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 bad workman blames his tools.(서투른 일꾼이 연장 탓한다)
- 영국 속담 中-
시사위크=박설민 기자 사람은 어떤 작업이나 일이 안되면 본능적으로 ‘남 탓’을 한다. 물론 외부 환경에 의한 실패의 가능성도 분명 존재한다. 하지만 보통은 본인의 노력이나 실력, 준비 부족, 실수 등이 부진의 원인이다. 때문에 어느 일이든 성공을 위해선 일정 수준 이상의 노력은 분명히 필요하다.
하지만 ‘게임’에서는 조금 이야기가 다를 수 있다. 분명 게이머들 간 실력 차이는 있지만 ‘게이밍 장비’의 영향력도 무시할 수 없다. 최근 삼성전자, LG전자를 비롯한 국내외 주요 가전기업들이 게이머들의 ‘장비빨’을 채워주기 위한 제품 생산에 속도를 높이는 것도 이 같은 이유에서다.
◇ 100ms 줄이면 승부가 달라진다… 연구로 확인된 ‘게이밍 장비’ 중요성
거의 모든 게이머들은 장비 성능을 체감한다. 특히 0.1초 정도의 짧은 시간에 승부가 갈리는 1인칭 슈팅게임(FPS), AOS(Aeon of Strife) 등 장르에선 그 역할이 더욱 크다. 단 한번의 타격으로 캐릭터가 사망하거나 패배가 확정될 수 있어서다.
실제로 2026 아이치·나고야 아시안게임 e스포츠(종목: 리그오브레전드) 선수인 이상혁(페이커)의 반응속도는 106ms(0.106초) 수준인 것으로 알려졌다. 일반적인 PC모니터의 주사율은 60Hz다. 화면을 16.7ms마다 새로 그리는 것이다. 여기에 중앙처리장치(CPU), 그래픽카드(GPU), 마우스 및 키보드 입력 지연이 합쳐지면 106ms보다 반응이 느려지는 것은 순식간이다.
게이밍 장비 성능이 승패에 실제로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최신 연구 결과도 존재한다. 지난 4월 아일랜드 리머릭대와 엔비디아(NVIDIA) 연구진은 101명의 게이머들을 대상, 게이밍 모니터 주사율이 게임플레이에 미치는 영향을 연구했다. 실험 참가자는 일주일에 평균 17.7시간 이상 게임을 즐기는 게이머로 평균 나이는 21.5세다.
연구진은 ‘Alienware 25 1080p 360Hz 모니터’, GPU RTX 3070 Ti모델, Logitech Pro Wireless 마우스 등 평균적인 게이밍 PC·모니터 사양으로 실험을 진행했다. 실험 방식은 같은 모니터를 같은 모니터의 주사율을 각각 △60Hz △144Hz △360Hz로 설정한 후, 참가자들이 FPS게임에서 움직이는 녹색 표적을 조준 사격하는 것이다.
실험 결과, 모니터 주사율을 60Hz에서 144Hz 이상 변경했을 때 사격 정확도가 3% 이상 향상됐다. 표적 파괴 시간도 100ms 이상 단축됐다. 실제 게임 플레이에 게이밍 모니터 성능이 유의미한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사실을 증명한 것이다.
프로게이머처럼 실력이 우수한 게이머들의 경우 게이밍 장비 성능이 플레이에 더욱 큰 영향을 미쳤다. 엔비디아 연구진은 2019년 숙련된 e스포츠 선수 8명을 대상, 모니터와 PC, 마우스, 키보드 등 전체 시스템 지연이 플레이에 미치는 실험을 진행했다.
실험은 모니터 주사율 60~360Hz 변화, 시스템 지연 조건에서 FPS게임 플레이 관찰로 진행됐다. 이때 시스템 지연은 △낮음(약 22~25ms) △중간(약 52~58ms) △높음(약 82~91ms)의 3단계로 구성됐으며, 각 단계마다 30ms씩 지연 시간을 늘렸다.
실험 결과, 저지연과 고지연 조건 사이서 임무 완료 시간 차이가 대략 0.5~1초 안팎까지 벌어졌다. 특히 움직임이 복잡한 표적을 따라가는 ‘추적(Track)’ 과제에선 수십ms의 장비 지연 차이가 실제 수행시간에서 수백 ms에서 최대 초 단위 차이로 확대됐다.
윤병집 HP 게이밍 PC 카테고리 매니저는 ‘시사위크’와의 통화에서 “게임에서 승패를 가르는 것은 단순히 게이머의 실력만이 아니다”라며 “PC의 처리 성능은 물론 모니터의 주사율과 응답속도, 키보드와 마우스의 입력 정확도, 헤드셋의 사운드 품질까지 모든 요소가 게이밍 경험과 경기력에 영향을 미친다”고 설명했다.
