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자주] 총수 일가가 제한적인 지분으로 그룹을 지배하고 이사회가 이를 뒷받침해 온 대기업 경영 방식에 변화가 시작됐다. 개정 상법은 이사의 책임을 전체 주주로 확장하고 소수주주가 지지하는 후보의 이사회 진입 가능성을 높였다. 자사주를 활용해 우호 지분을 확보하는 전통적인 경영권 방어 방식도 제약을 받는다. 총수의 지배력은 앞으로 지분율뿐 아니라 이사회와 주주의 동의를 끌어내는 능력에 따라 좌우될 전망이다. 마이데일리는 삼성·SK·현대자동차·LG 등 4대 그룹의 지배구조를 들여다보고 개정 상법이 이사회 운영과 총수 리더십, 향후 승계 구도에 가져올 변화를 살펴본다.

[마이데일리 = 윤진웅 기자] 구광모 LG그룹 회장은 4대 그룹 총수 가운데 상대적으로 안정적인 지배구조를 확보하고 있다. 순환출자 없이 지주회사 ㈜LG가 주요 계열사를 거느리고, 구 회장은 ㈜LG 지분 15.96%를 보유한 최대주주다.
개정 상법 시행이 당장 구 회장의 경영권을 흔들 가능성은 크지 않다는 평가가 나오는 이유다. 삼성그룹처럼 금융계열사를 거쳐 핵심 회사를 지배하거나 현대자동차그룹처럼 순환출자에 의존하지 않아 해소해야 할 구조적 과제도 비교적 적다.
하지만 지배구조가 안정적인 만큼 주주가 요구하는 책임의 무게는 오히려 커질 수 있다. 경영권 방어보다 지주회사 할인 해소와 주주환원, 자회사 가치 제고에 자본을 활용해야 한다는 요구다.
구 회장은 올해 3월 ㈜LG 이사회 의장직을 독립이사에게 넘기며 대표이사와 의장의 역할을 분리했다. 내년 3월에는 자신의 사내이사 임기까지 만료된다. 안정적인 지분을 바탕으로 그룹을 이끄는 단계를 넘어 독립이사와 주주에게 경영 성과를 인정받아야 하는 첫 재신임 무대가 다가오는 셈이다.
◇구광모→㈜LG→계열사…순환출자 없는 단순한 구조
LG그룹 지배구조의 정점에는 지주회사 ㈜LG가 있다. 구 회장은 지난해 말 기준 ㈜LG 주식 2509만6717주를 보유한 최대주주로 지분율은 15.96%다.
구 회장은 2018년 고(故) 구본무 선대회장이 별세한 뒤 ㈜LG 지분 8.76%를 상속받았다. 기존에 보유한 지분 6.24%를 더해 그룹 최대주주 지위에 올랐다.
LG그룹의 핵심 지배구조는 ‘구광모 회장→㈜LG→주요 계열사’로 이어진다. ㈜LG는 LG전자와 LG화학, LG유플러스, LG생활건강, LG CNS 등 그룹 주요 계열사의 최대주주다.
그 아래에서는 LG화학이 LG에너지솔루션을, LG전자가 LG디스플레이와 LG이노텍을 지배한다. 구 회장이 ㈜LG의 최대주주 지위를 유지하면 지주회사와 자회사를 통해 전자·배터리·화학·통신·인공지능 사업 전반에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다.
총수 일가와 특수관계인이 보유한 지분까지 고려하면 경영권 방어력은 더욱 높아진다. 순환출자 고리가 없어 특정 계열사의 지분 변동이 그룹 전체 경영권으로 번질 가능성도 상대적으로 작다.
다만 안정적인 지분이 이사회에 대한 절대적인 영향력을 보장하는 것은 아니다. 집중투표제와 감사위원 분리선출 확대에 따라 기관투자자와 소수주주가 회사 측과 다른 후보를 이사회에 진입시킬 통로가 넓어졌기 때문이다.
