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인트경제] 국가 정책사업은 국민과 기업이 정부의 약속을 신뢰할 때 비로소 완성된다. 그러나 최근 우정사업본부(우본)와 한국토지주택공사(LH)가 주도한 '스마트우편함 보급 사업'은 이 기본적인 신뢰가 어떻게 행정 편의 속에 침몰하는지 보여주는 상반된 두 얼굴을 드러내고 있다.
수십억 원의 사재와 3년의 세월을 투자해 기술을 개발한 한 중소기업이 결국 감사원의 문을 두드리며 공익감사를 청구할 수 밖에 없었던 배경을 짚어본다.
사태의 발단은 명확한 '기준의 변심'에 있다. 지난 2016년 우본의 요청으로 개발에 착수한 중소기업 브이컴은 우본·LH와의 3자 협약을 거쳐 약 35억 원을 투입해 '스마트우편함'을 완성했다. 우편법에 따라 비대면 배달 시 등기우편물의 송달 사실을 증명할 수 있도록 바코드 리더기(등기번호 인식 기능)를 핵심 장치로 탑재한 형태였다.
문제는 대통령령 시행 직후 불거졌다. 2018년 6월 당초 필수사항이던 바코드 인식 등 배달 확인 기능이 불과 1.5개월~4개월 만에 시방서 개정을 통해 '권장사항'으로 격하된 것이다.
상위 법령인 대통령령의 뼈대는 그대로인데 이를 현장에서 집행할 하위 기술기준만 손바닥 뒤집듯 완화된 셈이다. 이처럼 급격한 기준 변경을 뒷받침할 법률·기술 검토서나 회의록 등 명확한 행정 기록이 실종된 사이 현장의 풍경은 급변했다.
핵심 기능이 빠진 즉 바코드 리더기가 없는 H사의 제품들이 LH 분양주택 51개 단지(전체 물량의 약 80%)를 장악했다. 반면 정석대로 개발에 공들인 브이컴의 점유율은 14.7%에 그쳤다.
결과는 참담했다. 경기 성남의 한 LH 아파트 단지에서는 휴대전화 번호만 누르면 열리는 허술한 보안 탓에 우편물이 분실되거나 오배송되는 논란이 빚어졌고 결국 관리사무소가 타인의 우편물에 손대지 말라는 경고문을 붙이는 가관이 연출됐다.
급기야 2024년 국민권익위원회까지 나서 스마트우편함의 개념과 배달 확인 기능이 모호하다고 지적하며 제도 개선을 권고했다.
그러나 우본은 LH의 질의에 대해 "등기번호 정보 제공은 법적 의무가 아니다"라며 입장을 번복했고, 나중에는 고시(우정사업본부 고시 제2025-50号)까지 개정하며 책임을 회피하는 모습을 보였다. 문제가 없다면 왜 굳이 고시를 개정해야 했는지 그 정합성에 대해 행정당국은 납득할 만한 답을 내놓지 못하고 있다.
이번 공익감사 청구는 특정 기업의 밥그릇을 지키기 위한 소송전이 아니다. 폭염과 한파 속에서 고생하는 집배원들의 짐을 덜고, 국민의 안전한 우편 주권을 지키겠다는 당초의 공익적 약속이 행정 절차 속에서 어떻게 훼손됐는지를 명백히 밝혀달라는 호소다.
우본과 LH는 해명에 숨어있을 때가 아니다. 대통령령 시행 1.5개월 만에 왜 핵심 기술기준을 완화했는지, 그 과정의 행정 기록 앞에 떳떳이 서야 할 시간이다. 감사원의 철저한 진상 규명으로 무너진 행정의 원칙이 제자리를 찾기를 촉구한다.
'스마트우편함'은 우편물 분실 위험 없이 비대면 배달이 가능하도록 전자잠금장치를 부착하고, 메시지 등을 통해 알림 서비스를 제공하는 우편수취함이다. 일반 무인우편함(무인택배함)과 달리, 우편법에 따라 사용자에게 배달 확인이 가능한 증명자료를 제공할 경우 등기 우편물도 비대면 배달이 가능하도록 설계된 시설이다. 당초 핵심 기술규격에는 등기우편물 번호를 인식하고 투입·수취 내역을 남길 수 있는 바코드 리더기 등 배달 확인 기능이 포함돼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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