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음의 땅 ‘남극’은 흔히 ‘미지의 대륙’이라 불린다. 인류의 손길이 제대로 미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세상의 끝’ 남극에서 지구의 미래를 준비하는 이들이 있다. 남극세종과학기지의 월동연구대와 하계연구대가 그들이다. 거대한 빙하, 바다를 떠도는 유빙, 몸을 가눌 수 없을 정도의 강한 블리자드(눈보라). 어떤 위험에도 그들은 남극을 지킨다. 우리는 이들을 ‘국가대표 극지인’라 부르기로 했다. 시사위크 남극특별취재팀이 남극세종과학기지를 찾아 그들을 만나봤다. [남극특별취재팀=김두완 기자, 박설민 기자]

시사위크|남극=남극특별취재팀 남극은 ‘극지(極地)’다. 말 그대로 ‘극한’의 환경이다. 살을 에는 추위와 날카로운 빙하, 야생동물 등 위험 요소가 곳곳에 도사리고 있다. 뿐만 아니라 외부와의 단절은 극지 활동을 하는 연구원들을 정신적 한계까지 몰아붙이기도 한다.
영하 20도를 넘나드는 추위와 고립된 남극 환경에서 사람들의 생명을 지키는 건 단 한 명의 의사다. 매년 극지연구소는 남극세종과학기지와 장보고 기지 월동연구대에 의료대원을 파견한다. 뛰어난 의료 능력과 강인한 체력, 정신력으로 무장한 의료대원들은 낮밤 가리지 않고 연구원들의 건강을 책임진다.
이번 제38차 남극세종과학기지 월동연구대엔 방성규 의료대원이 파견됐다. 30세의 젊은 나이지만 의학부터 한의학까지 방대한 의료 지식을 보유한 ‘스페셜리스트’다. 지구의 끝단, 가장 외로운 진료실에서 의사이자 약사, 때로는 심리상담가 역할을 맡고 있는 방성규 대원을 만나봤다.

◇ 작은 부상도 위험요소… 남극 의무실의 하루
지난 1월 2일 남극세종과학기지에 여유가 찾아온 저녁, 갑자기 기지 내부가 소란스러워졌다. 심각한 얼굴로 김원준 세종기지 월동대장과 황의현 총무가 외부와 통신을 주고받았다. 또한 황대하 해상안전대원과 우재호 생물대원을 필두로 월동대원들이 부산스럽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이유는 하계대 연구원 중 한 명이 부상을 당한 것이다. 기지 내 활동 중 계단에서 넘어지면서 다리를 다쳤다. 부상자는 인하대학교 해양동물학연구실의 서혜인 연구원이었다. 발목이 급격히 부어올라 골절이 의심됐다. 긴급 환자 발생 상황에 방성규 의료대원도 바빠졌다. 기지 내 의무실로 환자를 이송한 후 진찰을 시작했다.
방성규 의료대원은 X-레이 설비로 부상 부위를 촬영한 후, 데이터를 원격의료시스템으로 한국의 가천대 길병원으로 전송했다. 가천대 길병원은 극지연구소의 의료협력기관이다. 세종기지에서 진료 도움을 요청하면 길병원 상주한 전문의가 영상과 음성으로 원격 진료를 진행한다.

원격의료 시스템이 연결된 후, 방성규 의료대원과 길병원 전문의의 논의가 진행됐다. 이를 지켜보는 김원준 월동대장과 황대하 해상안전대원의 얼굴에도 긴장이 가득했다. 만약 기지 내에서 치료가 불가능할 시 칠레 공군기지에 연락해 외부로 환자 이송이 필요할 수도 있는 긴급 상황이었다.
약 2시간 후, 진단 결과가 나왔다. 발목에 실금 골절이 발생했다. 하지만 아주 심각한 부상은 아니기에 기지 내에서 깁스를 하고 체류가 가능할 것으로 판단됐다. 긍정적인 결과에 기지 인원들 모두 긴장이 풀렸다. 특히 한 해 연구를 통째로 망칠 뻔한 서혜인 하계대 연구원은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평화가 찾아온 세종기지 의무실, 방성규 대원의 얼굴에도 여유가 돌아왔다. 환자를 진단하고 치료하는 것은 의료대원이자 의사인 방성규 대원의 임무지만 늘 긴장되는 일인 것은 어쩔 수 없다. 특히 남극과 같은 오지에선 잘못된 치료, 진단이 자칫 더 큰 부상으로 이어질 수 있어서다.
방성규 대원은 “하계대 분이 큰 부상은 아닐까 노심초사 했는데 진단 결과 심각한 것은 아니라 안심이 됐다”며 “환경이 환경인 만큼 연구자분들과 대원 분들이 조심할 필요가 있고 저 역시도 최선을 다해 진료하려고 한다”고 말했다.