감사위원이 되는 이사를 선임할 때는 최대주주와 특수관계인의 의결권이 합산 3%로 제한된다. 구 회장 측의 전체 지분율이 높더라도 감사위원 선임 과정에서는 기관투자자와 소수주주의 표를 별도로 확보해야 한다.
구 회장의 과제는 지주회사 지분을 지키는 데 그치지 않는다. 회사가 추천한 이사 후보와 그룹의 경영 전략이 전체 주주의 이익에 부합한다는 점을 시장에 설명해야 한다.

◇독립이사 의장 체제로 전환…이사회 밖 견제 강화
㈜LG 이사회는 사내이사 3명과 독립이사 4명 등 총 7명으로 구성돼 있다. 독립이사 비율은 57.1%로 이사회 과반을 차지한다.
사내이사는 구 회장과 권봉석 대표이사 부회장, 하범종 경영지원부문장 사장이다. 독립이사는 박종수 이사회 의장과 이수영·정도진·김환수 이사다.
감사위원회에는 독립이사 4명 전원이 참여한다. ESG위원회도 독립이사 4명과 권 부회장으로 구성돼 독립이사가 다수를 차지한다. 내부거래위원회와 보상위원회 역시 독립이사가 위원장을 맡고 있다.
구 회장은 올해 3월 정기 주주총회 이후 이사회 의장직을 박종수 독립이사에게 넘겼다. 2018년 그룹 회장에 오른 뒤 약 8년간 대표이사와 이사회 의장을 겸했지만 두 역할을 분리했다.
구 회장이 대표이사로 사업을 집행하고 박 의장이 이사회 운영과 경영진 감독을 맡는 구조다. 구 회장은 사내이사로 주요 의사결정과 법적 책임을 직접 부담하지만 이사회 안건 조율과 회의 진행은 독립이사 의장이 주도한다.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이 이사회 밖에서 그룹을 이끌거나 최태원 SK그룹 회장이 대표이사로 이사회에 참여하는 것과도 차이가 있다. 구 회장은 이사회에 직접 참여하면서도 의장직을 독립이사에게 맡겨 집행과 감독을 분리했다.
개정 상법은 이사에게 회사뿐 아니라 전체 주주의 이익을 보호할 책임을 부여한다. 독립이사는 구 회장이 제시한 경영 방침이라도 ㈜LG와 전체 주주의 이익에 부합하는지를 독자적으로 판단해야 한다.
계열사 지원과 지분 거래, 신규 투자도 ‘그룹 전체를 위해 필요하다’는 설명만으로 통과되기 어려워졌다. 해당 결정이 ㈜LG의 기업가치와 주주 이익에 어떤 효과를 주는지 이사회에 구체적으로 제시해야 한다.
◇내년 구광모 재선임…총수 아닌 경영자로 평가
구 회장의 사내이사 임기는 내년 3월 정기 주주총회에서 만료된다. 2차 개정 상법 시행 이후 구 회장이 처음으로 주주의 재신임을 받는 자리다.
그룹 회장과 최대주주의 지위는 사내이사 임기와 별개다. 그러나 대표이사로 경영을 계속하려면 주주총회에서 사내이사로 다시 선임돼야 한다.
내년 주총에서는 구 회장의 취임 이후 성과와 보수, 자본 배분, 기업가치 제고 전략이 평가 대상에 오를 전망이다. 지주회사 할인과 ㈜LG 주가, 배당정책, 자회사 가치, 미래사업 성과 등이 재선임안에 대한 주주의 판단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
같은 시기 이수영 독립이사의 임기도 만료된다. 구 회장과 이 독립이사의 후임 선임안이 어떤 방식으로 구성되는지에 따라 집중투표제 적용과 소수주주의 후보 추천 가능성도 달라진다.
㈜LG는 올해 3월 정기 주주총회에서 정관상 집중투표제 배제 조항을 삭제했다. 감사위원이 되는 이사의 분리선출 인원도 기존 최소 1명에서 2명으로 확대했다.
