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라임경제] 세 시간 동안 유창하게 강의했는데, 돌아오는 길에 내가 무슨 말을 했는지 기억나지 않을 때가 있다. 준비한 내용은 빠짐없이 전달했고 시간도 정확히 맞췄다. 잘하기 위해 애썼고, 좋은 평가를 받기 위해 긴장했지만 진심이 없었던 날이 그렇다.
휘황찬란한 말은 넘쳐났지만 정작 그 강의실에 나는 없었다. 반면 진짜 내 마음을 다한 날도 있다. 그날은 '내가 무슨 말을 할까'보다 '이 말이 참가자에게 가닿고 있나'를 느끼며 말했다.
'아, 진짜 내 마음이 이렇구나'라고 스스로 느끼며 내 말에 내가 울컥하기도 했다. 내 말이 참가자 마음에 내려앉음을 같이 느꼈고, 참가자와 함께 호흡하며 영감을 나눴다. 이런 날은 8시간을 강의해도 힘이 안 들고 충만감이 차오른다.
고객상담도 다르지 않다. 실수를 줄이려 표준 매뉴얼과 FAQ를 촘촘히 짜고, 이제는 AI까지 동원해 문법적으로 흠잡을 데 없는 스크립트를 만든다.
그런데 스스로 한 말이 아니라 시키는 대로 영혼 없이 읊은 말이라면, 고객에게는 AI의 말과 다를 바 없다. 말이 매끄러울수록 고객은 오히려 더 갑갑하다.
"네, 그러셨군요. 불편하셨겠네요. 이제는 됩니다. 다른 궁금하신 사항 있으십니까?" 공감어를 썼는데 공감받은 느낌이 없고, 질문을 하는데 통화를 빨리 끝내고 싶어 하는 조급함만 전해진다.
책잡히지 않으려고 준비한 정답을 읊을수록 말은 사람을 떠나 '처리'가 된다. 스크립트는 우리를 보호하는 갑옷이지만, 그 갑옷이 두꺼워질수록 사람의 체온은 고객에게 닿지 않는다.
기계의 언어는 오차 없는 평균값의 언어다. 사람의 언어는 완벽하지 않아도 떨림이 있고, 행간에 머뭇거림이 묻어나며, 고객과 함께 호흡하는 '지금, 여기'의 언어다. 똑같은 "많이 불편하셨겠어요"라는 한마디도 어떤 날은 차가운 플라스틱 같고, 어떤 날은 고객의 마음을 진정시킨다.
그 차이는 내가 내 말을 들으며 말하느냐에 달려 있다. 강의 중 내 말에 내가 울컥했던 그날처럼, 말하는 동시에 그 말을 듣고 있을 때 말에 생명력이 생긴다.
들으며 말한다는 것은 세 가지다. 지금 입 밖으로 나가는 말을 스스로 느끼는 것, 그 말이 진심인지 순간순간 알아차리는 것, 그리고 진심이 아직 따라오지 못할 때는 조급함을 잠시 내려놓고 마음을 먼저 길어 올리는 것이다.
물론 살아 있는 말을 하라는 것이 막말을 거칠게 쏟아내거나 스크립트를 내던지라는 뜻은 결코 아니다. 정해진 문구라도 내가 들으며 말하면 살아나고, 아무리 유려한 문장도 나조차 듣지 않고 읊으면 기계의 말이 된다.
고객의 말을 듣는 귀와 내 말을 듣는 귀는 따로 있지 않다. 내 말을 흘려듣는 사람은 고객의 말도 흘려듣는다. 내가 형식적으로 해치우고 있는지 진심으로 말하고 있는지는 AI 모니터링이 잡아내지 못해도 내 귀는 안다. 그 귀를 깨우는 데서 시작하면 된다.
하루 수십 통의 콜을 '쳐내야' 하는 숨 가쁜 현장에서 어떻게 매번 마음을 챙기며 말할 수 있을까. 거창한 수양보다 짧은 틈 하나를 만들어 보자.
고객이 한 말 중 핵심 단어 하나를 천천히 되짚어 말해 보는 것이다. 기계적인 복창이 아니라, 그 단어가 내 입에서 나가는 소리를 내 귀로 들으며 1초쯤 호흡을 고르는 것이다. 그 짧은 틈이 형식적인 업무 처리에서 마음으로 돌아오는 문이 된다.
다만 이 1초는 상담사의 노력만으로 지켜지지 않는다. 측정할 수 있는 말만 측정하면, 결국 측정할 수 있는 껍데기만 남는다. 호응어 횟수와 필수 공감어를 몇 번 했는지 세는 데 머물면, 상담사는 1초를 쉬는 대신 체크리스트를 채우기에 급급해진다.
관리자와 조직이 지켜야 할 것은 공감어의 횟수가 아니라, 상담사가 자기 말을 스스로 들을 수 있는 1초의 여유다.
AI는 사람보다 매끄럽고 오차 없는 모범 답안을 실시간으로 쏟아낸다. 그러나 그 말이 AI 자신을 먼저 울리지는 않는다. 우리가 지켜야 할 인간지능의 본질은 막힘없는 유창함이 아니라 그 이상의 울림이다. 말하는 사람이 먼저 들은 말, 내 안을 먼저 울린 한마디가 고객의 마음에도 가닿는다.
지윤정 (윌토피아 대표/ 성신여대 외래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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