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은 빠르게 경제 성장을 이뤘다. 숨 돌릴 틈도 없이 바쁘게 달려온 끝에 선진국 대열에 들어섰다. 다만 초고속성장은 우리 사회에 과실만을 안겨주지 않았다. 과도한 수도권 집중과 지역 간 불균형을 초래해 한국 사회를 병들게 한 원인이 됐다. 전국 지역 곳곳이 저마다의 문제로 시름하고 있는 현재, 우리는 어디서부터 해법을 찾아가야 할까. [편집자주]
시사위크=이미정 기자 “공공도서관 앞에서 한 도시에 벌어진 문제에 대해 활동가들이 이야기를 펼치고 시민들과 이야기를 나누는 모습을 보면서 많은 생각을 했다. 대학도서관 앞에서 내가 종종 보았던 것들이 공공도서관에서도 가능한 거구나 싶었다.”
◇ 도서관의 기능 확장… 사회적 플랫폼으로 역할 강화
임윤희 나무연필 출판사 대표가 자신의 저서인 ‘도서관을 여행하는 법’의 들어가는 글에서 ‘도서관의 매력’에 푹 빠지게 된 계기를 설명하면서 언급한 말이다. 임 대표는 오래 전 한 외국 도시를 여행하다가 들린 공공도서관 앞에서 시민단체 활동가들이 테이블을 놓아놓고 서명을 받는 모습을 목격하며 신선한 충격을 받았다고 한다. 당시 활동가들은 최근 지역에서 벌어진 총기 사건을 계기로 폭력을 반대하고 손쉬운 총기 사용 허가에 대해 재고하자는 내용의 캠페인을 벌이고 있었다.
공공도서관은 시대적 요구에 따라 그 역할과 기능이 확장돼왔다. 단순히 책 읽고 공부하는 공간을 넘어, 근래 들어선 시민의 문화 향유, 주민 교류를 지원하는 시설로 서비스 기능이 강화돼왔다. 특히 최근엔 지역 공동체와 마을 재생을 위한 기반 시설로 그 중요성이 커지고 있다.
앞서 본지는 ‘복합문화공간’으로 변모하고 있는 국내 공공도서관의 다양한 사례를 통해, 도서관이 지역 활성화의 매개체로 활용될 수 있는 잠재력을 살펴본 바 있다. 파주 광탄도서관과 인제기적의도서관, 전주도서관여행 정책 사례를 토대로 도서관이 지역 내 인프라 보충, 주민 교류, 인구유입, 지역 경제 활성화에 기여할 수 있는 가능성을 조명해봤다.
여기에 주요 해외 국가들은 도서관의 역할에 ‘공론장’의 기능도 확대하는 추세다. 공론장은 시민들이 모여 공공의 문제에 대해 자유롭게 의견을 나누고 토론하는 사회적 공간을 뜻하는 개념이다. 우리나라에선 도서관의 기능과 역할을 논할 때, 이 개념을 거론하는 것이 다소 낯설지만, 해외에선 북미와 북유럽 국가를 중심으로 비교적 활발한 논의가 이뤄져 왔다.
2023년 한국도서관·정보학회지에 등재된 ‘공공도서관 공론장 경험에 따른 이용자의 도서관 인식 연구’(이연옥·강영아·장덕현)에 따르면 미국의 경우, 도서관협회를 중심으로 ‘지역사회를 변화시키는 도서관(Libraries TransformingCommunities)’이라는 사업을 진행 중이다. 해당 사업은 공공도서관이 지역 주민의 의견을 공유하는 공론장으로서 역할을 수행할 수 있도록 개별 도서관을 단계적으로 지원하고 있다.
스웨덴, 노르웨이, 핀란드, 네덜란드 등 유럽 국가는 ‘공론장’의 기능을 도서관 역할에 포함하도록 도서관 관련 법률과 지침을 손봤다. 스웨덴과 노르웨이는 개정 도서관법(2013년)의 사명 선언문에 공공도서관이 지역사회 공론장으로 기능해야 함을 명시했다. 핀란드도 2016년에 공공도서관을 시민 담론과 여론 형성의 장으로 기능하도록 새로운 도서관법을 제정했다. 네덜란드 역시 공공도서관 지침(2005년)에 공공도서관이 지역의 의제, 사회적, 국가적, 세계적 이슈에 대한 토의를 지원하는 회합과 토론의 플랫폼으로 기능하도록 명시했다.
◇ 해외에선 도서관 공론장 기능 강화 논의 활발
이들 국가에선 이러한 법률 및 지침 변화를 계기로 도서관이 지역의 의제, 사회적 이슈에 대한 토의를 지원하는 플랫폼으로 기능할 수 있도록 관련 서비스를 강화해왔다.
일본 내에서도 도서관 서비스에 ‘공론장’ 기능을 강화하는 사례가 존재한다. 임윤희 대표는 본지와의 전화인터뷰를 통해 일본 공공도서관인 ‘무사시노플레이스’를 이러한 사례 중 하나로 소개했다.
