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라임경제] 서울 명동에 가면 유네스코회관 길 건너에 검은 돌로 된 비석이 있다. 1953년에 문을 열어 개발붐이 한창이던 1973년까지 20여년간 배우 최불암의 어머니 이명숙(1986년 작고)씨가 운영했던 예술인들의 사랑방 막걸리집, 은성주점 자리였다는 표짓돌이다. 이곳에서 1956년 3월17일 목마와 숙녀로 유명한 박인환 시인이 "세월이 가면"이란 본인의 마지막 시를 썼다.

극작가 이진섭, 백치아다다로 유명한 나애심 등과 몇이서 같이 술을 마시던 중이었다. 한번도 술값을 낸 적이 없는 박 시인에게 밀린 술값 달라는 은성주점 이씨의 말을 들은 박 시인이 느닷없이 시 한 편을 써 내려갔다. 이 자리에서 완성된 시가 "세월이 가면"인데, 이 시를 본 극작가 이진섭이 그 자리에서 곡을 붙이고, 나애심이 노래를 불렀다.
그러자 최 배우의 어머니 이씨는 마치 자기 사연인 양 펑펑 울며, 다시는 외상값 얘기 안 할 테니 그 노래만 부르지 말아 달라고 애원했다고 한다. 그러나 그 후 외상술값 얘기는 할 수도 없었다. 박 시인이 이 시를 쓴 3일 후인 1956년 3월20일 나이 서른에 세상과 이별했기 때문이다.
들려오는 얘기로는 시인 이상의 기일에 그를 너무 존경했던 박 시인이 이상 시인을 기리는 "죽은 아폴론"이란 시를 써놓고 3일 내내 술독에 빠져있다가 급성 알콜성 심장마비로 사망했다는 후문이다.
이 시를 보자마자 울음을 터트린 이명숙씨는 최불암 선생이 여섯살 때 남편을 잃었다. 궁중악사의 딸이었던 이 씨는 최 배우의 아버지 최철씨와 결혼해 인천에 살았는데, 최씨의 사촌들이 대부분 독립운동을 했던 터라 최 배우가 뱃속에 있을 때 그들을 도우러 만주로 갔다.
그 곳에서 돈을 많이 번 최씨는 해방과 함께 말 여섯필에 금은보화를 잔뜩 싣고 돌아왔다. 1940년생인 최불암 배우는 그 당시 5살. 아버지 최씨는 돌아오자마자 사업에 뛰어들어 건설영화사와 신문사 인천일보를 인수했고, 영화제작 사업에도 손을 댔다.
그러나 첫 영화시사회 순간에 그 또한 심장마비로 세상을 하직했다. 홀로 된 이명숙씨는 빚 잔치로 빈털터리가 되어 최 배우를 자물쇠로 채워 방에 가두고, 살기 위해서 식당 일을 나갔다.
그 후 식당운영과 조리를 할 수 있게 된 이씨는 1953년 말 서울 명동 유네스코 회관 건너편에 가게를 얻어 은성주점을 차렸는데 하루 이틀 지나며 여기는 예술인들의 집합소가 되었다. 돈은 주면 받고 안주면 안 받고 해서 였을까!
날만 새면 여기를 드나 들었던 근현대 예술인들이 많았는데, 그 면면을 보면 이봉구, 서정주, 변영로, 전혜린, 오상순, 나애심, 임만섭, 천상병, 김수영 등 그 수를 헤아릴 수 없었다.
이 당시 은성주점은 봉구주점, 이봉구 작가는 명동백작으로 불리었는데 그 이유는 이들 중 이 작가가 돈이 제일 많아 술값을 내는 일이 많았고, 언론인이자 소설가인 그는 빈 시간 대부분을 이 집에서 보냈기 때문이었단다.
이 시를 쓴 박인환 시인은 이 시를 쓴 날 망우리 공동묘지를 다녀오는 길이었다. 6.25사변 탓에 5년 전에 잃은 첫 애인의 기일이었기에.
지금이야 가깝다 할 수 있지만 그 당시 동대문 밖은 신작로. 터덜대는 버스로 2~3시간을
가야했다. 아침 일찍 출발해 오후 5시경 은성주점에 도착했던 박 시인이었다.

