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ESG 경영컨설턴트 심준규] 기업 자문을 하다 보면 개인적인 기부나 상속 이야기를 꺼내는 경우가 종종 있다. 회사 일과는 별개로, 자녀에게 물려주고 남는 자산을 사회에 어떻게 남길지 고민된다는 말이다. 자산을 어느 정도 형성한 세대일수록 이런 고민을 자주 털어놓는데, 정작 실행 방법을 몰라 흐지부지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국내에서 유언장을 남기는 비율은 여전히 낮다. 공증인 앞에서 유언 내용을 진술하고 문서로 남기는 공정증서 유언은 법적으로 가장 안전한 방식으로 꼽히고, 최근에는 거동이 불편한 고령자를 위해 공증인이 자택이나 병원으로 직접 찾아가는 출장 공증도 늘고 있다. 다만 증인 두 명을 구하고 절차를 미리 준비해야 하는 번거로움은 여전히 남아 있어, 마음만 먹고 실행은 미루는 경우가 많다.
혼자 편하게 쓰는 자필 유언은 사정이 다르다. 법에서 정한 요건, 즉 유언 전문과 연월일, 주소, 성명, 날인을 모두 손으로 직접 갖춰야 하는데 이 중 하나라도 빠지면 유언 전체가 무효가 된다. 실제로 주소나 날인 하나를 빠뜨려 뒤늦게 무효 판정을 받는 사례가 국내에서도 반복적으로 발생한다.
방식을 어느 쪽으로 택하든 절차의 낯섦과 형식의 까다로움이 발목을 잡는 셈이다. 그렇게 미뤄지는 사이 유언장 없이 세상을 떠나면 재산은 법정 상속 순위대로 자동 분배되고, 사회에 남기고 싶었던 몫은 애초에 문서화 되지 않았으니 실현될 방법이 없다.
후원자만 주저하는 게 아니다. 유산 기부는 일반 후원금보다 훨씬 큰 금액으로 이어질 수 있지만, 후원자 한 명을 붙잡고 상속 계획까지 상담해 줄 인력과 시간을 갖춘 단체는 많지 않다. 결국 유산 기부 유치는 전담 인력을 둘 여유가 있는 대형 기관 몇 곳에 머물고, 나머지 단체는 시도조차 못 해본 채 매달 들어오는 소액 후원에 의존하는 구조가 굳어진다.
미국 프리윌(FreeWill)은 이 두 가지 문제를 동시에 겨냥해 사업을 설계했다. 창업자 제니 시아는 유언장이 없어서 기부로 이어지지 못하는 후원자가 많다는 점에 착안해 서비스를 설계했다. 2017년 설립된 공익추구기업(Public Benefit Corporation)으로, 개인에게는 무료로 법적 효력이 있는 온라인 유언장 작성 서비스를 제공한다.
이용 방식 자체는 복잡하지 않다. 사용자는 온라인에서 자산 현황과 상속 의사에 관한 질문에 답하면 약 20분 만에 법적 구속력을 갖는 유언장 초안이 완성된다. 미국 50개 주 전역에서 법적 효력을 인정받도록 설계돼 있고, 마지막 단계에서 문서를 출력해 증인 앞에서 서명하는 절차만 거치면 끝난다.
눈여겨볼 부분은 질문이 던져지는 방식이다. 자산과 상속인을 입력하는 과정 중간에, 특정 대상에게 유산의 일부를 남기고 싶은지 자연스럽게 물어보는 질문이 삽입돼 있다. 강요가 아니라 여러 선택지 중 하나로 제시되는 방식이라, 답변자는 부담 없이 기부 의사를 표현하게 된다.
이렇게 설계된 질문 덕분에 프리윌에서 유언장을 작성한 사람 중 상당수가 기부처를 함께 기입한다. 2023년 프리윌이 자체 공개한 보고서에 따르면 이용자의 15%가 유언장 작성 과정에서 기부처를 지정했는데, 전체 자산 규모가 크지 않은 사람들 사이에서도 비슷한 비율로 나타났다. 절차의 문턱을 낮추는 설계만으로 기부 참여율이 달라진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수치다.
기부 의사를 밝힌 사용자는 바로 특정 단체와 연결된다. 프리윌과 제휴한 비영리단체는 1만 개가 넘고, 대학과 병원, 글로벌 구호단체까지 폭넓게 포함돼 있다. 사용자가 원하는 분야나 단체를 선택하면 유산이 사후에 해당 기관으로 전달되도록 문서에 명시되는 구조다.
