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라임경제] 살아 돌아왔다는 사실이 곧 회복을 의미하지는 않았다. 누군가는 그날 바다에 남았고, 누군가는 살아남았다는 이유로 죄책감 속에 남겨졌다. 2010년 3월26일 밤, 서해 백령도 인근 해상에서 천안함은 피격됐다. 차가운 바다 위에서 생과 사가 갈렸고, 46명의 장병은 돌아오지 못했다. 생존 장병들은 구조됐지만, 그 이후의 시간은 쉽게 기록되지 않았다.
천안함 생존 장병 최광수 씨에게도 그날은 끝나지 않은 시간으로 남아 있다. 사고 당시의 기억은 오히려 흐릿하다. 그러나 전역 이후 사회에 던져진 듯한 감각, 사람들의 시선, 설명해야만 했던 고통은 선명하게 남았다.
최 씨는 전역 직후를 "내팽개쳐진 기분이었다"고 표현했다. 군 안에서는 같은 일을 겪은 동료들이 있었고, 말하지 않아도 통하는 감각이 있었다. 그러나 사회로 나온 뒤에는 달랐다. 자신의 상태를 이해하는 사람은 많지 않았고, 스스로도 자신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알기 어려웠다. 그는 "사건 이후부터 전역하고 나서 반년에서 1년 정도는 기억이 거의 없다"며 "머릿속에서 삭제된 것처럼 '툭' 끊겨버린 느낌이었다"고 돌아봤다.

'군인 PTSD(Posttraumatic Stress Disorder, 외상후 스트레스 장애)'는 눈에 보이지 않는다. 겉으로는 멀쩡해 보여도, 일상은 다른 방식으로 무너질 수 있다. 최 씨의 증상도 그랬다. 사람이 많은 곳에 가면 숨이 막혔고, 밀폐된 건물이나 뻥 뚫린 길거리에서도 긴장 상태가 이어졌다. 사고가 날 경우를 대비해 탈출 경로를 먼저 확인하는 습관도 생겼다.
가족의 밤도 함께 무너졌다. 최 씨는 새벽마다 소리를 지르며 깼고, 가족들은 혹시 그가 돌이킬 수 없는 선택을 할까 봐 밤새 옆방에서 깨어 있었다. 그는 "지금도 가끔 그런 생각이 든다"며 "살아남은 게 감사한 일인데, 왜 그렇게 오래 죄책감 속에 살았을까 싶다"고 토로했다.
◆살아는 왔지만, 돌아오지 않은 일상
최 씨가 겪은 PTSD는 특정 순간의 공포에만 머물지 않았다. 사고 이후의 일상 전체가 달라졌다. 사람 많은 공간, 낯선 시선, 갑작스러운 소리, 밀폐된 장소는 모두 긴장을 불러왔다. 그는 "겉으로는 멀쩡해 보이지만, 실제로는 평범한 일상 하나 유지하는 것도 굉장히 힘들 때가 많았다"고 털어놨다.
생존 장병들끼리는 농담처럼 이런 말도 했다고 한다. 차라리 어디라도 크게 다쳤어야 인정받았을 것 같다고. 웃으며 꺼낸 말이었지만, 그 안에는 보이지 않는 상처를 설명해야 했던 시간의 무게가 담겨 있었다.
최 씨는 "유공자 심사 과정에서도 정신적인 고통은 계속 설명하고 증명해야 했다"며 "병원 기록도 직접 만들어야 하고, 내가 얼마나 힘든지 계속 말해야 했다"고 되짚었다. 그는 그 과정 자체가 "또다시 상처를 꺼내는 일"이었다고 했다.

