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어렸을 적 살았던 고향에는 탱자나무 울타리를 두른 집들이 많았네. 나는 많은 가시를 가진 나무도 있다는 걸 탱자나무를 보고 알았어. 탱자나무 울타리 밑에서 흙을 파면서 놀던 병아리들과 흰 탱자꽃 사이를 헤집고 다니던 참새나 박새 모습이 아직도 눈에 선하네. 가시에 찔리지 않고 탱자나무 가지 사이를 자유롭게 드나드는 새들의 모습이 얼마나 신기했는지 몰라. 물론 그들이 다치면 어쩌나 불안도 했지. 하지만 나중에 유하의 <참새와 함께 걷는 숲길에서>라는 예쁜 제목의 시를 읽고 나서는 어렸을 때의 걱정이 부질없는 것이었음을 알았네.
바람이 낳은 달걀처럼/ 참새떼가 우르르 떨어져 내린/ 탱자나무 숲/ 기세등등 내뻗은 촘촘한 나무 가지 사이로/ 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참새들은 무사통과한다// (그 무사통과를 위해/ 참새들은 얼마나 바람의 살결을 닮으려 애쓰는가)// 기다란 탱자나무 숲/ 무성한 삶의 가시밭길을 뚫고/ 총총히 걸어가는 참새들의 행렬// (가시에 찔리지 않기 위해/ 참새들은 얼마나 가시의 마음을 닮으려고 애쓰는가)// ……난 얼마나 생의 무사통과를 열망했는가
나도 시인처럼 생의 무사통과를 열망하면서 나름으로 열심히 살았네. 특히 노년기에 들어서는 더 근신했어. 하지만 참새들과는 달리 바람의 살결과 가시의 마음을 닮을 수 없었나 보네. 얼마 전에 그만 가시에 찔려 넘어지고 말았으니 말일세.
지난 몇 년 동안 술과 담배를 끊고 소식하면서 새벽마다 열심히 걸었던 덕분에 몸과 마음이 함께 가벼워져 하늘을 날 것만 같았네. 그래서 인생은 아름답다고 날마다 노래하면서 살았지. 작년에 세상을 떠난 신경림 시인처럼“십년 전에 보지 못하던 것을 이제야 보고/ 한달 전에 안 보이던 것이 오늘에사” 보이고, “밝은 눈과 젊은 귀에 들어오지 않던 것들이/ 흐린 눈과 늙은 귀에 비로소 들어온다는 것이 신기”(<소요유(逍遙遊)>)하기만 했어. 그러니 “밝은 눈으로는 보지 못했던 것들을/ 흐려진 눈으로 새롭게 찾아내고/ 젊어서 듣고 만지지 못했던 것들을/ 어두워진 귀와 둔하고 탁해진 손으로/ 듣고 만지고 다시 보는 즐거움에 빠져” 시간 가는 줄 오를 수밖에. 유하 시인의 시 속 참새처럼 가시밭길을 무사통과했다고 확신했지.
하지만 교만이었네. 지난 두 달여 동안 척추관협착증으로 제대로 걷지 못하면서 사람이 자기 의지대로 움직일 수 있는 게 얼마나 중요한지를 새삼 깨달았어. 자기 마음대로 움직이지 못하는 사람을 식물인간이라고 부르는 이유를 알겠더군. 다행히 지금은 많이 좋아졌네. 열흘 전에는 야생화를 보러 강원도 만항재에 갔고, 버스터미널을 찍으러 부산과 울산에도 무사히 다녀왔어. 요즘은 다시 새벽에 시속 5.6km 속도로 30분 이상 쉬지 않고 걷고 있네. 물론 3개월 전으로 완전히 돌아간 것은 아니야. 아직 가파른 언덕은 올라가기 힘들어. 계단을 오를 때도 난간을 잡고 천천히 발을 옮겨야 편하고 안전해. 한쪽 다리의 힘이 약해서 헛디디면 넘어질 수도 있거든.
자유롭게 살기 위해서는 누구나 자기 외부의 어떤 것에도 속박당하거나 구속받지 않고, 스스로 판단하고 선택하고 결정할 수 있어야 하네. 하지만 몸과 정신과 영혼이 아프거나 노쇠하면 이런 독립성과 자율성이 줄어들 수밖에 없어. 정도가 심하면, 가족이나 전문 간병인의 도움 없이는 살 수 없게 되는 거고. 그러면 자기가 하고 싶은 일도 하지 못하고, 스스로 선택하고 결정할 수 있는 일도 줄어들어. 그러다가 마지막에는 아무것도 할 수 없게 되는 거지. 다른 사람의 도움을 받아 병원 침상에서 누워 지낼 수밖에 없어. 그러니 이동성을 완전히 상실하면 죽은 거나 다름없게 되는 걸세.
이번에 척추관협착증을 앓으면서 노인의 자유와 이동성에 관해 많은 생각을 했네. 누구나 늙으면 인지 기능 저하와 신체 노화로 이동 능력이 줄어들 수밖에 없어. 가고 싶은 곳이 있어도 자유롭게 갈 수 없지. 늙으면 운전하는 것도 쉽지 않아. 그래서 필요한 게 노인을 포함한 교통약자들의 이동성을 돕는 교통복지의 확대야. 누구나 필요할 때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게 돕는 교통 기반의 구축이 필요해. 전국을 기차와 버스로 촘촘하게 연결하는 대중교통망을 만들어야 한다는 뜻일세.
하지만 현실은 반대로 가고 있는 것 같네. 경제적 이유로 버스터미널들이 하나둘 사라지고 있어. 지난 1년여 동안 전국에 있는 100개가 넘는 버스터미널을 직접 찾아다니면서 확인했네. 정말 절간처럼 조용하고 쓸쓸한 터미널들이 많더군. 사람도 버스도 보이지 않고, 텅 빈 대기실과 승하차장만 있는 터미널들. 그런 터미널들이 얼마나 오래 버틸 수 있을지 걱정하면서 한숨만 쉬고 돌아올 때가 많았네. 버스 노선과 터미널이 줄어들면 노인을 포함한 사회적 약자들이 가장 큰 피해자가 될 걸세. 노인이 되면 운전면허증을 반납하라고 은근히 압력을 넣는 사회에서 전국적인 버스 노선이 줄어들면 점점 많아지는 노인들은 어디서 무엇을 하면서 긴 노년을 지내야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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