◇ 2030년 34조원 시장… 절반 이상 차지할 ‘게이밍 모니터’
이처럼 게이머들에게 ‘장비빨’은 허상이 아니다. 실제 플레이 승패에 큰 영향을 미치는 만큼, 이에 대한 수요도 증가하는 추세다. 글로벌 시장조사업체 ‘옴디아(Omdia)’에 따르면 게이밍 기기 및 액세서리 시장 규모는 2030년 250억달러(약 34조원) 규모에 이를 전망이다. 여기엔 게이밍 모니터, 게임패드, 헤드셋, 키보드, 마우스 등이 포함된다.
관련 시장이 빠르게 성장하는 부분은 단연 게이밍 모니터다. 옴디아에 따르면 지난해 기준 게이밍 기기 시장 매출의 49%가 게이밍 모니터였다. 2030년에는 이보다 비중이 증가, 50%를 넘어설 것으로 예상됐다. 물량 증가도 가파른 추세다. 지난해 기준 게이밍 모니터 출하량은 4,100만대로 전년 대비 50.2% 증가했다.
특히 고성능 ‘OLED’ 기반 게이밍 모니터 수요 증가폭이 가장 크다. 대만 IT시장조사업체 ‘트렌드포스(Trendforce)’는 지난해 OLED 모니터 출하량이 전년 대비 92% 증가한 273만5,000만대로 추정했다. 그러면서 고주사율과 빠른 응답속도를 원하는 게이밍 수요를 핵심 성장 동력으로 꼽았다.
최근 삼성전자, LG전자를 비롯한 국내외 주요 가전기업들도 게이밍 시장 성장에 맞춰 관련 제품 출시 및 연구에 속도를 내고 있다. 삼성전자의 경우 지난 8월 독일에서 개최된 ‘게임스컴 2026(Gamescom 2026)’에서 세계 최초 기술을 탑재한 ‘2027년형 오디세이(Odyssey) 게이밍 모니터’ 4종을 공개했다. 이 중 ‘오디세이 OLED G9’는 세계 최초 360Hz 주사율을 지원, 게이밍 성능을 대폭 강화시켰다.
LG전자 역시 8월 차세대 게이밍 모니터 ‘LG 울트라기어(LG UltraGear) 25G590B’를 공개, 삼성전자와 시장 경쟁에 불을 붙였다. LG전자는 세계 최초로 FHD 해상도에서 1,000Hz 초고주사율을 기본 지원하는 ‘네이티브(Native) 1000Hz’를 구현했다.
완성 제품뿐만 아니라 게이밍 모니터의 핵심인 ‘디스플레이’와 관련, 삼성과 LG의 경쟁도 이어지고 있다. 특히 LG디스플레이는 실제 기술 연구에 집중하는 모양새다. 지난 5월 게이밍 모니터 관련 연구를 국제학술지에 발표했다. 성인 일반 게이머 31명을 대상, 60Hz·240Hz·360Hz·480Hz 모니터를 무작위로 경험하게 하는 블라인드 테스트 연구다.
해당 연구에 따르면 480Hz 환경에서 표적을 정확하게 맞힌 ‘히트 스코어’는 60Hz 대비 38% 높았다. 240Hz와 비교해도 10% 향상됐다. 주사율이 높아질수록 입력 지연시간도 감소해 480Hz에서는 60Hz 대비 10ms 이상 줄어든 것으로 나타났다. LG디스플레이는 이를 근거로 높은 주사율이 빠르게 움직이는 표적의 식별과 추적, 반응 정확도를 높일 수 있다고 분석했다.
삼성디스플레이는 글로벌 PC·게이밍 하드웨어 기업 ‘HP’과의 협력을 통해 게이밍 디스플레이 시장 영향력을 확대 중이다. 올해 1월 개최된 ‘CES 2026’서 HP는 ‘HyperX OMEN OLED 34’ 게이밍 모니터를 공개했다. 해당 제품에는 삼성디스플레이가 제작한 ‘34형 360Hz V-Stripe QD-OLED 패널’이 탑재된 것으로 알려졌다.
윤병집 매니저는 “HP는 OMEN 게이밍 PC와 HyperX 게이밍 기어, OMEN Gaming Hub를 통해 게이머들이 최상의 퍼포먼스를 발휘할 수 있는 통합 게이밍 경험을 제공하는 데 집중하고 있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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