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대표 극지인⑱] ‘남극 셰프’의 얼음 위 따뜻한 한끼

시사위크

얼음의 땅 ‘남극’은 흔히 ‘미지의 대륙’이라 불린다. 인류의 손길이 제대로 미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세상의 끝’ 남극에서 지구의 미래를 준비하는 이들이 있다. 남극세종과학기지의 월동연구대와 하계연구대가 그들이다. 거대한 빙하, 바다를 떠도는 유빙, 몸을 가눌 수 없을 정도의 강한 블리자드(눈보라). 어떤 위험에도 그들은 남극을 지킨다. 우리는 이들을 ‘국가대표 극지인’라 부르기로 했다. 시사위크 남극특별취재팀이 남극세종과학기지를 찾아 그들을 만나봤다. [남극특별취재팀=김두완 기자, 박설민 기자]

남극에서 ‘식사(食事)’는 단순히 음식을 먹는 행위가 아니다. 영하 수십도를 오가는 추위, 외부와 고립된 환경에서 연구원들을 달래주는 것은 따뜻한 밥 한끼다. 제38차 남극세종과학기지 월동연구대에선 이희영 대원이 조리대원을 맡았다. 매일 쉴 틈없이 세종기지 내 18명의 월동대와 수십명의 하계대 연구원들의 식사를 책임진다./ 사진=남극특별취재팀
남극에서 ‘식사(食事)’는 단순히 음식을 먹는 행위가 아니다. 영하 수십도를 오가는 추위, 외부와 고립된 환경에서 연구원들을 달래주는 것은 따뜻한 밥 한끼다. 제38차 남극세종과학기지 월동연구대에선 이희영 대원이 조리대원을 맡았다. 매일 쉴 틈없이 세종기지 내 18명의 월동대와 수십명의 하계대 연구원들의 식사를 책임진다./ 사진=남극특별취재팀

“음식이 너의 약이 되고, 약이 너의 음식이 되게 하라.
(Let food be thy medicine and medicine be thy food.)”

–히포크라테스 《Regimen II》

시사위크|남극=남극특별취재팀  남극에서 ‘식사(食事)’는 단순히 음식을 먹는 행위가 아니다. 영하 수십도를 오가는 추위, 외부와 고립된 환경에서 연구원들을 달래주는 것은 따뜻한 밥 한끼다. 남극 과학기지의 조리대원이 만드는 음식은 단순한 영양분들의 조합이 아닌, 추위와 외로움에 맞서는 ‘공동체의 온기’가 돼 준다.

제38차 남극세종과학기지 월동연구대에선 이희영 대원이 조리대원을 맡았다. 매일 쉴 틈없이 세종기지 내 18명의 월동대와 수십명의 하계대 연구원들의 식사를 책임진다. ‘시사위크 남극특별취재팀’은 이희영 대원을 따라 진짜 ‘남극의 셰프’의 하루는 어떻게 흐르는지 확인해 봤다. 

◇ 남극의 새벽을 깨우는 ‘부엌’의 소리

새벽 4시. 기지 주변의 펭귄들마저 잠든 시각, 세종기지 본관 주방에 불이 켜졌다. 이른 시간 주방으로 들어온 사람은 이희영 대원이었다. 월동대원들의 아침식사를 준비하기 위해서다. 세종기지의 아침식사 시간은 오전 8시부터다. 하지만 인원수가 많기 때문에 일찍 준비를 시작해야 한다.

이희영 대원은 “먹는 것은 우울증과 외로움을 줄일 수 있는 중요한 수단”이라며 “때문에 고립된 세종기지의 극지 환경에서 조리대원의 역할은 정말 중요하다”고 말했다.

조리대원의 하루는 다른 월동대원보다 빠르게 시작한다. 세종기지 아침식사 시간인 오전 8시를 맞추기 위해선 새벽 4시부터 재료 손질과 준비를 시작해야 한다./ 사진=남극특별취재팀
조리대원의 하루는 다른 월동대원보다 빠르게 시작한다. 세종기지 아침식사 시간인 오전 8시를 맞추기 위해선 새벽 4시부터 재료 손질과 준비를 시작해야 한다./ 사진=남극특별취재팀

이희영 대원의 말처럼 고립된 환경에서 영양가 높은 식사는 우울감 해소에 큰 도움이 될 수 있다는 연구 결과도 있다. 하버드의과대학 연구팀은 지난해 우울증이 있는 22~53세의 성인 1,507명을 대상으로 야채, 과일, 통곡물, 콩, 견과류, 생선, 올리브 오일이 풍부한 ‘지중해식 식단’을 따르는 실험을 진행했다.

