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마이데일리 = 박성규 기자] ‘크런치 모드(야근 등 고강도근무체계) 타파’를 외치며 2018년 출발한 판교 정보기술(IT) 노동조합의 전선이 8년 만에 기업의 분할과 계열사 교섭 구조로 전면 확대되고 있다. 장시간 노동과 포괄임금제 개선 등을 핵심 의제로 다뤘던 노동쟁의가 최근에는 모회사의 교섭 책임과 기업 구조 개편 과정에서의 노동자 참여 등 경영권 영역으로 빠르게 옮겨가는 양상이다.
12일 정보기술(IT)업계에 따르면 네이버 노동조합 ‘공동성명’은 네이버와 주요 계열사 16개 법인을 아우르는 통합교섭을 요구하고 있다. 카카오 노조 ‘크루유니언’도 카카오의 인적분할 계획에 반대하며 전 계열사 공동교섭과 오는 12월 주주총회에서 분할안 부결을 추진하고 있다.
당장 네이버에서는 계열사 파업이 현실화했다. 메타버스 플랫폼 ‘제페토’를 운영하는 네이버제트 노조는 지난 9일 창사 후 처음으로 4시간 부분파업을 벌였다. 사측의 임금 동결안에 맞서 네이버 본사와 같은 5.3% 인상을 요구했지만 교섭과 노동위원회 조정에서 합의점을 찾지 못했다.
노조는 오는 23일 전일 파업에 이어 다음달 18일부터 최대 5일간 파업에 나설 방침이다. 이후에도 협상이 진전되지 않을 경우 추가 쟁의 가능성을 열어뒀다.
네이버 노조는 개별 계열사의 임금과 복지 등 근로조건에 본사의 영향력이 작지 않은 만큼 교섭도 그룹 단위로 바꿔야 한다고 주장한다. 지난달 20일에는 네이버 1784에서 통합교섭 선포식을 열고 본사의 직접 참여를 공식 요구했다.
네이버 측은 다른 자회사의 근로조건을 결정할 위치에 있지 않다는 입장이다. 결국 계열사는 별도 법인이지만 그룹 경영과 근로조건 결정 과정에서 모회사의 영향력을 어디까지 사용자 책임으로 볼 것인지가 새로운 노사 쟁점으로 떠오른 셈이다.
◇ ‘크런치 모드’가 만든 판교 노조…첫 목표는 포괄임금제 폐지
판교 IT업계의 노조 확산은 2018년 본격화했다. 네이버에서는 2018년 4월 창사 후 처음으로 노조 공동성명이 출범했다. 당시 노조는 수직적으로 변한 조직문화와 포괄임금제, 책임근무제 등을 문제로 제기하며 근로조건 개선과 투명한 의사결정을 요구했다.
게임업계에서는 같은 해 9월 넥슨에 첫 노조 ‘스타팅포인트’가 만들어졌다. 출범 당시 내건 구호부터 “크런치 모드를 워라밸 모드로”였다. 게임 출시를 앞두고 야근과 밤샘근무가 반복되는 크런치와 포괄임금제가 핵심 문제였다.
며칠 뒤 스마일게이트에서도 노조 ‘SG길드’가 출범했고 같은 해 10월 카카오에도 크루유니언이 만들어졌다. 카카오 노조 역시 포괄임금제 폐지와 분사 과정의 의사결정 문제 등을 설립 배경으로 들었다.
노조 출범은 실제 근무제도 변화로 이어졌다. 네오플은 2019년 게임업계 최초로 노사 단체협약을 통해 포괄임금제 폐지에 합의했고 넥슨과 스마일게이트도 잇따라 포괄임금제를 없앴다. 넷마블을 비롯한 다른 게임사들도 비슷한 시기 제도 폐지 대열에 합류했다.
초창기 IT 노조의 중심에 노동시간 단축과 근무환경 개선이 있었다면 이후 갈등의 무게중심은 보상과 고용 문제로 옮겨갔다.

