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위크=김두완 기자 오랜 신뢰가 외교적 자산이 됐다. 한국이 독립과 평화 정착을 도왔던 동티모르가 이제 아세안의 일원으로 협력의 폭을 넓힌다. 동티모르가 아세안 의장국을 맡는 2029년에는 한·아세안 특별정상회의도 열린다. 양국이 긴밀하게 협의해야 할 이유가 생긴 셈이다. 이번 정상회담은 그 협의를 이어갈 정례 창구를 만들고 한국인 보호를 위한 수사 공조 체계도 마련했다. 상록수부대 파견과 개발 지원으로 쌓은 신뢰가 아세안 외교와 한국인 보호를 위한 협력의 통로를 열었다. 국민 안전을 뒷받침할 기반으로 이어진 것이다.
◇ 재건 함께한 양국, 2029년 아세안 공조 준비
이재명 대통령은 6일 청와대에서 공식 방한한 조제 하무스 오르타 동티모르 대통령과 정상회담을 하고 외교·지식재산·치안 분야 협력을 위한 약정 3건을 체결했다. 양국은 첫 고위급 정례협의체를 신설하고, 동티모르의 2029년 아세안 의장국 활동과 같은 해 한·아세안 특별정상회의를 위해 협력하기로 했다. 동티모르 정상의 양자 공식 방한은 2002년 수교 이후 처음이다.
이날 오전 청와대 본관 2층 접견실에서는 양국 장관과 기관 대표들이 차례로 서명한 문서를 교환했다. 뒤에 나란히 선 양 정상은 박수를 보냈다. 이어 인왕실에서 열린 오찬 확대회담에서 이 대통령은 “동티모르의 아세안 내 역할 확대를 위해서도 대한민국이 다각도로 지원할 수 있도록 하겠다”고 밝혔다. 오르타 대통령은 한국의 평화유지군 파견과 개발 지원에 감사를 표하면서 청년 고용과 한국 기업 투자, 과학기술 협력으로 논의를 넓혔다.
양국 관계의 출발은 수교 이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한국은 1999년부터 2003년까지 상록수부대를 파견해 동티모르의 치안 유지와 주민 구호를 도왔다. 독립 이후에는 보건·교육·직업훈련 등 개발협력을 이어갔다. 지원을 매개로 형성한 관계는 국제무대 공조로도 이어졌다. 2023년 제주포럼 참석차 방한한 오르타 대통령은 윤석열 당시 대통령과의 면담에서 한국의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비상임이사국 진출과 국제해양법재판관 선출 등을 지지했다.
이번 회담은 동티모르의 아세안 가입 이후 협력을 구체화하는 자리였다. 2023년 면담 당시 옵서버였던 동티모르는 지난해 10월 아세안의 11번째 정회원국이 됐다. 한국은 오랜 개발협력 상대와 이제 아세안 현안까지 논의할 수 있게 됐다. 아세안은 협의와 합의를 의사결정의 기본 원칙으로 삼는다. 동티모르와의 공조만으로 회원국 전체의 지지를 확보할 수는 없지만, 한국의 제안을 설명하고 의견을 조율할 통로는 넓어졌다.
2029년에는 협의의 필요성이 더 커진다. 아세안 의장국은 정상회의와 관련 회의를 주재하고 회원국들의 의견을 조율하며 대외 협력을 이끄는 역할을 맡는다. 같은 해 한·아세안 특별정상회의를 준비하는 한국에도 동티모르와의 사전 협의가 중요하다. 이 대통령은 공동언론발표에서 동티모르의 의장국 역할 수행을 지원하고 특별정상회의의 성공적인 개최를 위해 양국이 적극 협력할 필요가 있다는 데 동의했다고 밝혔다.
정례협의체 신설은 이 일정을 함께 준비할 창구다. 기존에도 정상과 장관이 만나 협력을 논의했지만 앞으로는 외교 당국이 정기적으로 양자 관계와 아세안·국제 현안을 다룰 수 있게 된다. 한국이 올해 시작한 한·아세안 자유무역협정 개선 협상에는 디지털 무역과 핵심광물, 공급망 등 기업 활동과 직결된 의제도 포함돼 있다. 동티모르와의 협의만으로 협상 결과를 좌우할 수는 없다. 다만 아세안과 협력할 사안이 늘어나는 상황에서 오랜 우방과 지속적으로 의견을 나눌 통로를 확보한 것은 이번 회담의 외교적 성과다.
◇ 수사 공조로 국민 보호… 경제협력은 제도 정비부터
양국 경찰은 이날 ‘치안협력을 위한 기술약정’을 체결하고 초국가범죄 공동 대응과 국외 도피 사범 수사 공조를 강화하기로 했다. 정례 실무협의체 운영과 직통 연락망 구축도 약정에 담았다. 한국인을 대상으로 한 사건·사고가 발생했을 때 양국 경찰이 신속하게 정보를 공유하고 수사에 협조할 체계를 마련하는 내용이다.
외교 당국의 정례협의체가 아세안 현안을 논의할 창구라면 경찰 간 연락망은 국민 보호에 활용할 수단이다. 현지에서 한국인이 범죄 피해를 입거나 도피 사범에 대한 수사가 필요할 때 담당 기관이 직접 협조를 요청할 수 있도록 하겠다는 것이다. 지난 6월 외교장관 회담에서도 치안 협력 확대를 논의했지만 이번에는 실무협의체와 연락망을 명시한 약정으로 협조 절차를 구체화했다.
경제협력에서는 동티모르의 제도와 인력을 갖추는 지원에 무게를 뒀다. 지식재산 분야 양해각서는 관련 법령·제도 수립과 권리 보호, 사업화·가치평가 경험 공유 등을 담았다. 그동안 추진해 온 동티모르 지식재산청 설립 지원과 역량 강화 사업을 이어갈 근거다. 양국은 고용허가제를 통한 노동협력과 동티모르 내 한국어 교육도 강화하기로 했다. 동티모르 청년의 취업 역량을 높이고 한국에서 일하는 노동자의 안정적인 생활을 지원하는 방향이다.
오르타 대통령은 오찬 확대회담에서 “그저 이론이 아닌 실용적인 협력 방안들을 더 많이 모색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이어 청년 고용과 한국 기업의 투자, 과학기술 협력을 언급했다. 양국은 협력을 뒷받침할 후속 협정도 추진한다. 기후변화협력협정과 파리협정 제6조 이행 양해각서를 통해 녹색경제 분야의 협력 기회를 모색하고, 무상원조 기본협정으로 개발협력 사업을 안정적으로 추진할 기반을 마련하기로 했다.
아세안 외교의 폭은 개별 회원국과 맺은 관계에서 나온다. 동티모르가 필요로 하는 인력 양성과 제도 구축을 돕는 일은 한국이 지역 현안을 함께 논의할 상대의 역량을 높이는 일이기도 하다. 국가 발전을 위한 협력과 한국의 외교적 이익이 만나는 지점이다. 개발협력을 장기적인 관점에서 이어가야 할 이유도 여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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