◇ 바쁘면 안되는 의료대원… 인프라부터 약품까지 모두 부족
한 차례 폭풍이 지나갔지만 사실 극지의 의사는 크게 바쁘진 않다. 정확히는 ‘바빠선 안된다’는 말이 맞다. 월동대원들과 하계대 연구원들은 모두 남극 방문 전 신체검사를 진행한다. 때문에 거의 대부분 건강 상에는 문제가 없는 상태로 입남극한다. 만약 의무대원이 바쁜 상황이라면 정말 ‘큰일’이 났다는 것을 의미한다.
방성규 대원은 “아무래도 의료대원이 다른 월동대원들에 비해서 맡은 역할이 적은 것은 사실이지만 세종기지에서 의사가 최대한 바쁘지 않은 것이 제일 좋은 일”이라며 “한국에서 병원에 8개월 간 근무할 땐 통증 및 일반 감기환자 위주로 하루 40~50명 정도의 환자를 진료했다”고 말했다.
실제로 세종기지를 포함한 극지의 의사들의 일은 아주 많지는 않다. 극지의학회에서 제공한 2013년부터 2018년까지 기록된 아라온호 의료일지에 따르면 아라온호 선의가 진료한 환자의 수는 총 1,318명이다. 하루 1.78명의 환자를 의사가 돌본다. 국내서 일반 의사가 하루 담당하는 환자 수가 34.2명인 것과 비교하면 약 20배 적다.

하지만 ‘큰일’이 발생했을 경우 상황은 급박하게 돌아간다. 의사 혼자서 모든 치료를 담당해야 하고 의료시설과 자원도 상대적으로 부족할 수밖에 없어서다. 작은 골절도 세종기지에선 큰 부상이다. 남극이라는 지형 특성상 환자 이송도 어려워 구조대 도착까지 최대 한 달이 걸릴 수도 있다.
‘인프라 부족’도 의료대원에겐 큰 장애물이다. 원격의료 시스템, X-레이 촬영 장비 등은 갖췄지만 대형 수술을 진행할 인프라는 사실상 없다. 실제로 며칠 전 대원 중 한 명이 생선가시가 목에 걸려 의무실을 찾았을 때도 대처가 쉽지 않았다는 것이 방성규 대원의 말이다. 식도에 깊숙이 박힌 뼈를 제거할 내시경 장비가 없었기 때문이다.
방성규 대원은 “의료 현장에서 장비가 없다는 것은 매우 큰 제약으로, 이는 응급처치 외에는 할 수 있는 것이 없음을 의미한다”며 “X-레이나 초음파 장비는 있지만 남극이라는 위험한 환경에서 발생할 수 있는 사건이 너무 많은 만큼 걱정도 된다”고 말했다.
약품 역시 제한적이라 아껴서 써야 한다. 심지어 감기약, 타이레놀, 두통약, 진통제 등 상비약품은 유통기한이 몇개월 지난 것들도 많았다. 약이 유통기한이 지난다고 썩는 것은 아니지만 약효가 줄어들 가능성이 있다. 그러나 이조차도 월동대에겐 ‘소중한’ 자원이다.
방성규 대원은 “의무실에 도착했을 때 가장 당황했던 것은 유통기한이 약 1~2년씩 지난 약품들을 사용해야 한다는 것이었다”며 “이번 차대서 의료대원을 맡은 만큼 제대로 재고 조사를 다해 신규 물품을 요청할 예정”이라고 말했다.
이어 “약이라는 것이 유통기한이 지나면 썩는 것이 아니지만 활성기가 지나 성분이 변화해 효능이 크게 줄어들게 된다”며 “월동대나 하계대 연구원들이 약 효과가 잘 안 든다고 하는 이유가 유통기간이 너무 많이 지났기 때문이라 추측한다”고 설명했다.