그 결과, 지중해식 식단을 섭취한 실험자들은 우울증이 크게 줄어든 것으로 나타났다. 또한 소화 장애도 개선효과가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반면 지중해식 식단을 진행하지 않은 참가자들의 우울증 상태는 개선되지 않았다. 또한 위장약을 복용하는 등 소화기 문제의 개선 효과도 나타나지 않았다.

식사 준비를 하고 있는 이희영 조리대원./ 사진=남극특별취재팀
식사 준비를 하고 있는 이희영 조리대원./ 사진=남극특별취재팀

이희영 대원과 함께 주방에선 2명의 셰프들이 근무했다. 김태연·최홍준 조리지원대원이다. 세종기지의 하계 기간에는 18명의 월동대원 뿐만 아니라 여러 명의 하계대가 방문한다. 때문에 조리대원 혼자 식사를 준비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이에 하계대 소속으로 조리지원대원이 3개월간 파견을 오게 된다.

이희영 대원은 “월동 경험이 있다 보니 여기서 일하시는 분들의 열량 소비를 맞춰 메뉴를 구성하고 있다”며 “부족한 식재료와 한정된 메뉴임에도 불구하고 월동대와 하계대 연구원 분들 모두 맛있게 드시는 것이 너무 좋다”고 말했다.

이어 “남극의 하계 기간엔 연구자들과 정부 관계자 등 외부 방문자가 많은 기간이라 혼자 식사를 준비하는 것은 보통 일이 아니다”라며 “김태연 셰프와 최홍준 셰프가 정말 큰 도움이 됐다”고 덧붙였다.

하계 기간, 3개월간 이희영 조리대원을 돕기 위해 파견된 김태연(사진 위쪽), 최홍준(사진 아래쪽) 셰프의 모습./ 사진=남극특별취재팀
하계 기간, 3개월간 이희영 조리대원을 돕기 위해 파견된 김태연(사진 위쪽), 최홍준(사진 아래쪽) 셰프의 모습./ 사진=남극특별취재팀

◇ 월동대 건강 책임지는 ‘음식’… 부족한 물자에 ‘보릿고개’도

식사 준비를 하지 않는 여가 시간에도 ‘남극의 셰프’는 쉴 틈이 없다. 가장 먼저 냉장고에서 현재 보유한 식자재 숫자와 재료 상태를 확인해야 하기 때문이다. 세종기지는 매년 12월 중에 하계 보급이 이뤄진다. 때문에 보급이 이뤄지기 전까지 식자재를 아껴, 기지 인원들에게 균형잡힌 영양 식단을 제공해야 한다.

남극과 같은 극한 환경에선 음식은 매우 중요하다. 특히 해가 뜨지 않는 ‘극야(極夜)’에 장기간 노출될 시 뼈 건강이 저하될 수 있다. 신선한 칼슘, 마그네슘, 칼륨, 식이섬유 등 영양소를 얻을 수 있는 채소 등 식자재 공급이 원할하지 않아서다.

실제로 호주 멜버른대학교 의과대학 연구팀은 2004년부터 2010년까지 호주남극기지에서 12개월 동안 배치된 성인 225명을 대상, 3일간의 식단을 분석했다. 그 결과, 일부 뼈 관련 영양소의 경우 권장 수준 이하의 섭취가 관찰됐다. 특히 햇빛을 통해 합성가능한 비타민D 결핍이 심하게 나타났다.

이희영 조리대원이 준비한 남극의 메뉴(위쪽)와 세종기지의 세종회관 풍경./ 사진=남극특별취재팀
이희영 조리대원이 준비한 남극의 메뉴(위쪽)와 세종기지의 세종회관 풍경./ 사진=남극특별취재팀

멜버른대 연구진은 “기지대원들의 비타민 C와 B의 결핍은 보고되지 않았으나 칼슘, 마그네슘, 칼륨, 식이섬유 등 채소로부터 얻을 수 있는 영양소와 비타민D는 부족한 것으로 나타났다”며 “극지 환경에서 탐험가의 비타민D 합성의 기회가 제한되어 있으므로 비타민D와 내분비계를 지원하는 영양소가 함유된 식품을 제공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고 설명했다.

특히 올해 세종기지의 ‘보릿고개’는 평소보다 힘들었다. 물자보급이 예년보다 늦어져서다. 세종기지 물자 보급은 보통 12월 중순, 월동 차대 간의 교차가 이뤄지는 시기에 이뤄진다. 하지만 올해는 예산 부족 등의 문제가 얽히며 1월 중순에 보급이 진행됐다. 뿐만 아니라 외부 방송국 예능 방송 촬영으로 인해 식자재 부족이 심화되기도 했다.

이희영 대원은 “보급이 오기 전까지 신선한 야채와 육류가 부족해 재고만으로 버티는 것이 매우 힘들었던 것은 사실이다”라며 “영양적 측면에서도 한 번 고민할 식단 구성 문제를 두 번, 세 번 생각해야 하니 힘들었다”고 말했다.

