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위크=김두완 기자 단계적·순차적 개헌이라는 방법론이 다시 떠오르고 있다. 6·3 지방선거와 동시에 개헌 국민투표를 실시하자는 제안이 나오면서 정치권과 국회 안에서 ‘순차 개헌’ 논의가 재점화된 것이다. 1987년 개헌 이후 39년째 손대지 못한 헌법을 한 번에 고치는 전면 개헌 대신, 사회적 합의가 가능한 사안부터 단계적으로 개정하자는 접근이다. 국회입법조사처 역시 계엄 통제 강화, 기본권 보완, 지역균형발전, 기후 대응 등을 우선 검토할 개헌 의제로 제시하며 같은 문제의식을 제기했다.
◇ 전면 개헌 대신 ‘합의 가능한 것부터’… 순차 개헌론
우원식 국회의장은 10일 국회에서 긴급 기자회견을 열고 6·3 지방선거와 동시에 개헌 국민투표를 실시하자고 제안했다. 우 의장은 “불법 비상계엄은 꿈도 못 꾸는 개헌으로 개헌의 문을 열자”며 계엄 통제 강화와 5·18 민주화운동 정신의 헌법 전문 수록, 지역균형발전 국가 책임 명시 등을 우선 개헌 의제로 제시했다. 전면 개헌을 시도하다 논의 자체가 좌초되는 상황을 반복하기보다 합의 가능한 범위부터 개헌을 시작하자는 취지다.
이 같은 제안은 최근 국회입법조사처가 내놓은 개헌 분석 보고서의 문제의식과도 맥을 같이 한다. 보고서는 전면 개헌 시도가 정치적 충돌로 번번이 무산된 현실을 지적하며 합의 수준이 높은 의제부터 순차적으로 개헌을 추진하는 방식이 현실적인 대안이 될 수 있다고 분석했다. 헌법이 안정성을 중시하는 규범이지만 사회 변화 속도를 따라가기에는 경직성이 강하다는 점도 이유로 제시된다.
보고서는 먼저 지금의 헌법이 한국 사회의 구조 변화를 충분히 반영하지 못하고 있다는 점을 짚었다. 인구 감소와 지방 소멸, 수도권 집중, 기후위기, 정보사회 확대 등 국가 운영의 기본 조건이 크게 바뀌었지만 헌법은 여전히 1987년 체제에 머물러 있다는 것이다. 여기에 대통령 권한 집중 문제나 사회 양극화 심화 같은 정치·사회적 갈등 역시 헌법 차원의 대응 논의가 필요한 영역으로 지목된다.
우선 개헌 의제로 가장 눈에 띄는 것은 계엄 규정이다. 현행 헌법은 대통령이 국가 비상사태에서 계엄을 선포할 수 있도록 하고 있지만 사전 견제 장치는 제한적이다. 국무회의 심의가 규정돼 있지만 대통령 판단에 따라 형식적으로 운영될 수 있고, 국회의 개입 역시 사실상 사후 통제에 가까운 구조라는 지적이 이어져 왔다. 보고서는 국가 긴급권이 위기 대응 기능을 유지하면서도 남용되지 않도록 국회의 승인이나 통제 권한을 강화하는 방향의 개헌 필요성을 제기한다.
헌법 전문 개정도 오래된 개헌 의제 가운데 하나다. 민주주의 발전 과정에서 중요한 의미를 가진 역사적 사건을 헌법 전문에 반영하자는 논의로, 특히 5·18 민주화운동 정신을 명시하는 문제는 정치권에서도 여러 차례 합의가 언급됐던 사안이다. 보고서는 민주주의 위기 상황에서 시민들이 헌정 질서를 지켜낸 경험을 헌법적 가치로 정리할 필요가 있다고 본다.
기본권 체계 보완 역시 주요 개헌 의제로 제시된다. 헌법 제정 이후 과학기술과 사회 환경이 크게 변화했지만 기본권 규정은 이를 충분히 반영하지 못하고 있다는 지적이 많다. 보고서는 생명권과 안전권을 명시하고 개인정보 자기결정권 등 정보사회에 대응하는 기본권을 헌법에 포함하는 방안을 검토할 수 있다고 설명한다.
지역균형발전 문제도 개헌 논의의 중요한 축이다. 수도권 인구 집중이 심화되면서 지방 소멸이 현실적인 정책 과제가 됐지만 이를 뒷받침할 헌법적 원칙은 충분하지 않다는 것이다. 보고서는 국가가 지역 간 불균형 해소와 균형 발전을 추진할 책임을 헌법에 명확히 규정하는 방안을 검토할 수 있다고 본다.
기후위기 역시 헌법이 충분히 다루지 못한 영역으로 지목됐다. 현행 헌법에도 환경권이 규정돼 있지만 기후위기와 같은 전 지구적 문제를 다루기에는 내용이 포괄적이라는 지적이다. 보고서는 지속가능한 발전 원칙과 미래세대에 대한 국가 책임을 헌법 차원에서 명확히 하는 방안을 제시한다.
개헌 추진 방식으로는 전국 단위 선거와 국민투표를 동시에 실시하는 방안이 거론된다. 별도의 국민투표를 실시할 경우 비용 부담이 크기 때문에 지방선거나 총선 같은 전국 단위 선거와 연계하는 것이 현실적이라는 분석이다. 그러면서 헌법개정에 대한 제도적 제언으로 △상설 헌법위원회 △국민개헌회의(가칭) 등 설치를 언급했다. 정파 갈등에 따라 개헌 논의가 중단되는 상황을 반복하지 않도록 국회 내 상설 논의 구조를 만들고, 시민 참여를 통해 개헌 논의의 공론화 기반을 마련하자는 취지다.
정치권에서도 관련 논의가 이어지고 있다. 진보당 헌법개정특별위원회 위원장인 전종덕 의원은 우 의장의 지방선거 동시 개헌 제안을 환영하며 “39년째 멈춰 있는 헌법을 시대에 맞게 바꾸는 일은 더 이상 미룰 수 없는 과제”라고 밝혔다. 전 의원은 비상계엄 통제 강화와 5·18 정신 헌법 전문 수록, 지역균형발전 국가 책임 명시 등을 합의 가능한 우선 개헌 의제로 꼽으며 국회가 즉각 개헌특별위원회를 구성해 논의에 나서야 한다고 촉구했다.
다만 개헌 논의가 실제 정치적 합의로 이어질지는 여전히 미지수다. 권력구조 개편을 둘러싼 이해관계가 다시 논쟁의 중심으로 떠오를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전면 개헌이 아니라 최소 범위의 개헌부터 시작하자는 ‘순차 개헌’이 39년 동안 멈춰 있던 헌법 개정을 움직일 수 있을지 정치권의 선택이 주목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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