이 대목은 군인 PTSD의 구조적 문제와 맞닿아 있다. 신체적 부상은 눈에 보이고 기록으로 남기 쉽다. 그러나 정신적 외상은 시간이 흐른 뒤에야 모습을 드러내기도 하고, 당사자가 직접 말하지 않으면 제도 안으로 들어가기 어렵다.
더 큰 문제는 PTSD를 겪는 이들이 바로 그 말을 꺼내기 어렵다는 점이다. 정신과 치료 기록에 대한 부담과 '강해야 한다'는 군 조직 문화, 주변의 편견이 겹치면 치료보다 침묵을 택하게 된다. 생존 장병들은 살아남았다는 이유만으로 또 다른 시선과 마주해야 했다.
천안함 피격 당시 함장이었던 최원일 326호국보훈연구소장도 이 문제를 짚었다. 현재 생존 장병 지원과 PTSD 문제 공론화, 천안함 기록 보존 활동을 이어가고 있는 최 소장은 "가장 안타까운 건 정작 본인 스스로 PTSD라는 사실을 모른 채 버티고 있다는 점"이라고 지적했다.
그는 "군이라는 조직은 강해야 한다는 분위기가 강하고, 그러다 보니 괜찮지 않은데도 버티는 문화가 반복된다"며 "결국 가장 힘든 사람은 혼자 견디고 있는 당사자"라고 강조했다.
◆전역 이후, 혼자 남겨진 시간
최 씨가 가장 크게 느낀 공백은 전역 이후였다. 사고 직후에는 군 안에 있었고, 같은 일을 겪은 이들이 곁에 있었다. 그러나 전역은 또 다른 단절이었다.
그는 당연히 전역 후 심리치료나 상담 지원이 이어질 것으로 생각했다. 하지만 사회로 나온 뒤 먼저 연락해오는 시스템은 없었다. 치료를 연결하거나, 상태를 확인하거나, 일상 복귀를 함께 관리하는 구조도 충분하지 않았다. 최 씨는 "막상 사회로 나오고 나니까 아무 연락도 없었다"며 "정말 갑자기 혼자 남겨진 느낌이었다"고 토로했다.

결국 그는 직접 국가보훈부 홈페이지에 글을 남겼다. 극심한 PTSD와 관련해 어떤 지원을 받을 수 있는지 문의했다. 하지만 돌아온 답은 "개별적으로 신청하라"는 취지였다고 했다. 그는 "굉장히 허탈했다"며 "사고 당시에는 국가가 끝까지 책임질 것처럼 이야기했는데, 막상 나오니까 결국 스스로 살아남아야 하는 구조였다"고 되짚었다.
이 지점에서 군인 PTSD 문제는 치료를 넘어 제도 설계의 문제로 확장된다. PTSD를 겪는 당사자는 도움을 요청하는 것 자체가 쉽지 않다. 그런데 지원 체계가 '신청하는 사람'에게만 열려 있다면, 가장 취약한 사람일수록 제도 밖에 남을 가능성이 커진다.
최 씨도 같은 문제를 꼬집었다. 그는 "지금은 예전보다 상담센터도 생기고 사회 분위기도 조금은 달라졌다고 생각한다"면서도 "아직도 대부분은 도움을 요청하는 사람만 지원받는 구조에 가깝다"고 했다. 또 "문제는 PTSD를 겪는 사람들은 도움 요청 자체를 못 하는 경우가 많다"고 지적했다.
필요한 것은 기다리는 제도가 아니라 먼저 연결하는 체계다. 최 씨는 "전역 직후 먼저 연락해주고, 치료를 연결해주고, 일상생활까지 같이 관리해주는 시스템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사고보다 오래 남은 사회적 시선
최 씨가 사고 이후 가장 오래 남은 상처로 꼽은 것은 '사회적 시선'이었다. 천안함 피격 사건은 오랫동안 정치적 논란과 음모론에 휩싸였다. 그 과정에서 생존 장병들도 설명할 수 없는 시선과 의심을 감당해야 했다. 그는 "사실 그게 제일 오래 남았다"며 "사고 자체보다 이후 사회에서 받은 시선들이 더 큰 PTSD로 남았다"고 털어놨다.

특히 "왜 너만 살아남았냐"는 식의 말을 들었을 때는 큰 충격을 받았다고 했다. 살아남은 사실이 감사해야 할 일이면서도, 동시에 죄책감과 비난의 이유처럼 돌아오는 경험이었다.
최 씨가 한때 프랑스로 떠난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았다. 그는 "도망가고 싶었던 것 같다"며 "어디라도 나를 모르는 곳으로 가고 싶었다"고 회상했다. 한국에서는 어디를 가든 '천안함 생존자'라는 꼬리표가 따라다녔다.
그러나 장소를 옮긴다고 PTSD가 사라지는 것은 아니었다. 비슷한 사고 장면을 뉴스로 접하면 무너졌고, 갑자기 숨이 막히는 순간도 있었다. 시간이 지나면 괜찮아질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그렇지 않았다.
그는 "PTSD는 해결되기보다 안고 살아가는 감정에 가까운 것 같다"고 고백했다. 이 말은 PTSD가 단기간의 치료나 보상으로 끝나는 문제가 아니라는 점을 보여준다. 생존 장병에게 필요한 것은 사건 당시의 보상에 그치지 않는다. 전역 이후의 삶을 어떻게 다시 이어갈 것인지에 대한 장기적 지원이 함께 필요하다.
◆다시 일상으로 돌아가는 길
최 씨가 회복의 실마리를 찾은 곳은 기록과 역사였다. 대학 시절 미술사를 전공하고 문화재·박물관학 분야를 공부했던 그는 프랑스에 머무는 동안 역사와 기록을 탐구하는 일에 몰두했다. 현지에서는 골동품 상점을 운영하기도 했다. 오래된 물건과 그 안에 담긴 시간의 흔적을 접하는 과정은 그에게 일종의 위안이 됐다.

