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반호공 선조님의 흔적을 찾아서

맘스커리어
▲윤석구 한국열린사이버대학교 특임교수 / 경영학 박사

[맘스커리어 = 윤석구 한국열린사이버대학교 특임교수 / 경영학 박사] 반호공(盤湖公) 선조님은 1806년(순조 6년) 2월 경상도관찰사로 부임하여 1808년(순조 8년) 1월에 이임하셨다. 그전에는 충청도관찰사와 이조참의 부호군을 역임하신 분이셨다. 언젠가 관직에서 물러나실 것을 대비하셨는지, 충헌공과 명재 할아버지 등 선조들이 계신 논산 계룡산 언덕 인근 노성(魯城)이 보이는 곳에 터전을 준비하셨다. 그곳이 바로 현 부여군 세도면(世道面), 옛 지명으로는 임천현(林川縣)의 반조원 백마강 언덕이다.

반조원(頒詔院)이라는 지명은 나당 연합군 시절 금강을 타고 이곳에 이른 당나라 소정방이 당 고종(唐高宗)의 칙서를 반포했다는 데서 유래했다고 전해진다. 1400년 전의 불편한 역사이지만, 그럼에도 이곳은 나의 고향 반조원리(頒詔院理) 마을이다. 지형상 강경과 부여의 중앙 정도에 위치하며, 백마강이 유유히 흐르고, 좌로는 부여 파진산, 정중앙으로는 계룡산, 우측으로는 강경 옥녀봉이 보이는 명당 중의 명당이다.

아마도 반호공께서는 충청관찰사를 역임하시며 이 지역을 살피셨을 것이다. 강 위로 우뚝 솟은 절벽 위 고풍스러운 집 두 채와 아름드리 고목이 곳곳에 자리한 이 터전은, 노성이 백마강만 건너면 지근거리에서 선조들의 숨결을 느낄 수 있는 의미 깊은 곳이었다.

무엇보다도 황희 정승의 사당 반구정이 임진강 통일대교 입구에 있고, 퇴계 이황 선생의 도산서원이 낙동강변 언덕에 있으며, 율곡 이이의 서원과 정자 또한 임진강 언덕에 있듯이, 반호공께서도 이러한 선현들의 뜻을 따라 퇴임 후 배산임수의 터에서 흐르는 강물을 바라보며 과거를 회상하고, 물고기 낚시질에 술 한 잔 기울이며 시 짓고, 벗이 찾아오면 툇마루에 앉아 세상을 논하는 그런 삶을 꿈꾸셨을 것이다.

충남대학교 이향배 교수(한자문화연구소장)는 재작년 학술논문에서 "반호공(윤광 안)은 초계문신으로 선발돼 정조의 선정에 크게 기여한 인물"이라 발표했다. 또한 충남대 윤여갑 한문학 박사는 "다산 정약용이 '목민심서'에서 반호공의 역량을 칭찬했으며, 당쟁으로 중병이 든 조선을 반호공은 되살리려는 개혁사상을 지녔고, 민초의 생활을 개선하려는 의지를 보이며 충청도와 경상도 도백(道伯)으로 있으면서 행정을 통해 반영하고자 했지만 당쟁 앞에서 무력했던 인물"이라고 평가했다.

영조대왕 시절, 다산 정약용 선생과 동시대의 초계문신으로 규장각에서 신진세력으로 활약하셨던 반호공은 경상관찰사 재임 시 현재 대구 유형문화재 1호와 2호로 지정된 선화당과 징청각을 건립하셨다. 대구를 방문할 때마다 나는 꼭 그곳에서 선조의 숨결을 느끼곤 한다.

그런 선조께서 은퇴 후 낙향하셔서 유서 깊은 백마강 언덕변에 반호정사(盤湖精舍)와 삼의당(三宜堂)을 건축하시고 말년을 보내셨다. 유감스럽게도 "독서하기 좋고, 밭 갈기 농사짓기 좋고, 낚시하기 좋다"는 의미의 삼의당은 1919년 화재로 주춧돌만 남아있어 늘 마음이 아프다.

