도는.

“조선시대 민중들의 풍속사는 연구가 많지 않지만, 관련 자료들을 보며 느낀 것은 쌀밥이 정말 귀한 것이었다는 점이다. 쌀을 나눈다는 행위는 단순히 음식을 건네는 차원이 아니라, 신분과 부유함, 출세의 가능성, 계급을 상징하는 의미까지 포함한다. 그런 쌀을 나눈다는 것은 지금 우리가 밥을 먹는 것과는 전혀 다른 감각이다. 전부를 내어주는 행위에 가깝다. 사실 현실적으로 보면 말이 안 되는 상황이기도 하다. 아무리 유배를 왔다고 해도 왕족과 평민이 함께 밥을 먹는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그런 곳에서 민중과 왕이 같은 자리에 앉아 밥을 먹는다는 것은 굉장히 비현실적인 일이다. 그래서 오히려 그런 장면을 더 보여주고 싶었다. 이들은 같은 것을 먹고 있고 이야기를 나누며 감정을 공유하고 있다. 

홍위는 그 자리에서 백성들과 직접 접촉하며 언젠가 기회가 다시 온다면 이 사람들을 위해 정치를 해야겠다는 생각도 했을 것이라고 본다. 반대로 백성들 역시 ‘그래서 왕이었구나’라고 느꼈을 것이다. 두메산골의 백성들은 왕이라는 존재를 감히 생각해 보거나 입에 올려본 적조차 없었을 것이다. 나라가 이렇게 된 것은 간신들 때문이라고 여겼을 가능성이 크다. 그런 사람들과 왕이 함께 밥을 먹는 장면은 굉장히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공간 역시 신경을 많이 썼다. 가장 아름다운 강가로 잡고, 그 옆으로 창을 최대한 넓게 내달라고 요청했다. 어느 방향으로도 문처럼 열릴 수 있는 구조다. 문이 활짝 열렸을 때 마치 풀밭에서 백성과 왕이 함께 밥을 먹는 듯한 느낌을 주고 싶었다. 밥 먹는 장면이 내가 가장 좋아하는 장면 중 하나다.”

-이홍위의 죽음을 직접적으로 보여주지 않고 은유적으로 연출했다. 상당히 절제된 연출 방식이었는데 그런 선택을 한 이유가 궁금하다.

“아무도 그 안을 소상히 들여다보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홍위의 최후를 아무도 자세히 들여다보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봤다. 슬픔은 바깥에 있다. 문 너머에 있다고 생각했다. 이 영화는 흥도의 시선으로 바라본 홍위를 보여주는 측면이 크다. 지켜주지 못한 정의, 실현되지 못한 정의에 대해 우리가 어떤 태도를 가져야 하는가에 대한 이야기이기도 하다. 나는 그 문밖에 있는 사람들이 바로 관객이라고 생각했다. 쉽게 말하면 추모하고, 그 슬픔을 함께 나누는 것이다. 그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봤다. 잊지 않는다면, 그것만으로도 의미가 있다고 생각한다.”

장항준 감독이 유해진(오른쪽)을 향한 강한 신뢰를 드러냈다. / 쇼박스​
장항준 감독이 유해진(오른쪽)을 향한 강한 신뢰를 드러냈다. / 쇼박스​

-박지훈이 단종 역할을 굉장히 잘 소화했다. 어떤 배우였나.

“당시 단종이 되게 애매한 나이였다. 어른도 아니고 그렇다고 아이도 아니다. 박지훈이 그런 역할을 하기에 굉장히 동안이고 피부도 좋다. 연기적인 부분은 말할 것도 없다. 무엇보다 이 나이대의 20대 남자 배우들 가운데 이렇게 침착한 경우가 드물다. 생각이 들뜨거나 감정이 쉽게 표출되지 않는다. 오늘 기분이 좋은지, 우울한지, 배가 부른지, 웃긴지 잘 모르겠을 정도로 늘 진중한 상태다. 그런 점이 인상적이었다. 지금보다 훨씬 더 큰 스타가 돼도 크게 변하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진폭이 큰 사람들은 잘 변하기 마련인데 박지훈은 단단한 20대라는 느낌이 있다. 쉽게 흔들리지 않는 사람이다. 그런 점이 인간적으로도 큰 장점이라고 생각했다. 유해진 역시 그런 부분을 가장 마음에 들어 했을 것이다. 20대 남자 배우로서는 굉장히 독특한 매력을 가진 배우다.”

-유해진을 생각하며 시나리오 작업을 했다고.

“시나리오 초고를 받고 수정하는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유해진 얼굴이 떠올랐다. 대사를 쓰다 보면 점점 유해진이 됐고, 시나리오가 어느 정도 궤도에 올라왔을 때 유해진에게 보여줬다. 유해진 역시 굉장히 좋아한 시나리오였다. 물론 흥도라는 인물은 유해진의 실제 성격과는 꽤 다르다. 유해진은 알다시피 막 까부는 성격의 사람은 아니다. 캐스팅을 제안할 당시에는 이렇게까지 해낼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어느 정도는 충분히 잘할 거라고 예상했지만, 온탕과 냉탕을 오가면서 그 감정을 이렇게 자연스럽게 섞어낼 수 있을 거라고는 미처 생각하지 못했다. 내가 송강호 선배를 한국 영화사에서 정말 대단한 배우라고 생각하는 이유도 그 지점이다. 한 작품 안에서 온탕과 냉탕을 오가는데도 관객이 낯설게 느끼지 않는다는 점이다. 유해진 역시 마찬가지다. 이 영화에서 그의 연기는 자칫하면 톤이 튄다고 느껴질 수도 있다. 그럼에도 거의 원맨쇼에 가깝게 이야기를 끌고 간다. 그런 연기를 수행하고, 끝까지 감당해 낼 수 있는 배우는 우리나라에 정말 몇 안 된다고 생각한다.”

-이 이야기가 오늘 시대에 시사하는 바는 무엇이라고 보나.

“우리는 종종 역사 속에서 신념이나 정의를 이야기하지만, 성공한 불의는 인정받고 박수받아야 하는가라는 질문을 던지게 된다. 우리 역사에는 성공한 불의의 사례가 너무 많다. 그렇다면 실현되지 못한 정의는 잊혀도 되는가라는 물음이 남는다. 역사라는 것의 가장 중요한 기능은 실현되지 못한 정의를 기억하는 데 있다고 생각한다. 희생자들을 기억하는 것, 그리고 성공의 이면에 있었던 불의를 잊지 않는 것 말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 시대의 이야기가 영화와 드라마로 많이 만들어지는 이유가 아닐까 싶다. 우리 영화 역시 그런 문제의식에서 출발한 측면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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