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마이데일리=윤진웅 기자] 2차 개정 상법 시행으로 현대자동차그룹의 해묵은 지배구조 개편 과제가 다시 시험대에 올랐다. 현대차그룹은 현대모비스에서 현대자동차와 기아를 거쳐 다시 현대모비스로 이어지는 순환출자 구조를 유지하고 있다.
정의선 현대차그룹 회장은 현대차와 기아, 현대모비스 등 핵심 계열사의 대표이사와 등기이사를 맡아 경영을 주도하고 있다. 그러나 그룹 지배구조의 정점으로 평가되는 현대모비스 지분은 0.33%에 불과하다. 부친인 정몽구 명예회장의 보유 지분까지 더하면 총수 일가의 영향력은 커지지만 정 회장 개인 지배력은 아직 승계가 완전히 마무리됐다고 보기 어려운 구조다.
문제는 개정 상법으로 합병과 분할, 주식 교환 등 지배구조 개편에 대한 주주의 영향력이 한층 커졌다는 점이다. 총수의 지배력을 강화하는 효과가 있는 거래라면 이사회는 해당 거래가 각 회사와 전체 주주의 이익에 부합한다는 점을 입증해야 한다.
현대차그룹은 2018년 현대모비스 분할과 현대글로비스 합병을 결합한 지배구조 개편을 추진했지만 국내외 주주의 반대에 부딪혀 철회한 경험이 있다. 개정 상법 아래에서 다시 구조를 바꾸려면 당시보다 높은 수준의 거래 공정성과 주주 설득이 필요한 셈이다.

◇현대모비스→현대차→기아→현대모비스…지배력 떠받치는 순환고리
현대차그룹 지배구조의 중심에는 현대모비스가 있다. 현대모비스는 현대차 지분 22%대를 보유한 최대주주이고 현대차는 기아 지분 약 34%를 갖고 있다. 기아는 다시 현대모비스 지분 17.66%를 보유한다.
‘현대모비스→현대차→기아→현대모비스’로 이어지는 환상형 출자구조다. 현대모비스가 현대차를 지배하고 현대차가 기아를, 기아가 다시 현대모비스를 지배하면서 세 회사가 서로의 경영권을 뒷받침한다.
정 회장은 현대차 지분 2.73%, 현대모비스 지분 0.33%를 보유하고 있다. 기아 지분은 1.78%로, 핵심 계열사에 대한 직접 지분율은 낮은 편이다.

이와 함께 정 명예회장은 현대모비스 지분 7%대를 보유하고 있다. 향후 이 지분이 정 회장에게 상속되거나 증여되면 정 회장의 현대모비스 지분율은 높아질 수 있다.
다만 수조원대 지분을 이전하는 과정에서는 막대한 세금이 발생한다. 지분 이전만으로 그룹 지배구조를 완성하기 어려운 만큼 정 회장이 보유한 다른 계열사 주식을 매각하거나 교환해 현대모비스 지분을 추가로 확보하는 방안이 함께 거론된다.
또 정 회장이 지분 약 20%를 보유한 현대글로비스도 대표적인 재원으로 꼽힌다. 물류와 해운, 자동차 운반선 사업 성장으로 기업가치가 높아지면 일부 지분을 매각하거나 지배구조 개편 과정에서 주식 교환 수단으로 활용할 수 있다.
정 회장이 직접 투자한 보스턴다이내믹스도 활용하는 방안도 있다. 정 회장은 2021년 현대차그룹이 보스턴다이내믹스를 인수할 당시 개인 자금으로 지분 20%를 확보했다. 향후 기업공개가 이뤄지고 기업가치가 상승하면 정 회장이 보유한 지분이 현대모비스 주식 매입이나 승계 재원으로 활용될 수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다만 현대글로비스나 보스턴다이내믹스 지분을 지배구조 개편에 활용하는 방안은 시장에서 제기하는 시나리오일 뿐 현대차그룹이 확정한 계획은 아니다.
개정 상법 아래에서는 총수 개인이 보유한 회사의 가치를 높인 뒤 그룹 핵심 계열사 지분과 교환하는 방식도 이전보다 엄격한 검증을 받을 수 있다. 거래가격과 교환비율이 정 회장에게 유리하고 일반주주에게 불리하다면 이사회가 충실의무 위반 책임을 질 수 있어서다.