곡이 붙여진 이 노래를 가수 나애심이 부르고 자리를 떴는데도 최 배우의 어머니가 펑펑
우는 모습을 본 테너 임만섭이 짖꿏게도 이 노래를 다시 불렀다. 남 저음의 우렁찬 목소리로. 그러자 은성주점 앞을 지나던 행인들이 몰려들기 시작했다. 그 수가 천명, 이천명, 셀 수가 없었다하니 그 당시엔 가히 볼거리였음에 틀림없다.
이 곡은 나애심이 불러 1956년 신신레코드에서 발매됐는데, 그 후 차례로 가수 현인, 박미성, 뚜아에무아, 박인희, 계수남, 조용필 등이 이 노래를 취입했으나 1978년 박인희 가수가 불러 인기몰이를 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녀의 곡으로 알고 있고, 이름이 비슷한 박인환과 박인희는 단지 이름 뿐 아무런 관계가 없는 사이다.
박인환 시인은 목마와 숙녀란 시를 쓴 작가로 유명하다. 그는 강원도 인제에서 태어나 경성제일고보와 평양의전을 중퇴하며 서울로 와 마리서사라는 서점을 운영하며 시를 쓰기 시작했다.
180cm가 넘는 키에 항상 국방색 롱코트만 입고 다녀 이봉구와 함께 명동백작이란 별명도 가졌던 박 시인은 조니워커 위스키와 카멜 담배를 좋아했는데, 박 시인의 장례식 때 많은 동료문인들이 이것들을 가져와 관에 넣어 주었다고 한다.
생전에 박인환 시인은 위스키에 대해 논하면서 "우리는 위스키를 마신다. 첫 잔은 과거를 위해, 두번째 잔은 오늘을 위해. 내일!, 그 딴 건 개나 주라우" 라고 했단다.
그가 태어난 강원도 인제군 인제읍 상동리에 그를 기리는 박인환 문학관이 있다. 2012년 개관된 문학관에는 박인환이 경영하던 서점인 마리서사(茉莉書肆)를 포함해서 그가 평소에 동료 문인들과 드나들며 문학에 대해 토론을 나누었던 술집들 여러 곳이 그대로 재현되어 있으며, 박인환이 모았던 영화 포스터들과 그의 육필 원고도 전시되어있다.
은성주점의 후담이다.
수사반장 18년, 전원일기 22년을 찍으며 국민 아버지란 별칭을 가진 배우 최불암.
어린 시절 당신 어머니가 명동에서 운영한 술집 '은성'은 당대의 문학가들의 사랑방 역할을 했다. 시인 김수영은 은성주점에서 시상을 가다듬었고, 작곡가 윤용하는 보리밭의 악상을 다듬었다. 박인환 시인의 세월이 가면은 명동의 노래라고 일컬어졌다. 박인환, 한하운 등 유명 인사들은 막걸리를 외상으로 많이 얻어 먹었고, 또 어린 시절의 최불암에게도 한 잔씩 권하기도 했다.
특히 변영로 시인은 아예 은성에 지정석을 꿰차고 앉아 있었다고. 변영로 시인이 최불암의 대입 축하잔을 건넸는데 최불암 청년이 마신 잔을 돌려 주려 했다.
잔 돌려 마시는 풍습이 대세였던 시절이니까. 최불암이 잔에 남은 술을 바닥에 털자 변영로 시인은 대뜸 뺨을 때리며 크게 호통을 쳤다고. 당시 받은 술은 막걸리. 쌀로 담근 술을 바닥에 버렸다고 혼이 난 것이다.
이때의 경험으로 최 배우는 음식을 남기지 않고 먹으려는 습관이 생겼단다. 어머니가 타계하신 뒤 최 배우는 은성의 외상 장부를 손에 넣고 외상값으로 부자가 될 거란 생각을 했었지만 장부를 펼쳐보니 장부의 내역은 모두 암호로 되어 있었고. 그것으로 큰 깨달음을 얻었다고 전해진다.

이상철 제이민그룹 회장/ 칼럼니스트·시인·대지문학동인/ 한국HR서비스산업협회 회장(前)/국회 환노위 정책자문위원/ 국회의원 보좌관(대구)/ 쌍용그룹 홍보실 근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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