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키만 크는 게 아니라고?’… 성장호르몬, ‘뇌 기억’도 관여

시사위크=박설민 기자  성장호르몬은 키와 신체 조직 성장을 조절하는 것으로 잘 알려져 있다. 그런데 국내 연구진이 성장호르몬이 단순한 신체 성장뿐만 아니라 뇌의 기억 형성 과정에도 깊이 관여한다는 사실을 밝혀냈다.

기초과학연구원(IBS) 기억및교세포 연구단 강봉균 단장 연구팀은 성장호르몬이 기억을 저장하는 세포가 성숙하는 데 핵심적인 역할을 한다는 사실을 규명했다고 19일 밝혔다. 학습이 이뤄지는 순간과 그 직후 뇌 해마의 강하게 활성화된 신경세포에서 성장호르몬이 빠르게 생성된 것이다.

기억은 특정 경험을 할 때 활성화된 일부 신경세포에 저장된다. 이 세포를 ‘기억저장 세포(engram cell)’라고 한다. 기억이 형성되기 위해서는 기억저장 세포의 구조와 기능이 바뀌는 성숙(maturation)이 필요하다. 즉 기억을 실제로 저장하고 다시 꺼낼 수 있는 기능적 상태로 전환돼야 한다. 그러나 기억저장 세포의 성숙이 언제 시작되고 어떤 분자적 기전에 의해 조절되는지는 명확히 밝혀지지 않았다.

IBS 연구진은 기억저장 세포의 성숙 과정에서 새롭게 만들어지는 단백질에 주목했다. 이 단백질은 신경세포의 구조와 기능 변화를 이끄는 데 직접 관여한다. 세포 변화의 여부가 기억 형성의 성패를 좌우하기도 한다. 이에 연구진은 학습 과정에서 단백질이 만들어지는 시점이 기억 형성에 미치는 영향을 분석했다.

먼저 실험용 쥐가 특정 환경을 위험한 상황으로 인식하고 기억하도록 하는 학습 실험을 진행했다. 학습 시점을 기준으로 단백질 합성을 억제하는 약물을 서로 다른 시간대에 투여했다. 그 다음, 기억 형성 과정에 미치는 영향을 비교했다. 

이후 같은 환경에 다시 노출했을 때 생쥐가 보이는 행동 변화를 통해 기억 형성 여부를 평가했다. 동시에 학습에 관여한 기억저장 세포에서 시냅스 구조와 전기생리학적 특성이 어떻게 달라지는지도 분석했다.

실험 결과, 실험용 쥐는 학습이 끝난 뒤 단백질 합성을 억제하는 경우에는 기억 회상 능력이 유지됐다. 그러나 학습이 이뤄지는 순간을 포함한 초기 단계에서 단백질 합성을 차단하는 경우 생쥐의 기억 회상 능력이 크게 감소했다. 

기억저장 세포에서도 기억이 형성될 때 신경세포 간 연결이 강화되는 시냅스 변화가 관찰되지 않았다. 기억 형성에 필요한 단백질이 학습 과정과 그 직후 매우 이른 시점에 만들어져야 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즉, 짧은 시간 동안의 분자적 변화가 기억저장 세포의 성숙과 이후 기억 유지·회상을 좌우한다는 의미다.

또한 연구진은 학습 초기 단계에서 만들어지는 단백질 가운데 성장호르몬이 학습 직후 해마에서 빠르게 증가한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특히 성장호르몬은 학습 시 활성화된 신경세포에 특이적으로 나타났다. 

연구진은 성장호르몬이 기억 형성에 직접 관여하는지 검증하기 위해 성장호르몬의 신호 전달을 방해하도록 설계된 호르몬 변이체를 해마 신경세포에 발현시켰다. 그 결과, 단백질 합성을 억제했을 때와 마찬가지로 기억저장 세포의 시냅스 변화가 나타나지 않았다. 기억 회상 행동 역시 감소했다.

외부에서 성장호르몬을 주입하는 실험도 수행됐다. 단백질 합성을 억제해 기억 형성이 저해된 상태에서 성장호르몬을 보충하자 기억저장 세포의 구조적·기능적 변화가 일부 회복됐다. 학습 내용을 떠올리는 행동도 되살아났다. 이는 성장호르몬이 기억 형성 과정을 직접적으로 조절하는 핵심 인자임을 시사한다.

강봉균 단장은 “그동안 기억 형성 과정은 주로 신경전달물질과 시냅스 변화 중심으로 연구돼 왔다”며 “이번 연구는 신체 성장 조절 인자로 알려진 성장호르몬이 기억저장 세포의 기능적 변화를 직접 조절할 수 있음을 보여준다”고 밝혔다.

이번 연구는 국제 학술지 ‘사이언스 어드벤시스(Science Advances)’에  20일 온라인 게재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