유서 깊은 반호정사와 삼의당을 배경으로 한 고향집 풍경을 겸재 정선 선생께서 1750년경 방문하여 '임천고암(林川鼓岩)' 그림을 그리셨고, 그 그림이 한 달 전 호암미술관에서 전시된다는 소식을 듣고 가슴이 두근거렸다. 솔직히 겸재의 임천고암 그림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은 이명박 대통령 재임 시 4대 강 유역 개발이 한창일 때였다. 금강유역 개발과 함께 백마강 유역의 임천고암 그림 속 삼의당도 복원되어야 한다는 신문 보도를 통해 겸재가 고향집 언덕을 방문하고 그림을 남기셨음을 알게 되었다.

간송미술관에 보관되어 있다는 실물 그림을 꼭 보고 싶었으나, 두 번이나 문의했음에도 감상이 어렵다는 답변을 듣고 체념하고 있었다. 그러다 호암미술관에서 전시회가 개최된다는 소식에 너무도 흥분되어 잠에서 자주 깨기도 했다.

덕연인문경영연구원 한영섭 원장님과 일행 40여 명과 함께하는 겸재 전시회 관람일은 5월 24일로 예정되어 있었지만, 마음이 그때까지 기다려주지 않았다. 지하철을 타고 버스를 타고 에버랜드에 도착했다. 아이들이 어렸을 때 놀이기구를 태워주기 위해 번갈아 줄을 서주던 20여 년 전의 추억들이 스쳐 지나갔다. 다행히 자녀들은 이제 제 짝을 만나 성실히 살아가는 건장한 사회의 건전한 청년들로 성장했다.

호암미술관 매표소 정문에서 사전 예매한 표를 교환하고 도로와 호수 사잇길을 이용해 미술관으로 향했다. 요소요소 망부석과 토끼와 거북이 한 몸으로 조각된 작품 등을 살피며, 석가탑과 다보탑이 있는 양 중앙의 거대한 건물 미술관으로 들어섰다. 1층과 2층 두 개 층에 전시되는 겸재 출품 전 중 먼저 1층에는 금강산을 배경으로 한 그림들이 전시되어 있었다. 마음과 몸은 그 진수의 그림들을 지나쳐 임천고암을 찾기 위한 발걸음이 빨라졌다.

1층 전시실은 방이 4개로 구분되어 있었는데, 이리저리 찾아도 보이지 않다가 네 번째 방 출구 직전에 그토록 보고 싶고 만져보고 느껴보고 싶었던 임천고암 그림이 딱 버티며 반겨주는 게 아닌가! 가슴이 벅차고 눈물이 났다. 1750년경 산수화의 대가 겸재 선생이 고향집 배경지를 방문하고 그리신 것으로 알려진 임천고암. 나도 모르게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임천고암을 그릴 당시 그림 속의 집 이름은 반주정사(盤州精舍)였다. 그로부터 50년이 흐른 후 반호공 할아버지는 그 땅을 구입하시고 본채 반호정사(盤湖精舍)와 삼의당(三宜堂)을 다시 건축하셨다. 220년이 흐른 오늘날까지 후손들이 그 고목들과 어우러진 고택에서 반호공 선조님이 꿈꾸었던 삶을 이어가고 있다. 밭 갈기 좋은 땅에서 상추와 배추를 심어 싱싱한 채소를 먹고, 때로는 쪽배를 강물에 띄워 투망을 던져 물고기를 낚아 막걸리 석 잔을 나누며, 은행나무 아래 침상에 누워 강물결과 바람결 속에서 책을 읽으니, 할아버지가 꿈꾸었던 삼의(三宜)의 맛을 후손들이 누리고 있는 것이다. 그 얼마나 복(福) 받은 일인가.

그림을 바라보며 두 손 공손히 모아 선조님께 깊이 감사함을 드리며, CNB 저널 옛길 답사기 이한성 기자가 간송에 보관된 최완수 선생의 그림 설명을 바탕으로 게재했던 임천고암 그림을 관람객들에게 자랑삼아 짧게 설명했다.

"백마강변 우뚝한 바위 절벽 위에 건물이 하나 있습니다. 책 읽고 시 짓고 벗들과 한담(閑談)하거나 후학을 지도할 만한 독서당입니다. 그 앞으로는 정자관(程子冠)에 도포 입고 동자 하나 거느리고 지팡이 짚은 선비가 고개를 조금 들어 강 건너를 바라보고 있습니다. 은일(隱逸)하게 은거한 은자(隱者)의 모습입니다."

