롤스로이스 스펙터, 전동화 시대에 시간을 설계하다

프라임경제
[프라임경제] 롤스로이스모터카가 스펙터(Spectre)를 설명하는 방식은 여느 전기차 브랜드와 다르다. 효율, 충전속도, 배터리 용량 같은 단어는 전면에 나오지 않는다. 대신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키워드는 영속성과 계승 그리고 미래의 클래식이다.

이는 단순한 수사나 이미지 메이킹이 아니다. 롤스로이스는 스펙터를 통해 전기차의 시간 개념 자체를 다시 정의하려 한다.

대부분의 전기차는 기술 제품으로 설계된다. 빠른 세대교체를 전제로 하고, 배터리는 언젠가 교체될 소모품으로 취급된다. 이 구조에서 전기차는 시간이 지날수록 감가상각 되는 존재다.

하지만 스펙터는 이 공식에서 벗어난다. 롤스로이스가 강조하는 15년·주행거리 무제한 배터리 보증, 2050년대 이후까지 이어지는 배터리 셀 공급체계는 단순한 애프터서비스 정책이 아니다. 이는 '이 차는 수십 년 뒤에도 살아 있을 것'이라는 전제 아래 설계됐다는 선언이다.


최근 테스트에서 10만㎞ 이상 주행 후에도 배터리 성능의 99%를 유지했다는 결과 역시, 성능 수치 자랑보다는 시간에 대한 확신을 전달하기 위한 장치에 가깝다. 롤스로이스가 말하고 싶은 것은 빠름이 아니라, 늙지 않음이다.

스펙터는 출시 전 250만㎞에 달하는 테스트를 거쳤다. 이 수치는 전기차든 내연기관차든 쉽게 보기 힘든 수준이다. 중요한 건 테스트의 양보다 의도다. 롤스로이스가 검증하고자 한 것은 고장 나지 않음이 아니라, 오랜 시간이 지나도 롤스로이스로 느껴질 수 있는가였다.

정숙성, 차체 강성, 승차감, 실내 마감의 질감은 신차 상태에서만 의미가 있는 요소가 아니다. 이 브랜드에게는 10년, 20년 뒤에도 동일하게 작동해야 하는 기준이다. 스펙터의 전기 파워트레인은 그 자체로 혁신이라기보다, 롤스로이스가 오랫동안 추구해온 무소음에 가까운 이동이라는 철학을 가장 자연스럽게 구현하는 수단에 가깝다.

스펙터의 판매 성과는 흥미롭다. 이 차는 신규 고객 유입을 위한 모델이 아니다. 오히려 기존 롤스로이스 고객들이 자연스럽게 추가 선택하는 차다.


데뷔 첫 해에 레이스와 던의 초기 실적을 넘어섰고, 2025년 기준으로 전 세계에서 두 번째로 많이 주문된 롤스로이스 모델이 됐다. 이는 고객들이 스펙터를 실험적인 전기 롤스로이스가 아니라, 다음 시대의 기본값으로 받아들이고 있다는 의미다. 전기차로의 전환이 설득의 단계를 지나, 이미 완료된 상태에 들어섰다는 신호다.

2025년을 기점으로 등장한 고도의 비스포크 스펙터들은 이 차의 성격을 더욱 명확히 드러낸다. 반려견에서 영감을 얻은 모델, 오랜 부부의 시간을 기념한 차량 등은 단순한 커스터마이징 사례가 아니다. 

이는 스펙터가 개인의 서사를 담는 그릇으로 기능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롤스로이스 고객들이 이 차를 단기 보유용 소비재를 넘어 감정과 기억을 축적하는 매개체로 인식하고 있다는 뜻이다. 

스펙터의 디자인은 과장되지 않는다. 분리형 헤드램프, 판테온 그릴, 패스트백 실루엣은 과거 롤스로이스 쿠페의 문법을 조용히 계승한다. 실내의 스타라이트 도어와 일루미네이티드 페시아 역시 화려함보다는 시간이 지나도 촌스럽지 않을 균형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이 모든 요소가 가리키는 방향은 하나다. 스펙터는 최신 전기차가 아니라 언젠가 클래식이 될 것을 전제로 만들어진 현재형 롤스로이스다.

크리스 브라운리지(Chris Brownridge) 롤스로이스모터카 CEO는 "스펙터는 모든 롤스로이스를 정의하는 영속성의 정신을 바탕으로 탄생한 모델이다"라며 "최초의 전기 롤스로이스로서 브랜드 역사에 뚜렷한 이정표를 세웠다"고 말했다. 

이어 "롤스로이스 고객들은 스펙터의 가치를 직관적으로 이해하고, 이를 세대를 넘어 감상하고 계승할 롤스로이스로 주문 제작하고 있다"며 "시장 반응에서도 확인할 수 있듯이 스펙터는 롤스로이스 역사상 가장 성공적인 쿠페 출시로 평가받고 있다"고 덧붙였다.

크리스 브라운지지 말한 영속성은 추상적인 브랜드 가치가 아니다. 스펙터는 그 단어를 물리적 구조와 제도, 고객 경험 전반에까지 녹여낸 결과물이다. 빠르게 진화하는 전기차시장에서 롤스로이스는 가장 느린 전략을 선택했다. 그러나 그 느림은 뒤처짐이 아니라, 시간을 자기 편으로 만드는 방식이다.

스펙터는 전기차의 미래를 보여주는 모델이 아니다. 전기차가 클래식이 될 수 있다는 가능성을 처음으로 현실에 내려놓은 사례에 가깝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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