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호관세 무효화에도 산업계 ‘속앓이’…韓 수출 전선 다시 흔들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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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일 경북 경주예술의전당에서 개최한 APEC CEO 서밋에서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특별연설을 하고 있다. /대한상공회의소

[마이데일리 = 심지원 기자] 미국 연방대법원의 상호관세 무효 판결 이후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추가 관세 카드를 꺼내 들면서 국내 산업계가 또 다시 ‘관세 폭풍’에 휘말렸다. 트럼프 대통령이 즉각 ‘무역법 122조’라는 우회로를 가동하면서 정책 불확실성을 키우고 있기 때문이다.

23일 업계에 따르면 미 행정부가 상호관세 무효화에 따른 ‘플랜B’로 꺼내든 무역법 122조는 대규모 국제수지 불균형 발생 시 해당 국가를 대상으로 최대 15%의 관세를 즉각 부과할 수 있는 조항이다. 다른 관세법과 달리 별도의 사전 조사나 공청회 없이 대통령 포고령만으로 즉시 발동되는 것이 핵심이며, 최장 150일간 한시 적용된다.

특정 국가를 차등 적용할 수는 없지만, 트럼프 행정부가 중장기 관세 전략을 재설계할 시간을 버는 이른바 ‘징검다리 조치’로 활용할 수 있다는 점에서 업계의 긴장감은 어느 때보다 높다.

다른 리스크는 무역확장법 232조다. 특정 품목의 수입이 미국의 국가 안보를 해친다고 판단될 때 대통령이 수입량 제한(쿼터)이나 고율 관세를 부과하는 이 조항은 현재 한국산 자동차와 철강에 각각 15%, 50%의 고율 관세를 매기는 근거가 되고 있다.

업계는 트럼프 행정부가 상호관세 무효화에 대응해 232조를 전방위로 확장할 것을 우려하고 있다. 특히 철강 관세의 적용 범위를 ‘파생상품’ 전반으로 확대 해석할 가능성이 제기된다. 현재 철강 파생상품에는 15%의 관세가 적용되고 있지만, 미 당국이 ‘철강’의 범위를 넓게 잡을 경우 부담은 걷잡을 수 없이 커진다.

가장 우려되는 시나리오는 자의적인 품목 분류다. 예를 들어 자동차 도어, 건설장비, 포크레인 등 철강 비중이 높은 제품이 단순 부품이 아닌 철강 제품으로 분류되면, 부품이 아닌 완제품 가격 전체에 50% 관세가 부과되는 최악의 상황이 벌어질 수 있다. 기술집약적 완제품이라 하더라도 철강 함량이 기준이 될 경우 고율 관세가 적용될 수 있어 부담이 특정 업종을 넘어 산업 전반으로 확산될 수 있다는 지적이다.

/게티이미지뱅크

중국과의 경쟁 구도 변화가 중요한 변수로 꼽힌다. 그동안 중국산 제품에는 펜타닐 문제 등을 이유로 별도의 제재성 관세가 부과돼 가격 경쟁력이 제한돼 왔다. 그러나 동일한 보편 관세 체제로 재편될 경우 중국 기업이 가격을 낮춰 점유율 확대에 나설 가능성이 있다.

심종선 딜로이트 안진회계법인 파트너는 “중국이 상대적으로 유리해질 경우 단가 경쟁이 더욱 치열해질 수 있다”며 “중국 기업이 마진을 낮춰 공격적으로 가격을 조정하면 한국 기업이 물량을 잃을 가능성도 있다”고 진단했다.

대미 투자 전략 역시 재점검이 불가피하다. 관세 부담을 줄이기 위한 현지 투자 압박은 커질 수 있지만, 미국 내에서 충분한 수익을 확보할 수 있는 업종은 제한적이라는 평가가 나온다. 이미 수립된 중장기 투자 계획을 단기간에 수정하기도 쉽지 않다는 분석이다.

심 파트너는 “1년 이상 준비해 수립한 전략을 관세 변수 하나로 전면 수정하기는 어렵다”며 “기존 투자 기조를 유지하되 수익성을 보완할 수 있는 방안을 함께 모색하는 것이 현실적”이라고 말했다.

산업계는 24일 예정된 트럼프 대통령의 국정 연설과 내달 초 발간될 통상정책 의제, 국가별 무역장벽보고서(NTE) 내용에도 주목하고 있다. 122조 외에도 무역확장법 232조를 통한 반도체·파생상품 추가 관세 가능성이 남아 있기 때문이다.

무역법 301조 역시 변수다. 관세율 상한이 없고 연장도 가능해 특정 국가를 상대로 한 강력한 압박 수단으로 활용될 수 있다. 122조 종료 이후 301조와 232조를 결합한 장기 관세 체계가 마련될 가능성도 거론된다.

심 파트너는 “행정적 절차를 최대한 단축해 155일 이후 바로 관세를 부과할 수 있는 구조를 설계할 가능성도 있다”며 “신규 조사를 시작하기보다 기존 조사 결과와 연례 무역장벽보고서를 활용하면 법적으로 요구되는 절차를 압축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이어 “시한이 도래하자마자 곧바로 부과하는 방식이 가능하다”며 “기업들은 불확실성이 단기간에 현실화될 수 있다는 점을 염두에 둬야 한다”고 덧붙였다.

김정관 산업통상부 장관이 23일 서울 중구 대한상공회의소 한국산업기술기획평가원에서 열린 미국 대법원의 국제비상경제권한법(IEEPA) 관세 위법 판결 관련 민관합동 대책회의에서 발언하고 있다. /뉴시스

결국 상호관세 무효화에도 불구하고 우리 산업계는 또 다른 관세 국면에 대비해야 하는 상황이다. 정부 역시 한·미 통상 관계의 균형을 유지하면서 수출 여건 악화를 최소화하기 위한 대응 전략을 병행해야 한다는 과제를 안게 됐다.

이 같은 상황을 점검하기 위해 이날 김정관 산업통상부 장관은 서울 대한상공회의소에서 주요 경제단체와 업종별 협회, 관계부처·기관이 참석한 가운데 민관합동 대책회의를 주재했다.

참석자들은 이 같은 변화가 우리 산업과 수출에 복합적 영향을 끼칠 수 있다고 보고 공동 대응해 나가자는 데 공감대를 형성했다. 정부는 미국 측 후속조치 동향과 여타국 움직임을 파악해가며 우리 경제 및 기업의 불확실성을 최소화한다는 방침이다.

김 장관은 “국익 극대화라는 원칙 아래, 한미 관세합의를 통해 확보한 이익 균형과 대미 수출여건이 훼손되지 않도록 미국과 우호적 협의를 이어갈 것”이라며 “이미 납부한 관세의 환급 불확실성에 대응해 기업에 필요한 정보를 제때 제공할 수 있도록 협력하겠다”고 말했다.

박지형 서울대 경제학과 교수는 “대법원 판결로 대통령의 관세 운용에 일정한 제약은 생겼지만, 122조·301조·232조 등 다양한 수단이 여전히 남아 있다”며 “관세를 핵심 정책 도구로 활용하는 방향성 자체가 바뀌었다고 보기는 어렵다”고 말했다.

또 그는 대안으로 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CPTPP) 가입을 제시했다. “세계무역기구(WTO) 체제가 약화된 상황에서 CPTPP는 비교적 높은 수준의 통상 규범과 예측 가능성을 갖춘 틀”이라며 “한국이 참여할 경우 전략적 공간을 확보할 수 있다”고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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