"그림 속에는 학(鶴) 한 마리가 독서당 앞을 거닙니다. 은자가 사는 곳이니 찾아와 노는 것일까요? 옛 선비들은 매처학자(梅妻鶴子: 매화를 아내 삼고 학을 자식 삼아 사는 은자의 삶)로 사는 송나라 임포를 숭앙했습니다. 그러다 보니 실제로 학을 기르기도 했지요. 홍만선의 '산림경제'에는 학 기르기가 소개되고, 심수경의 '견한잡록'에는 학이 알 깐 이야기도 있으며, 미수 허목도 학 기르는 이야기를 기록했습니다. 심지어 홍문관에서도 학을 기르고 학 경연대회가 열리기도 했다고 합니다."

"주목할 점은 겸재가 이 먼 곳까지 찾아가서 그림을 남긴 것을 보면 아마도 겸재의 삼종질(三從姪)인 삼회재(三悔齋)와 인연이 있지 않았을까 하는 점입니다!"

흥분된 마음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3년여간 개성공단에서 근무했던 나에게, 인근의 박연폭포를 배경으로 한 겸재의 '박생연' 그림이 임천고암과 바로 옆에 전시되어 있는 것은 또 다른 인연이었다. 황진이와 서경덕 선생의 술잔이 가야금 소리에 어울려 뭇 사내의 가슴을 후벼 팠을 박연폭포, 우리은행 개성공단 근무 당시 개성공단에 용수를 공급하던 수십km 상부의 저수지 옆을 지나면서 서경덕의 묘소가 있다고 들었다. 백마강을 뚫고 우뚝 솟은 바위, 제주도의 주상절리보다 더 아름다운 북의 단면과 닮았다 하여 '고암(鼓岩)'이라 이름 지어진 이 임천고암 그림과, 역시 바위를 등지고 낙하하는 박연폭포 그림이 함께 있다는 것은 필연적인 운명의 만남처럼 느껴졌다.

겸재 선생께 이 역작을 남기신 그 정신에 합장의 예를 갖추고 2층 전시실을 살핀 후, 다시 1층 전시실을 꼼꼼히 살폈다. 2005년 방문한 바 있는 금강산 일만이천봉의 겸재 그림들 속에서 특별히 '계상정거도'가 눈에 확 들어왔다. 1000원짜리 지폐 뒷면에 우리는 무심결에 지폐를 사용하지만 전면의 퇴계 선생과 더불어 숭고하게 장식되어 있는 계상정거도의 의미를 도록을 통해 면밀히 공부하며 발걸음을 미술관 앞 정원으로 옮겼다. 


마침 찔레꽃 향기가 코 끝을 누볐다. 안양 CC 10번 홀에서 11번 홀로 넘어가는 길목에 이병철 회장님의 호암자전에 쓰신 "찔레꽃 필 때면 어머님이 생각난다"는 시비가 역시 가슴을 적셨었다. 찔레꽃 필 때면 춘궁기가 되어 회장님의 어머님은 주변에 보리쌀이라도 나누어 춘궁기를 보내자고 실천하셨다는 대목에서 눈시울을 붉힌 적도 있었는데, 오늘 미술관과 더불어 정원의 풀 한 포기, 나무 한 그루, 꽃 한 송이 모두가 회장님의 정성이 묻어있고, 너무도 훌륭한 겸재 선생의 그림을 관람할 수 있도록 미술관을 만드신 것도 결국 이병철 회장님의 정성과 헌신이었기에, 45년 전 이 회장님으로부터 직접 면접을 본 필자로서는 감개무량하고 존경의 마음이 끝이 없을 뿐이다.

선조의 유산 백마강 언덕의 반호정사 인연을 따라 겸재를 만났고, 그의 붓 끝에 담긴 우리 선조들의 정신과 삶의 풍경에 진정으로 감동받은 호암미술관의 겸재 전. 220년의 시간을 넘어 반호공 선조님과 겸재 선생이 바라본 그 풍경을 오늘날 내가 다시 바라보며, 그 깊은 인연의 끈을 이어가고 있음에 가슴 벅찬 감사함을 느낀다.

 

맘스커리어 / 윤석구 한국열린사이버대학교 특임교수 / 경영학 박사 [email protec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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