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난 30여 년 동안 여름에는 아침마다 옥상에 올라갔네. 많은 식물이 꽃을 피우는 꽤 넓은 꽃밭이 있었기 때문이야. 밤새 목이 말라있는 식물들에 물을 흠뻑 주고, 풀을 뽑고, 퇴비를 주면서 직접 작은 정원을 가꾸는 재미가 쏠쏠했지. 새벽에 꽃을 피웠거나 아침에 피울 준비를 하는 꽃들과 함께 노는 즐거움, 누구나 가질 수 있는 게 아니거든. 하지만 올해는 여름 내내 옥상에 올라가지 못했네. 척추관협착증으로 계단을 오를 수 없었기 때문이야.
며칠 전에는 도저히 더 기다릴 수가 없었네. 이번 여름을 이렇게 보내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 들었어. 그래서 땡볕이 내리쬐는 한낮에 찌릿찌릿 절리는 두 발을 절뚝거리며, 두 손으로 난간을 붙잡고 땀을 뻘뻘 흘리며 힘겹게 옥상에 올랐네. 올해 여름부터는 아내도 힘들다고 꽃밭을 제대로 가꾸지 않아서 꽃들이 별로 없더군. 아침에 피는 나팔꽃을 이미 지고 있었어. 오직 우리 집에서 20년 이상 함께 살고 있는 란타나만 활짝 웃으면서 반겨주었네. 뙤약볕 아래서도 울긋불긋 꽃을 피우며 나를 기다리고 있었던 란타나가 얼마나 고마운지……. 란타나의 꽃 위에 앉아 열심히 꿀을 빠는 나비와 꿀벌들도 보기 좋았네. 부럽기도 했어. 사랑에 빠진 꽃과 곤충들을 보면서 떠올렸던 김선우 시인의 <내 몸속에 잠든 이 누구신가>일세.
“그대가 밀어 올린 꽃줄기 끝에서/ 그대가 피는 것인데/ 왜 내가 이다지도 떨리는지// 그대가 피어 그대 몸속으로/ 꽃벌 한 마리 날아든 것인데/ 왜 내가 이다지도 아득한지/ 왜 내 몸이 이리도 뜨거운지// 그대가 꽃 피는 것이 처음부터 내 일이었다는 듯이”
올라올 때는 조금 우울했지만, 란타나꽃과 나비들이 연애하는 광경을 보고 있으니 내 기분도 좋아지더군. 그래서 나도 나비처럼 사뿐히 꽃에 내려앉아 란타나에게 물었지. “그대가 꽃 피는 것”인데 “왜 내가 이다지도 떨리는” 거냐고. “그대 몸속으로” 나비 한 마리 들어간 것 같은데 “왜 내가 이다지도 아득”하고, “왜 내 몸이 이리도 뜨거운지” 모르겠다고. 그랬더니 란타나가 뭐라고 대답했는지 아나?
이게 다 열정 덕분이라고 말하더군. 자신이 꽃줄기를 밀어 올려 꽃을 피울 수 있는 것, 나비가 꽃향기에 취해 꽃 속으로 날아드는 것, 꽃과 나비의 사랑놀이를 보면서 내 몸이 뜨거워지는 것, 이 모두가 다 열정 때문이라는 거야. 열정! 그것 없이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거야. 그러면서 평소 내가 자주 했던 말로 나를 위로하더군. 노인이라고 열정을 버리면 안 된다고. 좀 아프다고 너무 기죽지 말고 힘내라고. 다시 뜨거워지라고. 자기처럼 꽃 색깔을 바꾸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라고… 너무 옳은 말이라 고개를 숙일 수 밖에 없었네.
무더운 열대 아메리카 지역이 고향인 란타나는 보통 6월부터 꽃을 피우기 시작하네. 품종에 따라 약간 차이가 있지만, 우리 란타나는 초가을까지 끊임없이 꽃을 피워. 처음에 피는 꽃은 노란색이지만 시간이 지나면 주황색, 붉은색, 보라색 순으로 변해. 그래서 란타나를 '칠변화(七變化)'라고도 부르기도 한다네. 란타나의 꽃 색깔 변화를 날마다 보지 못한 사람들은 란타나가 다양한 색깔의 꽃을 한꺼번에 피운다고 오해하기 쉽지.
아내는 노랑부터 보라까지 다양한 색깔의 꽃을 한 몸에 지닌 란타나를 칠보단장(七寶丹粧)이라 부르네. 칠변화를 잘못 알고 있는 것이지만 크게 틀린 이름은 아니야. 란타나 자신에게는 꽃 하나하나가 보물일 테니까. 칠보단장은 여러 가지 패물로 몸을 꾸미는 걸 말하네. 그러면 사람들, 특히 여성들은 왜 그렇게 몸을 아름답게 꾸밀까? 물론 다른 사람들에게 예쁘게 보이기 위해서지. 란타나도 마찬가지야. 한 가지 색깔보다는 일곱 가지 색깔 꽃을 갖고 있는 게 더 아름답게 보일 거라고 믿는 거야. 그러면 날마다 공을 들여 칠보단장 하는 란타나는 누구에게 예쁘게 보이고 싶을까. 물론 수분을 돕는 곤충들이지. 그들이 자신이 꾸민 꽃 속으로 들어와야만 더 많은 자손을 퍼트릴 수 있다는 걸 알고 있거든. 생명 있는 것들이 사랑을 하는 이유는 다 비슷하지.
란타나의 꽃 위에서 열심히 꿀을 빨고 있는 나비를 유심히 관찰할 때가 많네. 나비가 가장 좋아하는 꽃 색깔이 뭘까 궁금해서야. 답은 당연히 노란색일세. 나비도 노란색이 금방 핀 꽃이라는 걸 알아. 나비도 오렌지색은 본체만체 그냥 지나쳐. 주둥이를 아무리 들이밀어도 꿀이 없다는 것을 오랜 경험을 통해 알고 있거든. 어쩌면 사랑스럽고 고마운 나비가 그렇게 헛수고하지 말라고 란타나가 미리 꽃 색깔을 바꾸고 있는지도 몰라. 이렇게 사랑에 빠져 상리공생(相利共生)하는 란타나와 나비의 모습이 참 아름답게 보일 때가 많아. 그럴 때면 당연히 내 몸도 뜨거워지지.
란타나가 꽃을 피우고, 꽃의 색깔을 바꾸어 가면서 나비와 꿀벌을 불러들이는 모습을 보면서 인간의 한 생을 생각하네. 노인이 되어서도 란타나처럼 사는 게 좋을 것 같아. 자기를 위해서든, 아니면 함께 사는 다른 사람을 위해서든, 계속 변해야 하네. 그래야 지루하지 않거든. 노년에도 뜨거운 열정이 필요한 이유이기도 하고. 절뚝절뚝, 한 발 한 발 조심조심, 계단을 내려오면서 요즘 타인처럼 따로 놀고 있는 내 몸과 마음에게 속삭였지. 다시 뜨거워지자고. 다시 날아보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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