복수의 이사를 동시에 선임하면 소수주주와 기관투자자는 의결권을 특정 후보에게 집중할 수 있다. 총수 일가가 전체 지분 경쟁에서는 앞서더라도 외부 주주가 지지하는 후보의 이사회 진입을 완전히 차단하기 어려워진다.
㈜LG는 총수 일가 지분율이 높고 이사회도 이미 독립이사 중심으로 구성돼 있어 단기간에 주도권이 바뀔 가능성은 낮다. 다만 구 회장 본인의 재선임은 일반 이사 후보보다 상징성이 크다.
총수라는 이유만으로 재선임이 당연시되기보다 주주에게 경영 성과와 향후 전략을 설명하고 표를 얻어야 한다. 안정적인 경영권과 경영자로서의 재신임은 다른 문제라는 의미다.

◇지배구조 정리는 끝…지주회사 할인 해소가 과제
LG그룹은 구 회장 취임 이후 계열분리를 통해 지배구조를 한층 단순화했다. 구본준 LX홀딩스 회장이 이끄는 LX그룹은 2021년 LG에서 분리됐다.
계열분리 과정에서 구 회장과 구본준 회장은 보유 주식을 교환해 상호 지분 관계를 정리했다. 가족 간 경영권 충돌 가능성을 줄이고 LG와 LX의 독립경영 체제를 명확히 한 조치였다.
순환출자 해소나 지주회사 전환 같은 대규모 개편 과제를 안고 있는 다른 그룹과 비교하면 LG의 구조적 부담은 크지 않다. 구 회장이 ㈜LG 지분을 통해 그룹을 지배하고 각 계열사가 별도의 이사회를 중심으로 경영하는 틀이 이미 갖춰져 있다.
시장 관심은 지배구조 개편보다 지주회사 할인과 주주환원으로 옮겨가고 있다. ㈜LG는 주요 자회사 지분을 보유하고 있지만 주가는 보유 지분의 순자산가치보다 낮게 평가받는 경우가 많다.
자회사에서 받은 배당금을 신사업 투자와 주주환원에 어떻게 배분할지, 비상장 자회사의 가치를 어떻게 높일지, 보유 현금과 자사주를 어떻게 활용할지가 ㈜LG 이사회의 핵심 과제가 됐다.
개정 상법 시행 이후에는 자회사의 성장을 그룹 전체의 성과로 설명하는 것만으로 부족하다. 자회사의 기업가치 상승이 지주회사인 ㈜LG 주주에게 어떤 이익으로 돌아오는지 보여줘야 한다.
자사주를 바라보는 주주의 시각도 달라졌다. 경영권 방어를 위해 보유하는 자산보다 소각이나 배당 확대 등 주주환원에 활용할 자본으로 인식하는 경향이 강해졌다.
구 회장의 지분구조가 안정적일수록 경영권 방어에 자본을 쌓아둘 명분은 약해진다. 주주는 안정적인 경영권에 상응하는 기업가치 제고와 적극적인 자본정책을 요구할 수 있다.
◇LG화학 중복상장 논란…계열사 주주도 따로 설득
구 회장은 취임 이후 비핵심 사업을 정리하고 인공지능과 배터리, 전장, 로봇, 바이오에 자원을 집중하는 ‘선택과 집중’을 추진해 왔다.
LG전자는 스마트폰과 태양광 패널 사업에서 철수하고 전장과 냉난방공조, 플랫폼, 로봇 사업을 확대했다. LG화학은 배터리 사업을 분할해 LG에너지솔루션을 출범시키고 첨단소재와 친환경소재, 신약을 성장축으로 육성하고 있다.
최근에는 전기차 시장 성장세 둔화에 대응해 배터리 투자 속도를 조절하는 한편 에너지저장장치와 인공지능 데이터센터용 전력·냉각 솔루션을 강화하고 있다.
LG전자와 LG CNS, LG유플러스, LG AI연구원의 역량을 결합한 인공지능 사업도 그룹의 미래 성장 전략으로 부상했다.
