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가 바꿀 수 없는 것들을 기꺼이 받아들이는 마음의 평정을 주시옵고,/ 변화시킬 수 있는 것들을 변화시키는 용기를 주시며,/ 그 둘의 차이를 분별할 수 있는 지혜를 주시옵소서.”
미국의 신학자인 라인홀드 니버(Reinhold Niebuhr, 1892~1971)의 <평온을 위한 기도 Serenity Prayer> 시작 부분일세. 종교를 갖고 있지는 않지만, 이 기도문은 매우 좋아하지. 행복하게 살기 위해서는 바꿀 수 없는 것은 받아들이고, 바꿀 수 있는 것은 바꾸고, 그 둘 차이를 알아차리는 게 무엇보다도 중요하다는 걸 젊었을 때부터 알았기 때문이야. 40년 전 미국에서 이 기도문을 처음 만났을 때는 너무 좋아서 원문을 책상 앞에 붙여 놓고 외우기도 했네. 그래서 지금도 시작 부분은 영어로도 기억해. 자네도 외워두면 많은 도움이 될 걸세.
God, grant me the serenity/ to accept the things I cannot change;/ courage to change the things I can;/ and wisdom to know the difference.
캐나다 극지방의 이누이트족이 사용하는 아요르나맛(ayurnamat)이라는 말도 좋아하네. 자기가 어떻게 할 수 없거나 자기 힘으로 통제할 수 없는 일은 차분하게 받아들이면서 살라는 뜻이야. 바꿀 수 없는 것을 바꿀 수 있다고 믿고 쓸데없이 자신을 괴롭히지 말라는 의미를 담고 있지. (메건 헤이즈, 『행복을 부르는 언어』, 최다인 옮김)
살아오면서, 아니 지금 이 순간에도, 우리는 바꿀 수 없는 것들을 바꾸려고 얼마나 많은 땀과 피를 흘리고, 그게 뜻대로 되지 않았을 때 얼마나 크게 실망하고 절망하는가? 그리고 자기 뜻대로 되지 않으면 남 탓하면서 얼마나 미워하고 혐오하고 배제하는가? 대다수 사람의 불행은 대개 그렇게 시작하네.
하지만 사람은 누구나 늙으면 스스로 통제할 수 없는 일들이 점점 많아진다는 걸 인정해야 하네. 몸이 자꾸 마음을 배신하는 것도 그중 하나야. 나는 내 힘으로 어떻게 수 없는 일을 겪을 때마다 강의 기도문과 아요르나맛을 떠올리네. 그러면서 내 나이가 어떻게 할 수 없는 것은 다소곳이 받아들이면서 살아야 할 만큼 많다 걸 깨닫지. 노인이 되어서도 젊었을 때처럼 육신과 정신을 마음대로 통제할 수 있다는 생각은 과대망상이야. 여기저기 몸이 아픈 것도 그냥 그러려니 웃으면서 받아들여야 해. 그게 성숙한 노인이 삶을 대하는 지혜로운 태도라고 믿지.
스위스의 심리학자인 칼 융이 어디에선가 했던 말이 생각나는군. “인생의 아침 프로그램을 따라 인생의 오후를 살 수는 없다. 아침에 위대했던 것들이 오후에는 보잘 것 없어지고, 아침에 진리였던 것이 오후에 거짓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지금 우리는 인생의 ‘오후’에서도 해가 서산으로 지고 있는 ‘저녁’ 가까이에 와 있는 노인일세. 그러니 인생의 아침이나 정오에 품었던 꿈과 야망을 계속 갖고 살 수는 없어. 집착할수록 자유롭게 사는 데 짐이 될 뿐이지.
이제 우리는 어둠이 내리는 서쪽 하늘을 붉게 물들이는 저녁노을처럼 아름답게 사라질 준비를 해야 하네. 어떻게 살아야 아름다운 마무리를 할 수 있을까 고민할 때지. 무엇보다도 가볍게 사는 법을 배워야 한다고 생각하네. 날마다 하나둘 버리는 연습을 해야 해. 노인이 되어서도 돈과 권력에 집착하고, 바꿀 수 없는 것을 바꾸려고 억지 부리는 사람들 보면 딱하기도 하고, 때로는 역겹게 보이기도 해. 방하착(放下着), 그게 무엇이든 집착하지 말고 내려놓아야 진정한 자유를 가질 수 있다는 걸 잊지 말게. 그래야 신경림 시인이 <해 질 녘>에서 말했던 것처럼, 젊었을 때 보이지 않던 것들이 보이고, 들리지 않던 소리를 들을 수 있는 거야.
“꽃 뒤에 숨어 보이지 않던 꽃이 보인다./ 길에 가려 보이지 않던 길이 보인다.// 나무와 산과 마을이 서서히 지워지면서/ 새로 드러나는 모양들./ 눈이 부시다./ 어두워지는 해 질 녘.// 노래가 들린다, 큰 노래에 묻혀 들리지 않던./ 사람에 가려 보이지 않던 사람이 보인다.”
주위를 돌아보면 영원히 늙지 않고, 병들지 않고, 죽지 않을 것처럼 살고 있는 사람들이 많네. 하지만 이 세상에 영원히 늙지 않고, 병들지 않고, 죽지 않는 생명체는 없어. 불사(不死)를 꿈꾸는 건 자연의 이치나 존재의 실상을 바로 보지 못하는 사람들이 갖는 망상일 뿐이야. 바꿀 수 없는 걸 바꾸려고 하는 인간의 교만이지. 그런 사람들 눈에는 꽃 뒤에 숨어 있는 꽃도, 길 뒤에 있는 길도 보이지 않아.
아요르나맛! 자네도 좋아하는 말이 되길 바라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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