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라임경제] 도널드 트럼프를 보고 있으면 한 시대의 균열이 한 사람의 얼굴로 드러나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처음에는 그저 유난스러운 정치인이라고 여겼다. 거친 말과 과장된 행동, 예측하기 어려운 선택이 계속 이어지는 사람. 그런데 시간이 갈수록 생각이 달라진다. 트럼프는 단지 한 개인의 돌출된 캐릭터가 아니라 미국과 세계가 안고 있던 불안과 분노, 피로가 응축된 결과에 더 가까워 보인다.
한때 미국은 적어도 명분을 말하는 나라였다. 자유와 민주주의, 동맹과 국제질서 같은 말을 앞세웠다. 물론 그 뒤에는 숱한 전쟁과 개입, 패권의 이중성이 있었다. 그래도 세계는 미국을 완전히 불신하지는 않았다. 적어도 저 나라는 스스로 내세운 규칙을 의식하는 나라라고 여겼기 때문이다. 패권을 떠받치는 것은 군사력만이 아니라 신뢰이기도 하다.
지금 트럼프의 미국은 그 신뢰를 스스로 깎아내리고 있다. 말은 쉽게 뒤집히고, 외교는 협박과 거래로 축소되며, 동맹은 함께 지켜야 할 가치가 아니라 비용을 따지는 계산서처럼 다뤄진다. 강한 나라로 보이려 하지만, 그럴수록 오히려 조급함이 읽힌다. 힘이 넘쳐서라기보다 무엇을 지키려는지 분명하지 않아서 더 불안하게 보이는 것이다.
트럼프가 위험한 이유도 거기에 있다고 본다. 전쟁을 좋아해서라기보다, 전쟁조차 하나의 수단처럼 가볍게 다룰 수 있는 정치이기 때문이다. 국가의 권력은 본래 무거워야 하는데, 그의 권력은 너무 쉽게 흔들리고 너무 쉽게 휘둘러진다. 하지만 국제정치는 그렇게 가볍지 않다. 한 번 깨진 약속과 한 번 잃은 신뢰는 오래 남는다.
그렇다고 이것을 트럼프 한 사람의 문제로만 보기도 어렵다. 트럼프는 미국 사회가 오래 쌓아온 불만 위에서 등장했다. 반세기 가까운 신자유주의는 성장과 효율을 말했지만, 그 과정에서 무너진 공동체와 불안해진 일자리, 깊어진 격차도 함께 남겼다. 세계화는 모두를 풍요롭게 할 것처럼 말했지만, 실제로는 많은 사람들에게 상실의 기억으로 남았다. 그 틈에서 사람들은 점점 더 보호와 배타, 국경과 적대를 쉽게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여기에 AI 시대의 변화가 겹치고 있다. 기술은 전에 없이 빠르게 앞서가는데, 사람의 마음과 정치의 윤리는 그 속도를 따라가지 못한다. AI는 세상을 더 편리하게 만들고, 산업의 판을 바꾸고, 경제의 질서를 다시 짜고 있다. 그런데 정작 그 변화 앞에서 인간은 더 차분해진 것이 아니라 더 조급해진 것처럼 보인다. 더 빨리 판단하고, 더 빨리 반응하고, 더 자극적인 말에 더 쉽게 끌린다는 그 점이 가장 불안하다.
AI는 미래를 상징하는 기술인데, 정치는 오히려 점점 더 원초적이 되고 있기 때문이다. 기술은 정교해지는데 언어는 거칠어지고, 정보는 넘쳐나는데 숙고는 줄어들고, 연결은 많아지는데 공감은 얕아진다. 인간이 만든 기술은 미래로 달려가는데, 인간의 정치는 오히려 과거로 되돌아가는 듯한 장면을 자주 본다.
한때 우리는 역사가 결국은 조금씩 나아간다고 믿었다. 민주주의와 자유주의도 완전하지는 않아도 결국은 앞으로 간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요즘은 그 믿음이 자주 흔들린다. 거친 말이 더 쉽게 힘을 얻고, 책임 없는 정치가 오히려 박수를 받는 장면을 자꾸 보게 된다. 기술은 빠르게 발전하는데, 사람을 대하는 정치의 품격과 상식은 오히려 뒤로 가는 것처럼 느껴질 때가 있다.
조금 느리더라도 민주주의는 앞으로 갈 것이고, 사람들은 결국 전쟁과 증오보다 상식과 절제를 택할 것이라고 믿고 싶다. 그런데 요즘 뉴스를 보다 보면, 우리가 당연하게 여겼던 것들이 사실은 아주 위태로운 기반 위에 서 있었던 건 아닌가 싶어진다. 신뢰도, 민주주의도, 자유주의도 생각보다 쉽게 흔들린다.
그래서 트럼프를 보면 한 정치인의 기행만 떠오르지 않는다. 오히려 우리가 어디까지 와 있는지 돌아보게 된다. 왜 이런 정치가 반복해서 등장하는지, 왜 사람들은 질서보다 충격에 끌리는지, 왜 세계는 점점 더 거칠어지는지 묻게 된다. 트럼프는 원인이면서도 결과다. 한 시대의 병증이 가장 선명하게 드러난 얼굴이다.
결국 그가 무너뜨리는 것은 미국의 힘 자체가 아닐지 모른다. 미국은 여전히 강하다. 군사력도, 돈도, 기술도 있다. 그리고 AI 시대에도 미국은 여전히 가장 앞서 있는 나라 가운데 하나다.
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신뢰다. 신뢰를 잃은 강대국은 더 자주 위협해야 하고, 더 자주 힘을 과시해야 하며, 더 큰 비용을 치르게 된다. 모두가 자발적으로 따르던 질서가 사라지면 남는 것은 공포와 거래뿐이다.
지금 세계가 너무 빨리, 너무 거칠게 바뀌고 있다고 느낀다. AI는 인간의 능력을 넓혀주고 있지만, 그 속도만큼 인간의 성숙이 따라오지 못하면 기술은 불안을 더 키울 수도 있다. 그래서 더더욱 필요한 것은 큰소리보다 절제이고, 충격보다 책임이며, 속도보다 숙고라고 생각한다. 너무 평범해서 눈에 띄지 않는 가치들이지만, 결국 사회를 지탱하는 것은 그런 것들이었다.
트럼프의 시대는 그 사실을 다시 떠올리게 한다. 신뢰는 느리게 쌓이고 빠르게 무너진다. 그리고 한 번 무너지기 시작하면, 힘만으로는 다시 세울 수 없다.
그래서 지금 두려운 것은 트럼프 개인이 아니라, 그런 정치를 점점 익숙하게 받아들이는 시대 그 자체인지도 모른다.
문연철 목포mbc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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