다만 그룹의 성장 전략과 각 계열사 일반주주의 이익이 항상 일치하는 것은 아니다.
LG화학이 배터리 사업을 분할해 LG에너지솔루션을 상장한 뒤에는 모회사 주주가치가 훼손됐다는 중복상장 논란이 이어졌다. 해외 행동주의 투자자는 LG화학에 LG에너지솔루션 지분 활용과 자본 배분 개선을 요구하며 압박 수위를 높이고 있다.
개정 상법 아래에서 계열사 분할과 합병, 지분 매각, 유상증자 참여, 내부거래를 추진하려면 각 회사 이사회가 해당 거래가 전체 주주의 이익에 부합하는지를 별도로 판단해야 한다.
㈜LG에는 유리하지만 자회사 일반주주에게 불리하거나 특정 계열사의 부담을 다른 계열사로 이전하는 거래라면 이사의 충실의무를 둘러싼 분쟁이 발생할 수 있다.
구 회장이 추진하는 AI·배터리·전장 중심의 사업 재편도 ‘LG 전체의 성장’이라는 명분만으로 정당성을 확보하기 어렵다. 자금을 부담하는 회사와 그 주주에게 돌아갈 수익을 구체적으로 제시해야 한다.
무엇을 미래사업으로 선택하느냐뿐 아니라 투자 위험과 성과를 계열사 사이에 어떻게 배분하느냐가 구 회장의 리더십을 평가하는 기준이 된 셈이다.
◇‘안정된 구광모’에서 ‘주주가 인정한 구광모’로
구 회장은 4대 그룹 총수 가운데 지배구조 측면에서 가장 안정적인 위치에 있다는 평가를 받는다. 순환출자가 없는 지주회사 체제의 정점에서 ㈜LG 지분 15.96%를 보유하고 있다.
총수 일가와 특수관계인 지분까지 합하면 단기간에 경영권이 흔들릴 가능성도 낮다. 구 회장 취임 이후 LX그룹과의 계열분리까지 마치면서 그룹 지배구조의 외형은 더욱 단순해졌다.
그러나 지배구조가 안정됐다는 사실이 경영 성과까지 보장하지는 않는다. 개정 상법 이후 구 회장에게 요구되는 과제는 경영권을 지키는 것보다 이사회와 주주에게 자본 배분의 타당성과 사업 성과를 인정받는 데 있다.
독립이사가 이사회 과반을 차지하고 의장직까지 맡으면서 구 회장의 경영 방침은 이사회의 독립적인 심의와 동의를 거쳐야 그룹 전략으로 이어질 수 있다.
내년 3월 사내이사 임기 만료는 달라진 지배구조 환경에서 구 회장이 받는 첫 재신임이다. 주주들은 그룹 총수라는 지위보다 취임 이후 기업가치와 주주환원, 신사업 성과를 기준으로 판단하게 된다.
구 회장은 최근 그룹 사장단에 “AI는 미래 경쟁력을 좌우하는 핵심축”이라며 “선제적 투자와 집요한 실행력으로 사업 경쟁력을 확보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앞으로는 실행력만큼 의사결정의 정당성을 확보하는 과정도 중요해진다. 미래사업 투자가 각 계열사와 전체 주주의 이익으로 이어진다는 점을 이사회에 설명하고 시장의 동의를 끌어내야 한다.
재계 관계자는 “구 회장은 다른 총수보다 안정적인 지분구조를 갖추고 있어 경영권 방어에 대한 부담은 상대적으로 작다”며 “그만큼 시장은 지주회사 할인 해소와 자회사 가치 제고, 주주환원에서 구체적인 성과를 요구할 가능성이 크다”고 말했다.
이어 “구 회장에게 필요한 다음 단계의 리더십은 안정적인 지분으로 그룹을 지키는 데 그치지 않는다”며 “독립이사와 주주가 인정할 수 있는 성과와 절차를 통해 경영의 정당성을 확보하는 데 달렸다”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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