정 회장에게는 재원을 마련하는 것만큼 거래 과정의 공정성을 확보하고 각 회사 주주의 동의를 얻는 일이 중요한 과제가 됐다.
◇2018년 개편안 주주 반대에 철회…남은 ‘실패의 기억’
현대차그룹은 2018년 현대모비스 분할과 현대글로비스 합병을 추진했으나, 엘리엇매니지먼트 등 국내외 주주의 반발로 철회한 아픈 기억이 있다.
당시 보다 상황은 더 엄중해 졌다. 개정 상법 시행으로 이사의 충실의무 대상이 '회사'에서 '회사 및 주주'로 확대되었기 때문이다. 이에 현대차그룹이 현대모비스 사업을 분할하거나 현대글로비스와 주식을 교환할 경우 현대모비스와 현대글로비스 양사 이사회는 각 회사 주주에게 돌아가는 이익을 개별적으로 검토해야 한다. 그룹 전체의 지배구조 단순화만으로 거래를 정당화하기는 어려워진 것이다.

◇현대차 이사회 12명 중 독립이사 7명…정의선이 의장
현대차 이사회는 현재 사내이사 5명과 독립이사 7명 등 총 12명으로 구성돼 있다. 독립이사가 이사회 과반을 차지한다.
사내이사는 정 회장과 호세 무뇨스 대표이사 사장, 진은숙 사장, 이승조 부사장, 최영일 사장이다. 독립이사는 심달훈·이지윤·장승화·최윤희·김수이·도진명·벤자민 탄 이사로 구성됐다.
정 회장은 현대차 대표이사이자 이사회 의장을 맡고 있다. 그룹 총수와 대표이사, 이사회 의장을 겸해 주요 경영전략과 이사회 운영을 함께 이끄는 구조다.
현대차는 이사회의 독립성을 보완하기 위해 지난해 선임독립이사 제도를 도입했다. 선임독립이사는 독립이사 회의를 주재하고 독립이사와 경영진 사이의 의사소통을 조율하며 이사회 운영에 관한 의견을 제시한다.
그러나 대표이사가 이사회 의장을 겸하는 구조에서는 경영진을 감독해야 하는 이사회가 최고경영자의 영향력에서 완전히 벗어나기 어렵다는 지적도 나올 수 있다.
개정 상법은 독립이사에게 총수나 경영진이 아닌 회사와 전체 주주의 이익을 기준으로 판단할 책임을 부여한다. 정 회장이 제시한 대규모 투자나 계열사 거래, 지배구조 개편안도 독립이사들이 독자적으로 타당성을 검토해야 한다.
현대차 이사회는 감사위원회와 지속가능경영위원회, 보상위원회, 독립이사후보추천위원회 등을 운영하고 있다. 주요 위원회에서 독립이사가 중심적인 역할을 맡고 있어 이사회 안건에 대한 외부 견제는 제도적으로 강화된 상태다.
집중투표제와 감사위원 분리선출 확대가 시행되면 주주가 추천한 인사가 현대차 이사회에 진입할 통로도 넓어진다.
◇내년 독립이사 두 자리 임기 만료…집중투표제 첫 시험대
내년 3월에는 심달훈·이지윤 독립이사의 임기가 만료될 예정이다. 두 이사의 후임을 동시에 선임하는 방식으로 주주총회 안건이 구성되면 집중투표제의 영향을 가늠할 첫 시험대가 될 수 있다.
집중투표제는 여러 명의 이사를 선임할 때 주주가 보유 주식 수에 선임할 이사 수를 곱한 만큼 의결권을 행사하도록 하는 제도다. 소수주주와 기관투자자는 의결권을 특정 후보에게 집중해 당선 가능성을 높일 수 있다.
현대차는 외국인과 기관투자자의 지분 비중이 높다. 국민연금을 비롯한 국내 기관투자자뿐 아니라 해외 연기금과 자산운용사, 글로벌 의결권 자문사의 판단이 이사 선임 결과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
감사위원이 되는 이사를 분리선출할 때는 최대주주와 특수관계인의 의결권이 합산 3%로 제한된다. 정 회장과 현대모비스 등 특수관계인이 보유한 지분을 모두 활용할 수 없는 만큼 기관투자자와 소수주주의 영향력이 상대적으로 커진다.
주주 측 후보가 이사회나 감사위원회에 진입하면 그룹 내부거래와 계열사 지원, 합병·분할, 대규모 해외 투자에 대한 감시도 강화될 수 있다.