그는 "당시 관심을 가졌던 연구 주제들도 대부분 역사에 대한 재해석과 재평가에 가까웠다"며 "과거의 사건이나 기록이 시대에 따라 어떻게 다른 의미로 읽히는지에 관심이 많았다"고 설명했다.
돌이켜보면 그것은 자신을 이해하려는 시도이기도 했다. 천안함 피격 이후 그는 사회의 시선 속에서 계속 다시 규정되고 평가받는 시간을 겪어야 했다. 최 씨는 "그때의 나는 학문과 일을 통해 결국 '나는 어떤 사람인가'를 스스로 계속 재해석하려 했던 것 같다"고 말했다.
현재 그는 아내와 함께 카페를 운영하고 있다. 한때 낯선 사람과 눈을 마주치는 것조차 부담스러웠던 그에게, 불특정 다수의 사람을 만나는 일은 쉽지 않은 선택이었다. 그러나 손님을 만나고, 인사하고, 평범한 대화를 나누는 과정은 조금씩 그를 바꾸고 있다.
최 씨는 "처음에는 사람 만나는 일 자체가 두려웠다"면서도 "신기하게도 손님들을 만나고 평범한 대화를 나누는 과정이 조금씩 나를 바꾸고 있다"고 했다. 이어 "친화력 좋은 아내 덕이 크다"고 웃어 보였다.
회복은 거창한 사건으로만 찾아오지 않았다. 때로는 손님과 나누는 짧은 인사, 오래된 물건을 만지는 일, 누군가와 눈을 맞추는 일 속에서 조금씩 시작됐다.

최 씨가 마지막으로 꺼낸 장면은 영화 '덩케르크(Dunkirk)'였다. 그는 패잔병이라는 자책 속에 고개를 떨어뜨린 채 기차에 몸을 실은 군인들 그리고 창밖에서 그들을 향해 손을 흔들고 환호하는 시민들의 모습을 오래 기억하고 있었다.
그는 "살아 돌아온 것만으로도 충분하다는 듯한 환대 속에서 침체돼 있던 군인들의 표정에 서서히 안도가 번지는 장면이 특히 강렬하게 남았다"고 설명했다.
그가 말하고 싶었던 것도 이와 맞닿아 있다. 생존 장병에게 필요한 것은 특별한 대우가 아니라, 살아 돌아왔다는 사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사회의 시선이다. 그는 "군인이나 생존 장병들에게 왜 지원받느냐고 말하는 시선부터 바뀌어야 한다"며 "PTSD는 의지가 약해서 생기는 문제가 아니고, 보이지 않는 상처라고 해서 없는 상처가 아니다"라고 호소했다.
최 씨는 지금도 누군가는 매일 밤 사고 현장으로 돌아가고 있다고 했다. 겉으로는 일상에 적응한 듯 보여도, 기억은 어느 순간 다시 그날로 되돌아간다.
"누군가는 아직도 매일 밤 사고 현장으로 돌아가고 있다. 그걸 조금만 이해해줬으면 좋겠다."
그의 말은 생존 장병 개인의 호소에 머물지 않는다. 살아남은 이들이 다시 삶으로 돌아가기 위해 필요한 것은 뒤늦은 위로만이 아니다. 먼저 손을 내미는 지원, 보이지 않는 상처를 인정하는 제도, 그리고 살아 돌아온 이들을 의심이 아닌 이해로 바라보는 사회다.
전투는 끝났지만, 누군가에게 그날은 여전히 밤마다 되돌아온다. 국가가 책임져야 할 시간은 전장에서 멈추지 않는다. 생존 이후의 삶까지 이어질 때, 비로소 그 책임은 완성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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