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윤정의 인간지능] ③ 스킬이 아니라 입지다

프라임경제
[프라임경제] 약국 간판의 초록 십자가를 보고 성당을 떠올리는 사람은 없다. 똑같은 십자가라도 약국에 있으면 구호의 표시이고, 산수 책에 있으면 더하기 기호가 된다. 텍스트보다 컨텍스트다. 내용 자체가 아니라 그것이 놓인 배경이 의미를 결정한다. 

AX(AI Experience) 시대라는 새로운 배경이 펼쳐진 지금, 컨택센터 상담사도 자신이 놓인 자리를 다시 읽어야 한다. AI시대 컨택센터 상담사에게 가장 시급히 필요한 것은 새로운 기술을 익히는 것 이전에 내가 서 있는 이 조직이 어떤 곳이고 나는 누구로 일해야 하는지에 대한 인식 전환이다. 바로 '입지(立地)'의 자각이다.

인간을 움직이는 진짜 힘은 기술 습득이 아니라 정체성의 변화에서 온다. 아이를 키워본 적 없는 초보 엄마가 밤잠이 아무리 많았더라도 아이의 작은 바스락거림에 번쩍 눈을 뜨는 이유는, 밤새 깨어 있는 훈련을 받아서가 아니다. '내가 이 아이의 엄마'라는 사실을 온몸으로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상담사도 마찬가지다. 내가 누구인지가 바뀌는 순간, 보이지 않던 것들이 보이기 시작한다. 가사도우미에게 청소는 빨리 해치워야 할 일이지만, 안주인에게 집안일은 가족을 향한 사랑의 표현이다. 그래서 가사도우미는 눈에 보이는 먼지를 닦지만, 안주인은 아이의 표정에 담긴 그늘을 닦고 집 안의 분위기를 치운다. 능력의 차이가 아니다. 내가 이곳의 주인이라는 입지의 차이다. 

그렇다면 지금 컨택센터라는 무대는 어떻게 달라지고 있는가. '빨리, 많이, 정확하게'의 시대는 저물고 있다. 그것은 이제 AI가 한다. 고객은 이미 상담사에게 전화하기 전에 챗봇과 한바탕 대화를 나눴다. 보이스봇에게 기준과 규정도 들었다. 웬만한 것은 다 걸러지고 나서야 인간 상담사에게 연결된다. 

즉, 지금 전화기 너머의 고객은 모르는 게 아니다. 알면서도 예외를 바라는 사람이다. 규정은 알지만 사정이 있고, 답은 들었지만 납득이 안 된다. 그래서 굳이, 기어이 인간을 찾아온 것이다. 그런 고객에게 AI가 했던 말을 똑같이 반복하면 어떻게 되겠는가. 상담사가 거기 있을 이유가 없다.

이제 인간지능 컨택센터는 고객의 예민한 불편, 말 속에 숨긴 기대, 경쟁사와 비교하며 가장 흔들리는 지점을 가장 먼저 포착하는 '안테나 센터'이자 '감지 센터'의 역할을 해야 한다. AI가 정형화된 문의를 걸러낼수록, 상담사에게 남겨지는 것들은 점점 더 인간적 판단과 감각을 요구하는 것들이다. 고객의 한숨 섞인 침묵 속에 숨겨진 불안, 말 뒤에 숨은 결핍을 감지하는 일은 여전히 사람만이 할 수 있다.

그런데 이 역할은 기술을 익힌다고 생겨나지 않는다. 내가 서 있는 배경이 바뀌었다는 사실을 온몸으로 받아들일 때 비로소 가능하다. 약국 간판의 십자가가 성당의 십자가와 다른 의미를 갖듯, 같은 자리에 앉아 있어도 내가 누구인지를 다르게 정의하는 순간 보이는 것이 달라진다. 

그러나 이 변화는 상담사 혼자의 각성으로 완성되지 않는다. 물고기가 물의 존재를 모르듯, 오래된 무대에 익숙해진 상담사는 배경이 바뀐 줄도 모른 채 예전 방식으로 움직인다. 상담사를 깨우는 것은 관리자의 몫이다. 관리자가 변화를 설계해야 한다. 

컨택센터 역할이 왜, 어떻게 달라졌는지를 반복해서 설명하고 납득시켜야 한다. 한 번의 교육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다. 팀 회의에서, 일상의 피드백에서, 계속해서 반복해야 한다. 20년간 굳어져온 역할의 껍질을 벗기는 일이다. 하루아침에 되지 않는다. 오랜 습관은 한 번의 선언으로 바뀌지 않고, 매일의 작은 자극이 쌓여야 비로소 움직이기 시작한다. 

새로운 방식으로 고객을 감동시킨 사례를 발굴하고, 공유하고, 칭찬해야 한다. 사람은 잘한 사례를 보며 배우고, 인정받을 때 바뀐다. 무엇보다 KPI가 바뀌어야 한다. 처리 건수와 통화 시간만 재는 잣대로는 감지하고 창조하는 상담사를 키울 수 없다. 고객 감동 경험, 인사이트 발굴 기여도, AI 훈련 참여도 등 기준이 새로워져야 한다. 

결국 AX 시대의 컨택센터에 필요한 것은 세세한 행동 강령이 아니다. 상담사는 처리 센터의 에이전트가 아닌, 감지하고 배우고 창조하는 주인으로 스스로를 다시 정의해야 한다. 관리자는 그 정의가 현장에서 살아 숨 쉬도록 환경을 설계해야 한다. 이 두 가지가 맞물릴 때, 인공지능의 시대에 대체 불가능한 인간지능의 진가가 비로소 발휘된다.

지윤정 윌토피아 대표 / 성신여대 외래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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