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승기] “봉쥬르~” 프랑스 감성 진하게 담긴 ‘르노 필랑트’, 이유 있는 자신감

마이데일리
르노 필랑트 전면부. /윤진웅 기자

[마이데일리 = 윤진웅 기자] 르노 필랑트. 이름부터 심상치 않은 이 E세그먼트 크로스오버는 단순한 신차 한 대가 아니다. 르노가 지난 2023년 발표한 ‘인터내셔널 게임 플랜 2027’ 아래 내놓은 글로벌 전략형 플래그십이자, 한국을 D·E세그먼트 개발·생산 허브로 삼겠다는 구상의 상징에 가깝다.

이름의 뿌리도 분명하다. ‘필랑트’는 1956년 미국 보네빌 소금사막에서 여러 속도 기록을 세운 르노의 전설적 기록차 ‘에투알 필랑트’에서 가져왔다. 당시 에투알 필랑트는 1km 구간 306.9km/h, 5km 구간 308.85km/h를 기록하며 르노 역사에 깊은 흔적을 남겼고, 르노는 이후 ‘필랑트 레코드 2025’ 같은 효율 실험차에도 같은 이름의 계보를 이어 붙였다. 과거에는 속도의 이름이었고, 지금은 기술과 효율의 이름이 됐다.

필랑트와의 첫 만남은 지난 5일 이뤄졌다. 르노코리아는 이날 경주에서 기자들을 대상으로 필랑트 미디어 시승행사를 열었다. 지난해 APEC 정상회의가 열렸던 곳이다. 당시 APEC 공식 문서에서도 경주를 ‘천년 고도’로 규정했는데, 르노코리아 대표이사 니콜라 파리가 “경주가 필랑트의 감성을 담기에 최적화된 지역”이라고 말한 배경도 여기에 있다. 오래된 시간의 결을 품은 도시에서, 르노는 새 플래그십의 첫인상을 조금 더 근사하게 연출하고 싶었던 듯하다.

니콜라 파리 르노코리아 대표이사가 환영 인사를 전하고 있다. /윤진웅 기자

실제로 마주한 필랑트는 SUV의 덩치 과시보다 긴장감 있는 비례감으로 승부하는 차였다. 르노는 이 차를 길이 4915mm의 E세그먼트 크로스오버로 규정하고 있다. 세단과 SUV의 경계를 일부러 흐린 차체, 낮고 길게 누운 실루엣, 뒤로 갈수록 날렵해지는 루프 라인은 이름에 담긴 ‘별똥별’ 이미지를 억지스럽지 않게 형상화한다. 요란한 장식보다 전체 비례로 존재감을 만드는 쪽이다.

현장에서 들은 얘기 중 흥미로운 대목도 있었다. 필랑트의 외장 컬러는 현재 5가지로 운영되지만, 향후 르노를 대표하는 블루 계열을 살리기 위한 ‘녹턴 블루’ 적용도 준비 중이라고 했다. 그냥 색 하나 추가하는 문제가 아니다. 필랑트라는 이름이 원래 르노의 기록차 헤리티지와 연결돼 있다는 점을 감안하면, 블루는 이 차의 배경을 가장 직접적으로 보여주는 색이 될 가능성이 크다. 기록차의 기억을 현대식 플래그십으로 옮겨오는 데 가장 어울리는 장치이기도 하다.

르노 필랑트 루프 글라스. 루프 손잡이 등 시야를 방해하는 요소를 모두 걷어내 공간감을 키웠다. /윤진웅 기자

실내에서는 무엇보다 루프 글라스가 강하게 남는다. 요즘 차들이 ‘개방감’을 말할 때 대개 면적부터 키우는 데 집중한다면, 필랑트는 시야를 방해하는 요소를 걷어내는 방식으로 공간감을 만든다. 운전석과 조수석 위쪽 프레임 주변을 복잡하게 보이게 만드는 손잡이류를 덜어낸 덕분에 시선이 자연스럽게 위로 트이고, 실내가 훨씬 시원하게 느껴진다. 깔끔하고 밝다. 르노가 이 차의 실내를 ‘프리미엄 테크 라운지’로 설명하는데, 적어도 이 부분에서는 마케팅 문구가 실제 감각을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르노는 필랑트에 1.1㎡ 크기의 파노라믹 글라스 루프와 수평형 레이아웃, 라운지형 시트를 핵심 요소로 제시한다.