◇ 청진기와 침, 둘 다 든 강철 체력의 남극 의사
한정된 자원, 극한의 환경에서 홀로 의료 업무를 맡아야 하는 만큼 월동대 의료대원 선발은 철저한 검증 과정을 통해 진행된다. 현재 남극과학기지 월동대 의료대원은 가천대 길병원에서 선발·채용 후 파견하는 방식으로 이뤄진다.
세종기지의 경우 ‘일반의 자격증’이 필수적이며 남극 현지 응급수술 집도 가능한 외과·응급의학과 전문의를 우대한다. 때문에 지금까지 거의 대부분의 극지 파견 의료대원은 의과대학을 나온 전공의나 병원에서 근무하던 전문의들이다.
이때 방성규 대원은 굉장히 독특한 이력을 가지고 남극에 왔다. 원래 전공은 ‘한의학’이었다. 이후 의학전문대학원(의전원)에서 공부를 마치고 일반의 자격증을 취득했다. 일반 의학과 한의학 두 가지 분야를 모두 다룰 수 있는 의사인 셈이다. 한의학을 전공했던 의사가 남극에 파견된 것은 방성규 대원이 최초다.

방성규 대원은 “처음 한의대를 입학하고 6년간 공부했을 당시 침과 한약으로 사람을 치료한다는 신비로움에 매료됐지만 한계도 뚜렷하다는 것을 느꼈다”며 “표준화되고 과학화된 현대 의학을 체계적으로 배워 한의학과 결합할 수 있다면 더 많은 환자들에게 도움을 줄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해 일반의 자격증도 취득했다”고 말했다.
이어 “한국에서 약 8개월간 대형병원에서 근무하던 중, 극지연구소의 월동대 모집 공고를 보고 극지에 대한 로망이 불타올라 지원을 하게 됐고 최종 합격해 지금 세종기지에 파견오게 됐다”며 “1년 동안 남극에서 생활한 후 돌아가 전공의 수련 과정을 다시 거치게 될 예정”이라고 덧붙였다.
현재 방성규 대원이 가장 노력하는 것 중 하나는 ‘체력 관리’다. 세종기지에는 의료대원이 한 명 뿐이다. 만약 방성규 대원이 피로로 쓰러지거나 아프게 된다면 기지 내 환자를 돌볼 수 있는 사람이 없다. 때문에 본인 건강을 최우선하는 것이 곧 월동대의 건강과 직결된다는 것이 방성규 대원의 말이다.

실제로 방성규 대원은 지난 4월 개최된 ‘남극 대륙 마라톤(Antarctica Marathon)’에 참가, 3등을 차지하기도 했다. 남극 대륙 마라톤은 국제 여행사 ‘Marathon Tours & Travel’에서 개최하는 국제 마라톤 대회다. 한국과 미국, 영국, 아르헨티나, 칠레 등 국가에서 온 360여명이 참가했다.
방성규 대원은 “남극의 의사라는 경험은 세상에 다시 없을 경험이라 생각한다”며 “특히 월동대와 하계대 모두 여러 방면에 출중한 분들이 많아 새로운 것을 배우며 나 자신의 가치관을 융합해 가는 과정에 보람을 느낀다”고 말했다.
이어 “지금까지 앞만 보고 달렸지만 남극에서는 목적을 향해 달려가는 것이 아닌 인생의 터닝포인트가 될 수 있는 시간을 가질 수 있게 됐다”며 “저 자신을 되돌아볼 수 있는 곳이 바로 남극의 매력이라 생각한다”고 덧붙였다.
/ 박설민 기자, 김두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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