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마이데일리 = 윤진웅 기자]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님의 말씀을 들으며, 고(故) 이병철 회장께서 1983년 도쿄에서 반도체 산업 진출을 선언하셨던 역사적 순간이 떠올랐다. 그 날의 선견지명이 대한민국을 반도체 강국으로 만들었듯, 이재용 회장님의 결단이 대한민국 첨단산업의 새로운 도약을 선도할 것으로 확신한다”.
이재명 대통령은 3일 충남 아산시에서 열린 ‘충청권 첨단산업 발전비전 국민보고회’에서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의 충청권 투자 결단에 대해 이 같이 평가했다. 이 대통령은 특히 삼성의 결정으로 충청권에서 고대역폭메모리(HBM) 생산이 이뤄지게 됐다며 이번 투자가 단순한 생산시설 확장이 아니라 “성장의 패러다임을 완전히 바꿔 더 나은 미래를 향해 나아가겠다는 신뢰의 약속이자 대한민국의 새로운 가능성을 향한 담대한 선언”이라고 규정했다.
이 대통령이 소환한 ‘도쿄선언’은 삼성 반도체사의 출발점이다. 1983년 2월8일 일본 도쿄 오쿠라호텔에서 이병철 삼성 창업회장은 홍진기 당시 중앙일보 회장에게 전화를 걸어 “누가 뭐라고 해도 반도체, 해야겠습니다. 가급적 빠른 시일 내에 이 사실을 공포해달라”고 말했다. 삼성은 이 날을 ‘2.8 동경구상’으로 기록했고, 한 달 뒤 ‘우리는 왜 반도체사업을 해야 하는가’라는 선언문을 공식 발표하며 초고밀도집적회로(VLSI) 투자 방침을 대외화했다.
당시 시장의 반응은 조롱 일색이었다. 선언 6개월 전만 해도 반도체 진출 구상을 비쳤을 때 재계는 난색을 보였고, 업계에서는 냉소가 뒤따랐다. “일본의 최고 기업들조차 힘겨워하는 반도체를 우리 실력으로 어떻게 하느냐, 3년도 못 가 실패할 것”이라는 반응이 이어졌다.
재계 안팎에서도 회의론이 쏟아졌다. TV도 제대로 못 만드는데 최첨단 반도체는 무리라는 식의 비판이 나왔다. 실제 당시 한국은 가전용 고밀도집적회로(LSI)조차 겨우 만들던 수준이었다. 삼성 역시 1974년 한국반도체를 인수해 반도체 사업에 발을 들였지만 도쿄선언 이전까지 별다른 성과를 내지 못한 상태였다.
그만큼 도쿄선언은 실패 가능성을 알면서도 미래 산업에 먼저 베팅한 결단에 가까웠다. 이병철 회장은 훗날 “잘못하면 삼성그룹 절반 이상이 날아갈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삼성이 아니면 이 모험을 하기 어렵다고 봤다”고 회고하기도 했다.
하지만 예상과 달리 선언 직후 삼성은 통상 18개월 이상 걸리는 반도체 공장을 6개월 만에 짓고, 그해 미국과 일본에 이어 세계 세 번째로 64K D램 개발에 성공했다. 이 대통령이 전날 아산에서 굳이 1983년 도쿄를 소환한 이유도 여기에 있다. 오늘의 반도체 강국 한국은 결국 ‘무모해 보였던 선언’ 위에서 시작됐기 때문이다.

이 대통령이 이재용 회장을 이병철 창업회장에 겹쳐 본 지점도 이 같은 이유에서다. 1983년 도쿄선언이 한국이 반도체를 할 수 있느냐는 의심 속에서 미래 산업의 판을 먼저 바꾸겠다는 선언이었다면, 2026년 아산 결단은 AI 시대 핵심 메모리인 HBM을 앞세워 한국 첨단산업의 성장 축을 다시 세우겠다는 선언이라는 점에서 닮았기 때문이다. 이 대통령은 전날 삼성의 충청권 투자와 HBM 생산 결정을 두고 “성장의 패러다임을 완전히 바꾸는 투자”라고 직접 의미를 부여한 바 있다.
이처럼 두 장면 사이에는 43년의 간격이 있지만 공통분모는 뚜렷하다. 첫째는 ‘사업보국(事業報國)’의 정신이다. 재계에선 삼성의 이번 충청 투자 선언을 단순한 기업의 투자가 아니라 국가 산업 지도를 바꿀 전략으로 평가한다. HBM을 축으로 충청권 첨단산업 생태계를 촘촘히 묶겠다는 이재용 회장의 구상이 지역 소멸을 막고 국가 첨단산업의 새로운 성장 축을 세우는 전략의 일환이기 때문이다. 도쿄선언이 삼성만을 위한 사업이 아니라 나라의 미래를 바꿀 수 있는 산업, 곧 ‘사업보국’의 꿈을 실현할 수 있는 산업이라는 판단에서 비롯된 것 역시 마찬가지다.
또 다른 공통분모는 두 선언 모두 단순한 증설이 아니라 ‘생태계 재편’을 겨냥했다는 점이다. 도쿄선언이 한국 반도체 산업의 첫 문을 연 사건이었다면, 이번 아산 결단은 단순한 생산라인 증설이 아닌 AI 시대를 이끌 반도체 산업의 재편으로 볼 수 있다.
물론 두 결단의 조건은 다르다. 이병철 창업회장이 ‘할 수 있을까’의 시대를 돌파했다면, 이재용 회장이 마주한 건 ‘1위를 지킬 수 있을까’의 시대다. 1983년의 삼성은 추격자였고, 2026년의 삼성은 AI 반도체 주도권을 둘러싼 초격차 경쟁 한복판에 서 있다.
업계 관계자는 "지난 1983년 도쿄에서는 누가 뭐래도 반도체를 해야겠다는 말이 나왔고, 올해 아산에서는 HBM을 앞세운 새로운 투자 결단이 나왔다"며 "이병철 창업회장의 도쿄선언이 한국 반도체의 출발을 열었다면, 이재용 회장의 아산 결단은 AI 시대 삼성 반도체의 다음 장을 여는 시험대가 될 가능성이 크다"고 말했다.
Copyright ⓒ 마이데일리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comment--
첫 번째 댓글을 작성해 보세요.
댓글 바로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