이 회사 수익 구조를 보면 설계 의도가 더 뚜렷하게 보인다. 서비스 구독료를 내는 쪽은 유언장을 쓰는 개인이 아니라, 기부를 받는 비영리단체다. 채용 플랫폼에서 구직자는 무료로 이용하고 기업이 채용 공고비를 내는 구조와 비슷한데, 프리윌에서는 단체가 잠재 유산 기부자에게 노출되는 대가로 연간 구독료를 낸다.
단체 입장에서 구독료를 지불할 유인은 숫자로 설명된다. 프리윌 자료를 보면 일반적인 온라인 현금 후원 평균 금액은 128달러(18만원) 수준인 반면에 유산 기부의 평균 금액은 4만6 594달러(6500만원)에 이른다. 현금 후원 평균과 비교하면 무려 364배에 달하는 규모다. 후원금 모금에 매달리는 대신 소수의 유산 기부자를 확보하는 쪽이 훨씬 효율적인 셈이다.
효율은 투자 대비 수익률로도 확인된다. 프리윌이 집계한 수치에 따르면 유산 기부 유치에 1달러를 쓰면 평균 56.83달러가 돌아온다. 매달 신규 후원자를 끌어모으는 데 드는 광고비와 비교하면, 소수의 유산 기부자를 안정적으로 확보하는 편이 장기적으로 훨씬 남는 장사인 셈이다.
개인이 무료로 이용하고 단체가 비용을 지불하는 구조는, 양쪽 모두에게 합리적인 선택지를 제공하기 때문에 유지된다. 개인은 어차피 필요했던 유언장을 무료로 작성하면서 부수적으로 기부까지 실행하고, 단체는 후원자를 일일이 찾아다니는 대신 플랫폼에 이미 모인 잠재 기부자에게 접근한다. 서로 다른 두 집단의 이해관계가 한 서비스 안에서 자연스럽게 맞물리는 구조다.
성과도 꾸준히 누적되고 있다. 공식 발표에 따르면 지금까지 46만여명이 프리윌에서 유언장을 작성했고, 누적 기부 약정 금액은 130억 달러(18조원)를 넘어섰다. 유언장이라는 지극히 개인적인 문서 작성 과정이 사회 전체로 보면 상당한 규모의 자원 재분배 통로로 작동하는 셈이다.
프리윌 사례가 눈길을 끄는 이유는 기부 캠페인을 잘 만들어서가 아니다. 유언장 작성이라는 반드시 필요한 절차에 기부 선택지를 자연스럽게 결합해, 별도의 설득 없이도 행동을 이끌어내는 설계에 가깝다. 좋은 취지를 알리는 홍보보다, 절차 자체를 다시 짜는 쪽이 훨씬 효과적이었던 셈이다.
국내 상황에 대입하면 시사점이 여러 갈래로 나온다. 개별 비영리단체가 각자 유산 기부 캠페인을 벌이는 방식으로는 확장에 한계가 있고, 고령층이 언제든 접근해 자신의 의사를 기록하고 검증된 기관과 연결될 수 있는 공용 인프라가 필요하다는 뜻이다. 국내에도 활동 분야가 각기 다른 비영리단체가 많은데, 정작 유산을 어디에 남길지 고민하는 사람이 여러 단체를 한눈에 비교하고 탐색할 수 있는 목록조차 마땅치 않다.
법률구조공단이나 대한변호사협회 같은 기관이 유언장 작성을 도와주는 서비스는 있지만, 기부처를 함께 안내하고 연결해 주는 기능까지 갖춘 곳은 찾아보기 어렵다. 유언장 작성 절차와 비영리단체 탐색 기능을 하나로 묶은 서비스가 등장한다면, 지금은 흩어져 있는 기부 의사가 실제 행동으로 옮겨질 가능성이 훨씬 커진다.
초고령화가 빠르게 진행되는 가운데, 자산을 축적한 세대의 규모는 앞으로 더 커질 전망이다. 저출생으로 상속받을 다음 세대 수는 줄어드는 반면, 사회가 감당해야 할 복지와 공익 수요는 계속 늘어난다. 유언장 작성 절차를 누가 얼마나 쉽게 만드느냐가, 축적된 자산이 사회로 흘러갈지 여부를 가르는 변수가 될 수 있다.
|심준규. 인하대학교 경영학과 겸임교수. 더솔루션컴퍼니비 대표. <녹색금융으로 읽는 ESG 이야기>, <그린북>, <실천으로 완성하는 ESG 전략> 저자. 기업의 ESG 역량 강화 프로그램 개발과 ESG경영컨설팅을 하고 있다.
Copyright ⓒ 마이데일리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comment--
첫 번째 댓글을 작성해 보세요.
댓글 바로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