현대차그룹은 현대차뿐 아니라 현대모비스와 기아 등 핵심 계열사마다 이사회가 별도로 존재한다. 정 회장은 세 회사의 등기이사로 참여하고 있지만 각 회사 이사는 자신이 속한 회사와 전체 주주의 이익을 우선해야 한다. 정 회장에게는 그룹 전체 전략을 각 회사의 주주가 납득할 수 있는 개별적인 이익으로 설명해야 하는 과제가 생긴다.

◇로봇·수소·미국 투자…계열사별 이익 입증해야
정 회장은 자동차 제조사를 넘어 로봇과 인공지능, 소프트웨어 중심 자동차, 수소, 도심항공교통을 아우르는 모빌리티그룹으로의 전환을 추진하고 있다.
현대차그룹은 미국 조지아주 전기차·배터리 생산단지를 비롯해 보스턴다이내믹스, 자율주행 합작법인 모셔널, 소프트웨어 계열사 포티투닷 등에 대규모 자금을 투입했다.
전기차 시장 성장세 둔화와 미국 통상정책 변화 속에서도 하이브리드 생산을 확대하고 현지 공급망을 구축하는 투자도 이어가고 있다.
이 같은 투자는 그룹 차원에서는 미래 경쟁력을 확보하기 위한 선택이지만 자금을 부담하는 개별 상장회사 주주에게는 다른 문제다. 투자 위험과 수익이 현대차·기아·현대모비스에 어떻게 배분되는지가 중요하다.
보스턴다이내믹스 인수 당시에는 현대차와 현대모비스, 현대글로비스, 정 회장이 각각 자금을 투입했다. 앞으로 추가 출자나 지분 거래가 이뤄진다면 각 회사 이사회는 투자 조건과 기업가치, 예상 수익을 별도로 검토해야 한다.
실적이 부진한 미래사업을 지원하기 위해 우량 계열사의 자금을 계속 투입하거나 총수가 보유한 지분을 계열사가 높은 가격에 인수한다면 주주와의 이해충돌이 발생할 수 있다.
개정 상법 아래에서는 ‘미래 모빌리티 경쟁력’이나 ‘그룹 시너지’라는 설명만으로 충분하지 않다. 해당 투자가 개별 상장회사와 전체 주주에게 어떤 경제적 이익을 제공하는지 구체적으로 제시해야 한다.
정 회장이 추진하는 모빌리티 전환의 성패도 기술과 투자 규모뿐 아니라 계열사 간 자본 배분의 공정성과 주주 설득력에 따라 평가받을 전망이다.
◇‘순환출자의 정의선’에서 ‘주주가 선택한 정의선’으로
개정 상법 시행이 곧바로 정 회장의 그룹 지배력 약화로 이어지는 것은 아니다. 정 회장은 현대차·기아·현대모비스의 대표이사와 등기이사로 경영에 직접 참여하고 있으며 주요 계열사 실적과 브랜드 경쟁력도 안정적인 지배력을 뒷받침하고 있다.
현대모비스에서 현대차와 기아로 이어지는 순환출자 고리도 당장 해소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기존 순환출자는 법적으로 인정되고 있어 그룹이 서둘러 구조를 바꿀 의무는 없다.
그러나 정 명예회장의 지분 승계와 정 회장 중심의 지배구조 완성을 위해서는 순환출자 문제를 계속 미뤄두기 어렵다는 게 시장의 시각이다. 지분 승계와 순환출자 해소, 총수의 현대모비스 지분 확보가 서로 맞물려 있어서다.
재계 관계자는 “현대차그룹은 순환출자를 해소하면서 정 회장의 현대모비스 지배력을 높여야 하는 두 가지 과제를 동시에 풀어야 한다”며 “2018년에는 그룹이 설계한 구조를 주주에게 설명하는 데 그쳤다면 앞으로는 설계 단계부터 각 회사 주주의 이익을 반영해야 개편안을 통과시킬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어 “현대차그룹의 지배구조 개편은 정 회장이 보유한 지분이나 동원할 수 있는 자금만으로 결정되지 않는다”며 “국민연금과 해외 기관투자자, 소수주주가 거래의 공정성을 인정하고 동의할 수 있느냐가 정 회장 체제를 완성하는 마지막 관문이 될 것”이라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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