특히 올해 세종기지의 ‘보릿고개’는 평소보다 힘들었다. 물자보급이 예년보다 늦어져서다. 세종기지 물자 보급은 보통 12월 중순, 월동 차대 간의 교차가 이뤄지는 시기에 이뤄진다. 하지만 올해는 예산 부족 등의 문제가 얽히며 1월 중순에 보급이 진행됐다./ 사진=오영식 연구반장 제공
특히 올해 세종기지의 ‘보릿고개’는 평소보다 힘들었다. 물자보급이 예년보다 늦어져서다. 세종기지 물자 보급은 보통 12월 중순, 월동 차대 간의 교차가 이뤄지는 시기에 이뤄진다. 하지만 올해는 예산 부족 등의 문제가 얽히며 1월 중순에 보급이 진행됐다./ 사진=오영식 연구반장 제공

◇ ‘세종’까지 이어진 ‘장보고’의 인연

이처럼 남극에서 조리대원으로 근무하는 것은 보통 힘든 일이 아니다. 하지만 이희영 대원에게 있어 남극은 ‘고향’같은 곳이다. 13년 전 남극장보고과학기지의 2차 월동대로 첫 근무를 했다. 이후 5차 월동대를 거쳐 지금 세종기지 월동대원으로 파견을 왔다.

이희영 대원은 “20살 때부터 요리사로 활동하면서 외길 인생만 걸어오던 중, 남극 관련 다큐멘터리를 보게 됐다”며 “그 미지의 세계에 너무나 큰 매력을 느끼게 돼 장보고기지 조리대원을 지원하게 된 것이 저의 첫 남극행”이라고 회상했다.

그때 장보고기지에서의 인연이 지금 세종기지까지 이어지고 있다. 현재 세종기지의 김원준 월동대장과 노기영 유지반장 모두 이희영 대원과 과거 함께한 월동대 동료다. 이번 월동도 김원준 대장이 이희영 대원에게 ‘삼고초려’를 해 오게 됐다고 한다.

이희영 대원은 “김원준 대장과는 장보고기지 2차 월동대에서 만나 1년에 3번 정도 함께 모임을 갖는 등 인연을 이어가고 있었다”며 “초밥집을 운영하던 중 김원준 대장이 이번 세종기지 월동대 제안을 했고 저 역시 마지막으로 남극을 한 번 더 가보자는 욕심이 생겨 월동대에 합류하게 됐다”고 말했다.

 이희영 대원에게 있어 남극은 ‘고향’같은 곳이다. 13년 전 남극장보고과학기지의 2차 월동대로 첫 근무를 했다. 이후 5차 월동대를 거쳐 지금 세종기지 월동대원으로 파견을 왔다./ 사진=남극특별취재팀
이희영 대원에게 있어 남극은 ‘고향’같은 곳이다. 13년 전 남극장보고과학기지의 2차 월동대로 첫 근무를 했다. 이후 5차 월동대를 거쳐 지금 세종기지 월동대원으로 파견을 왔다./ 사진=남극특별취재팀

이번으로 세 번째 남극행이지만 늘 새롭다는 게 이희영 대원의 말이다. 장보고기지의 풍경과 세종기지의 풍경이 너무 달라 놀라웠다고 한다. 특히 체감되는 것은 ‘기후변화’다. 과거 남극 풍경은 완전히 새하얀 눈밭과 얼음이었지만 지금은 녹아내린 빙벽, 따뜻해진 날씨가 직접적으로 느껴진다는 것이다.

이희영 대원은 “과거 있었던 빙하도 사라지고 기념 사진 촬영한 빙벽도 무너져버렸다”며 “눈에 보이게 남극지형이 바뀌는 것을 보니 너무나 충격이 컸다”고 말했다.

이제 제38차 월동대가 남극에서 머물 시간은 6개월 남짓 남았다. 하계대 연구원들은 기지를 떠나고 킹조지섬 내 펭귄들도 내륙으로 이동할 시기다. 때문에 이 기간 월동대원들의 지루함을 달래줄 맛있는 식사 준비에 이희영 대원의 어깨는 더욱 무거워졌다. 하지만 이희영 대원은 기지 인원들과의 끈끈한 연대로 잘 버텨나갈 것이라고 기대했다.

이희영 대원은 “남극에서 생활하다 보면 다들 어린이처럼 순수해지는 기분을 느낄 수 있다”며 “남극은 인간의 순박함, 순수성을 되찾게 해주는 공간이라 생각한다”고 말했다. 이어 “남은 월동 기간 모든 기지 인원들을 위해 최선의 식사를 제공하고자 한다”고 전했다.

/ 박설민 기자, 김두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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