임 대표의 설명에 따르면, 2011년 개관한 ‘무사시노플레이스’는 기본적인 도서관 서비스뿐 아니라 시민단체 활동을 적극적으로 지원하고 있다. 도서관 내부엔 지역 주민과 시민단체, 커뮤니티 그룹이 모여 자유롭게 소통하고 협력할 수 있는 공간을 마련돼 있다. 지상 3층에 워크라운지 공간 등을 마련해 시민모임과 단체가 만남과 토론이 이뤄질 수 있도록 지원하고 있다. 더불어 시민 활동과 관련한 정보 제공, 자료 보관, 홍보, 상호 단체 교류 등을 지원한다고 있다고 한다.
임 대표는 “시민 모임이라고 해서 거창한 단체를 의미한 것은 아니”라며 “지역에서 소규모로 활동하는 지역 주민이나 모임을 대상으로도 공간을 빌려주고 있다. 제가 방문했을 때는 여고생들이 바다의 해양 쓰레기 문제를 놓고 모임을 하고 있었다. 지역 텃밭을 위한 시민 모임도 있었다. 그리고 시민모임과 시민단체를 위한 사서함이나, 단체 관련 자료를 보관할 수 있는 공간도 마련돼 있는 점도 인상적이었다”고 말했다.
◇ 주민자치 시대 본격화… “일상에 밀착된 ‘공론장’ 필요”
국내에선 공공도서관을 ‘주민 교류의 장’으로서 활용하기 위한 다양한 시도가 이어지고 있지만, 도서관의 기능을 ‘공론장’으로 확장하는 논의가 더딘 상황이다. 국내 도서관법에 따르면 도서관은 공중의 정보이용·독서활동·문화활동 및 평생학습 등에 이바지하는 시설로 정의된다. 정부는 제3차 도서관발전종합계획(2019-2023)에서 세부 과제로 주민네트워크 확장의 일환으로 ‘주민 공론의 장’ 활용을 제시했다. 다만 구체적인 운영모델이나 지침이 부재한 탓에 현장 확산엔 한계점이 있었다.
일부 도서관계 전문가들은 ‘주민자치’가 강조되고 있는 흐름 속에서, 도서관의 ‘공론장’ 역할 확대 방안을 적극적으로 검토해볼 필요가 있다고 보고 있다.
주민자치는 지역 주민들이 주체가 돼 지역의 과제를 발굴하고 해결해가는 실천 방식을 뜻한다. 올해 지방자치법 개정으로 그동안 시범적으로 운영돼 온 주민자치회의 제도적 기반이 마련되면서 주민자치는 중요한 변곡점에 서 있다.
주민자치회의 설치·운영 및 행정·재정 지원 근거를 담은 ‘지방자치법 개정안’은 지난 3월 국회를 통과한 뒤 내달 15일부터 시행된다. 주민자치회는 읍·면·동 단위에서 주민이 직접 참여해 지역 문제를 해결하고 공동체 활동을 수행하는 조직이다.
◇ “도서관, 주민자치 역량 키우는 거점으로”
주민자치의 제도적 기반이 강화됐다고 하더라도 다양한 주민들의 참여와 관심이 이어지지 않는다면 주민자치는 힘을 얻기 어렵다. 주민들이 다양한 공동체 활동을 통해 지역 의제를 발굴해 의견을 내고, 다양한 의견이 모여 실제 지역 변화로 이어질 때 주민자치는 생명력을 얻을 수 있다. 즉, 의제 발굴, 토론과 숙의, 실제 참여로 이어지는 구조가 지역사회 곳곳에 뿌리내려야 한다는 말이다.
이를 위해선 일상 곳곳에도 크고 작은 공론장이 열려야 한다. 이용훈 도서관문화비평가는 일상에 밀착된 기반 시설이자, 지식 창고인 도서관이 공론장의 플랫폼으로 기능할 수 있다고 말했다.
이 비평가는 “공동체 활동을 하려면 사람이 모여야 한다”며 “도서관은 공간이 있고, 모임도 비교적 많이 일어난다. 풍부한 자료도 갖고 있다. 주민들이 지역 문제에 관심을 두고 활동하고자 한다면 먼저 정보를 찾아야 한다. 예컨대, 우리 동네 교통문제를 해결하고 싶다고 한다면, 교통에 관한 책이나 자료를 찾아야 한다. 이러한 정보 제공을 도서관은 해줄 수 있다”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도서관은 단순히 책 읽고 문화 활동을 하는 공간을 넘어, 주민자치, 시민자치의 공간으로 나아가야 한다”고 강조했다.
국내에서도 도서관의 역할에 ‘공론장’을 추가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점차 커지고 있다. 일부 국내 도서관에서 주민 ‘공론장’을 체계적으로 운영하는 사례가 있다. 서울 성북구립도서관은 2016년부터 ‘마을in수다’라는 이름으로 지역 주민들이 모여 일상의 고민과 마을의 문제에 의견을 나누는 도서관 공론장을 운영하고 있다.
경기도 용인시에 위치한 사립공공도서관 느티나무도서관은 2015년부터 지역 주민들과 함께 일상과 사회적 주제를 나누는 공론장으로 마을포럼을 정기적으로 개최 중이다. 다음 편에선 해당 사례를 중심으로 ‘도서관 공론장’의 가치를 조금 더 살펴보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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