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라임경제] 컨설팅 프로젝트를 하다 보면 다양한 콜 사례를 듣게 된다. 얼마전에 고객이 "제가 헷갈려요. 나이 먹어서 그런지 잘 기억이 안 나"라며 겸연쩍게 웃는 콜을 들었다. 상담사는 뭐라고 받았을까. "네, 그러셨군요." 형식적인 맞장구였다.
고객은 자기 서투름을 솔직하게 꺼냈고, 거기엔 작은 미안함이 담겨 있었다. 그런데 그 마음은 스며들지 못하고 튕겨졌다. 매뉴얼대로라면 상담사는 틀리지 않았다. 잘못한 것도 없었다. 그냥, 아무것도 없었다.
자기다움을 발현한 상담이라면 어떻게 달랐을까. 솔직하고 유머 있는 상담사라면 빙긋 웃으며 이렇게 말했을 수 있다. "저도 그래요. 저도 갑자기 물어보면 말문이 막혀요, 다 똑같아요." 재치 있는 상담사라면 "에이, 목소리는 엄청 젊으신데요? 나이 먹었다고 하시면 안 될 것 같은데요?"라고 농담으로 맞받아친다.
신중하고 따뜻한 상담사라면 "충분히 그러실 수 있어요. 천천히 하셔도 됩니다. 제가 다시 정리해드릴게요"라고 다독인다. 말투도 다르고, 속도도 다르고, 맞장구 방식도 다르다. 그런데 셋 다 공통점이 있다. 고객이 말하지 않은 마음, '내가 좀 민망하다'는 그 마음을 먼저 알아채고 건드렸다. 이게 인간지능의 진정성 있는 자기다움이다.
AI는 24시간 지치지 않고 정확한 정보를 내놓는다. 그런데 딱 거기까지다. AI의 말에는 체온이 없다. 상대의 겸연쩍음에 같이 웃어줄 수 없고, 말 뒤에 숨은 민망함을 인간적인 공감으로 받아줄 수 없다. 인간지능의 본령은 바로 여기에 있다. 제품 정보, 프로세스, 규정 같은 업무 지식은 누가 말해도 같아야 한다.
이제 그건 인공지능이 한다. 인간지능은 답 없는 문제를 풀고 고객의 마음을 살펴야 한다. 문제를 풀어가는 방식, 막힌 상황에서 대안을 찾는 힘, 고객 마음의 결을 읽어내는 감각 — 이건 사람마다 다르다. 바로 여기서 자기다움이 빛난다.
그렇다면 자기다움은 어떻게 되살릴 수 있을까. 오래 쓰지 않은 근육이 하루아침에 돌아오지 않듯, 자기다움도 단계적으로 회복해야 한다. 세 단계로 되살려보자.
첫 번째 단계는 '나는 누구였나' 되돌아보기다. 내가 원래 어떤 사람인지, 어떤 순간에 진짜 신이 나고 어떤 말을 건넬 때 뿌듯한지 그것부터 떠올려봐야 한다. 나다움은 목소리에서 드러난다. 속도에서 드러난다. 맞장구 방식에서 드러난다. 입사 첫날부터 "이렇게 말하세요"를 배웠고, 어느 순간 그게 내 말인 줄 알았겠지만 그건 내 말이 아니다. 그 이전의 나, 원래의 내 안에 자기다움의 씨앗이 있다.
두 번째 단계는 '나답게 해보면 어떨까' 실험하기다. 고객이 "저 이거 세 번이나 전화했는데 왜 자꾸 이렇게 되는 거예요?"라며 지친 목소리로 따진다고 해보자. 매뉴얼형 상담사는 "불편을 드려서 죄송합니다. 확인해드리겠습니다"라고 받는다. 틀리지 않았지만 고객의 지친 마음은 그저 처리 대상일 뿐이다. 나다운 상담사는 다르다.
공감이 먼저인 상담사라면 "세 번이나 전화하셨어요? 그게 얼마나 번거로우셨을지..."라고 잠깐 멈춘다. 직선적인 상담사라면 "그러셨군요, 제가 오늘 끝내드리겠습니다"라고 짧고 단호하게 받는다. 딱 한 마디가 다른데, 고객이 느끼는 온도는 전혀 다르다. 처음엔 어색하다. 그게 정상이다. 안 쓰던 근육을 되살리는 일은 뻐근하고 뭉치기도 하는 법이다
세 번째 단계는 '새로운 자기로 살아가기'다. 나다움은 어딘가에 완성된 채 숨겨져 있는 보물이 아니다. 매 순간의 선택과 반복을 통해 만들어가는 방향성이다. '나는 어떤 상담사로 기억되고 싶은가'라는 질문에 답을 써보자. 성과 목표가 아니라 존재 목표다. 하고 싶은 말을 꾹 참던 순간에 용기 내어 내 생각을 건네보는 것, 무미건조한 매뉴얼 대신 지금 이 사람에게 닿는 나만의 언어를 찾는 것. 그 선택들이 쌓여 비로소 나다운 상담의 모습을 발견하게 된다.

인공지능 시대에 고객이 진정으로 원하는 것은 매끄러운 정답이 아니다. "네, 그러셨군요" 대신 "저도 그래요"라고 웃어줄 수 있는 사람이다. 세상에서 가장 강력한 스크립트는, 나라는 사람이 진심으로 쓴 나만의 언어다. AI가 그것만큼은 절대 흉내 낼 수 없다.
지윤정 (윌토피아대표/ 성신여대 외래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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