◇ 임금·성과급 넘어 고용안정으로…게임업계도 첫 실제 파업
게임업계에서는 2022년 웹젠 노조가 업계 최초로 파업을 결의하며 갈등 수위가 높아졌다. 임금 인상이 핵심 쟁점이었다. 실제 파업 직전 노사가 집중교섭을 통해 합의하면서 실행까지 이어지지는 않았다.
2023년에는 엔씨에 게임업계 다섯 번째 노조 ‘우주정복’이 출범했다. 출범 두 달여 만에 조합원이 1000명을 넘겼고 첫 단체교섭에서는 성과급과 임금뿐 아니라 조직 해체 시 전환배치 등 고용 문제도 요구안에 포함했다.
엔씨가 이듬해 사업 구조조정과 분사를 본격화하면서 쟁점은 기업 조직 재편으로 확장됐다. 노조는 2024년 9월 출범 후 첫 집회를 열어 분사 대상 직원의 고용안정을 요구했고 같은 해 11월 개발조직과 인공지능(AI) 조직 등을 자회사로 떼어내는 안건이 상정된 임시 주주총회에서도 분사 철회를 촉구했다.
지난해에는 실제 파업도 나왔다. 넥슨 핵심 자회사 네오플 노조가 성과급 제도 등을 둘러싼 갈등 끝에 지난해 6월 전면파업에 돌입했다. 국내 게임업계에서 노조가 실제 파업을 벌인 첫 사례였다.
◇ 카카오는 인적분할 저지…노조 의제, 기업 구조까지 넓어져
카카오도 올해 노사관계의 변화를 압축적으로 보여준다. 카카오 노조는 성과보상 체계를 둘러싼 갈등으로 지난 6월 창사 후 처음으로 4시간 부분파업을 벌였고 같은 달 조합원들이 집단으로 연차 등을 사용하는 ‘로그아웃 데이’까지 진행했다.
약 3개월간 이어진 갈등은 지난달 연봉총액 인상률 재원 기준 6.3%와 특별격려금 300만원 지급에 합의하면서 일단락됐다.
하지만 불과 2주 만에 전선이 다시 열렸다. 카카오가 지난달 21일 회사를 AI 플랫폼 사업을 담당하는 카카오AI와 투자·자회사 관리를 담당하는 카카오X로 인적분할하는 계획을 발표하면서다.
노조는 닷새 뒤 인적분할 반대를 공식화하고 경영 쇄신과 고용안정, 보상체계 등을 다루는 전 계열사 공동교섭을 요구했다. 오는 12월 17일 예정된 주주총회에서는 인적분할안을 부결시키기 위해 국민연금 등 주요 주주 설득에도 나설 계획이다.
올해 3월 시행된 개정 노동조합법 2·3조도 IT업계 교섭구조 변화의 변수다. 개정법은 근로계약을 직접 체결하지 않았더라도 근로조건을 실질적이고 구체적으로 지배·결정할 수 있는 주체를 해당 범위에서 사용자로 인정할 수 있도록 했다. 근로조건에 영향을 미치는 사업경영상 결정도 노동쟁의 대상에 포함될 수 있도록 범위가 확대됐다.
다만 네이버나 카카오 본사가 각 계열사의 노동조합에 대해 개정법상 사용자에 해당하는지는 별도 판단이 필요하다. 향후 노동위원회와 법원의 판단이 쌓이면서 IT 기업집단의 교섭 구조도 구체화될 전망이다.
IT업계 한 관계자는 “과거에는 근무시간이나 임금처럼 개별 직원의 근로조건이 주요 노사 현안이었다면 최근에는 사업 재편과 계열사 구조가 고용과 보상에 직접 영향을 주면서 논의 범위도 넓어지고 있다”며 “AI 전환과 사업 구조조정이 빨라질수록 기업의 의사결정과 구성원 간 소통 방식이 노사관계의 중요한 변수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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