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수첩] '탱크데이'가 남긴 것…경질보다 무거운 책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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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라임경제] 멀게만 느껴졌던 기업 총수의 온라인 소통은 어느새 기업 이미지의 핵심 자산이 됐다. 소비자는 더 이상 제품과 서비스만 보지 않는다. 브랜드를 이끄는 사람의 말, 태도, 세계관까지 함께 본다. 기업 총수의 한마디가 브랜드 호감도를 끌어올리기도, 반대로 수년간 쌓아온 신뢰를 흔들기도 하는 시대다.

그 중심에 정용진 신세계그룹 회장이 있었다. 정 회장은 일찍이 인스타그램과 유튜브 등을 통해 대중과 직접 소통해 온 대표적인 기업인으로 꼽힌다. 일상과 취향을 드러내며 친근한 이미지를 쌓았고, 야구단 창단 이후에는 '용진이형'이라는 별칭까지 얻었다. 기존 재계 총수들과 다른 파격적 행보는 신세계그룹의 젊고 감각적인 이미지를 만드는 데 적지 않은 역할을 했다.

그러나 영향력이 크다는 것은 그만큼 책임의 무게도 커진다는 뜻이다. 정 회장은 과거 '멸공' 발언으로 그룹 전반을 정치적 논란 한가운데 세운 바 있다. 당시 논란은 단순한 개인 SNS 발언을 넘어 신세계그룹과 계열 브랜드에 대한 평가로 번졌다. 총수 개인의 표현이 기업 전체의 리스크로 확장될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준 사례였다.

이번 스타벅스코리아의 '탱크데이' 논란도 이 연장선에서 가볍게 넘기기 어렵다. 5·18민주화운동 기념일에 '탱크'라는 표현을 내세운 이벤트가 진행됐고, 여기에 '책상에 탁!'이라는 문구까지 더해지며 논란은 걷잡을 수 없이 커졌다. 각각 1980년 광주와 1987년 박종철 열사 고문치사 사건을 떠올리게 한다는 비판이 제기됐다.

기업 입장에서는 단순한 마케팅 실수였다고 말하고 싶을 수 있다. 실제로 특정 제품명과 행사 일정이 겹친 데 따른 부주의였다고 해명할 여지도 있다. 하지만 소비자에게 중요한 것은 의도보다 결과다. 특히 한국 현대사의 비극과 민주화의 상징을 건드린 사안이라면 "몰랐다"는 말은 면책 사유가 되기 어렵다. 모르고 했다면 무지의 문제이고, 알고도 했다면 더 큰 문제다.

신세계그룹의 대응은 유례없이 빨랐다. 정 회장은 사안을 보고받은 뒤 손정현 스타벅스코리아 대표이사와 기획 담당 임원을 해임했다. 관련 임직원에 대해서도 징계 절차가 진행될 예정이다. 대국민 사과문 발표에 그치지 않고 인적 쇄신으로 이어졌다는 점에서 그룹이 이번 사안을 얼마나 심각하게 받아들였는지는 분명해 보인다.

다만 빠른 경질이 곧 충분한 책임을 뜻하는 것은 아니다. 이번 조치를 두고 재계 일각에서는 오너 리스크 차단, 광주 지역 대형 개발 사업 방어, 미국 스타벅스 본사와의 관계 관리 등 전략적 판단이 작용했다는 해석도 나온다. 

특히 광주신세계가 추진 중인 '더 그레이트 광주' 프로젝트는 지역 여론과 인허가가 중요한 사업이다. '5·18 폄훼 기업'이라는 낙인이 찍힐 경우 사업 추진 자체가 흔들릴 수 있다는 위기감이 작용했을 가능성도 배제하기 어렵다.

스타벅스코리아의 지배구조 역시 부담이다. 현재 스타벅스코리아는 이마트와 싱가포르투자청이 지분을 보유하고 있고, 미국 스타벅스 본사의 브랜드 관리 기준 아래 운영된다. 업계에서는 브랜드 가치 훼손이 중대한 계약 리스크로 이어질 수 있다는 관측도 나온다. 

결국 이번 경질은 도의적 사과이자 동시에 재무적·사업적 리스크를 막기 위한 방어 조치였다는 분석이 가능하다.

문제는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는 점이다. CEO 한 명, 담당 임원 한 명을 바꾼다고 기업의 감수성이 하루아침에 달라지지는 않는다. 

이번 사태는 스타벅스코리아 한 곳만의 문제가 아니다. 짧고 자극적인 문구로 소비자 관심을 끌려는 마케팅 관행, 사회적 맥락을 충분히 검토하지 않는 콘텐츠 승인 구조, 역사적 상처를 '밈'처럼 소비해도 된다는 안일함이 함께 드러난 사건이다.

그래서 기업의 사과는 빨라야 하지만, 빠르기만 해서는 안 된다. 더 중요한 것은 왜 이런 일이 벌어졌는지 설명하고, 다시 일어나지 않을 구조를 만드는 일이다. 역사·인권·지역 정서 등 민감 이슈를 점검하는 사전 검수 체계는 이제 선택이 아니라 기본이다. 마케팅 부서의 창의성만 강조할 것이 아니라, 그 창의성이 사회적 책임의 테두리 안에서 작동하도록 만드는 내부 시스템이 필요하다.

정 회장에게도 이번 사태는 뼈아픈 경고다. 총수가 대중과 가까워질수록 기업은 더 빠르게 주목받는다. 동시에 더 빠르게 비판받는다. 친근함과 파격은 브랜드 자산이 될 수 있지만, 그 바탕에는 신중함과 책임감이 있어야 한다. 말과 이미지로 얻은 호감은 역시 말과 이미지로 무너질 수 있다.

'살은 쏘고 주워도, 말은 하고 다시 못 줍는다'는 속담은 기업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이번 '탱크데이' 논란은 단순한 문구 사고가 아니다. 기업이 역사와 사회를 대하는 태도, 총수 리스크를 관리하는 방식, 그리고 브랜드가 소비자 신뢰를 어떻게 지켜야 하는지를 동시에 묻는 사건이다.

신세계그룹이 정말 납작 엎드렸다면, 이제 보여줄 것은 경질의 속도가 아니라 변화의 깊이다. 빠른 꼬리 자르기보다 중요한 것은 다시는 같은 꼬리가 자라나지 않게 하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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