주행에서 가장 먼저 놀라게 한 것은 성능보다 연비였다. 차의 잠재력을 확인하려고 제법 거칠게 몰아붙였는데도 1차 주행 61.8km에서 평균 연비 13.2km/L, 2차 주행 73.3km에서 평균 연비 15.9km/L가 찍혔다. 특히 두 번째 수치는 르노가 제시한 공인 복합연비 15.1km/L를 웃돈다. 효율을 앞세운 하이브리드라고는 해도, 실제로 몰아붙인 뒤 이런 숫자가 나오는 것은 쉽게 지나치기 어렵다. 적어도 필랑트는 연비를 위해 성능을 포기한 차가 아니라, 성능을 확인하는 과정에서도 효율이 쉽게 무너지지 않는 차에 가깝다. 르노는 필랑트에 250마력 시스템 출력의 하이브리드 E-Tech와 1.64kWh 배터리를 탑재했다고 밝히고 있다.

고속 안정성도 좋았다. 액셀을 길게 밟으면 차가 힘겹게 버티거나 억지로 쥐어짜는 느낌 없이 속도를 끌어올린다. 한순간에 등을 세게 떠미는 타입은 아니다. 대신 체급에 맞는 여유와 매끈함으로 답한다. 르노가 설명하는 1.5리터 터보 가솔린 엔진과 듀얼 모터, 3단 멀티모드 하이브리드 변속기의 조합은 숫자만 놓고 보면 다소 생소하지만, 실제 감각은 복잡한 메커니즘을 운전자에게 들키지 않으려는 쪽에 가깝다. 하이브리드 특유의 전환 이질감을 줄이는 데 꽤 공을 들인 차다.

다만 운전자 개입의 재미를 기대했다면 결은 다르다. 메뉴얼 모드로 바꿔 적극적으로 끌어올리는 식의 운전은 불가능했다. 현장 설명대로라면 하이브리드 시스템 특성상 3단 구조에 맞춰 효율과 부드러움에 우선순위를 둔 결과다. 필랑트는 운전자에게 기계적 재미를 강하게 안겨주는 차라기보다, 차가 알아서 가장 좋은 타협점을 찾게 두는 쪽에 더 가깝다.

도로 위를 질주하는 르노 필랑트. /르노코리아

아쉬운 대목은 차선 유지 보조였다. 안전을 위해 센터링을 잡아주는 성향이 꽤 강한 편인데, 운전자의 미세한 습관까지 어느 정도 허용해주는 타입은 아니다. 평소 차선을 조금 왼쪽에 붙여 타는 스타일이라면, 차가 자꾸 오른쪽으로 엄격하게 밀어내는 느낌을 받을 수 있다. 실제 시승에서도 이 개입이 반복되면서 차가 살짝 흔들리는 듯한 롤링이 생겼고, 장거리에서는 은근한 피로감으로 이어졌다. 르노는 필랑트에 최대 34개의 ADAS를 넣고 레벨2 수준 주행 보조를 지원한다고 밝히는데, 적어도 이 차의 기본 철학이 ‘운전 재미’보다 ‘안전한 개입’에 더 가까워 보이는 건 분명했다.

결국 필랑트의 본질은 이름처럼 무모하게 날아가는 차가 아니다. 오히려 르노가 과거의 기록차에서 빌려온 상징을 오늘의 언어로 다시 번역한 차에 가깝다. 1956년의 에투알 필랑트가 소금사막에서 숫자로 야심을 증명했다면, 2026년의 필랑트는 정숙성, 효율, 디지털 경험, 그리고 한국을 출발점으로 삼은 글로벌 전략으로 르노의 방향을 보여준다. 그리고 그 가운데 가장 먼저 체감되는 것은 의외로 화려한 스크린도, 거창한 이름도 아닌 연비다. 플래그십은 꼭 힘으로만 존재를 증명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필랑트는 꽤 영리하게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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