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위크|마곡=이민지 기자 “돌봄 국가책임제의 성패는 새로운 사업의 이름이나 숫자로 결정되지 않을 것입니다. 부모가 병원에 갈 수 있게 되었는지, 일을 포기하지 않아도 되는지, 발달장애인이 지역사회에서 원하는 삶을 이어갈 수 있는지 그리고 ‘내가 죽으면 이 아이는 어떻게 하나’라는 질문에 국가가 구체적으로 답해 가족의 일상에서 체감하는 변화로 이어져야 합니다.”
지난 9월 30일 서울 강서구 마곡동 코엑스 마곡에서 ‘2026 전국장애인부모연대 정책대회’가 열려 전국 각자의 발달장애인 자녀를 둔 부모들이 한자리에 모였다. 이날 현장은 오랜 시간 목소리를 내어 ‘발달장애인 돌봄 국가책임제’를 이끌어낸 발달장애인 부모들의 노고를 격려하고, 그 결실을 함께 기뻐하는 축제의 분위기가 감돌았다. 이와 함께 정부가 내놓은 대책이 선언에 그치지 않고 실제 발달장애인과 가족의 삶을 변화시킬 수 있을지에 대한 우려의 목소리가 교차했다.
앞서 지난 10일 정부는 ‘발달장애인 돌봄 국가책임제 추진방안’을 발표했다. 중증 자폐 아들을 홀로 키우다 세상을 떠난 ‘안녕, 피터팬’의 저자 고(故) 전경철 작가의 사연을 계기로 발달장애인 가족이 짊어진 돌봄의 무게에 대한 사회적 관심도가 높아진 가운데, 정부가 그동안 가족에게 집중돼 있던 돌봄의 책임을 국가와 지역사회가 함께 나누겠다는 의지를 밝힌 것이다.
사실 발달장애인의 삶과 돌봄을 더 이상 개인과 가족의 책임으로 남겨둬서는 안 된다는 부모들의 요구는 오래전부터 이어져 왔다. 2018년에는 발달장애인 부모 등 209명이 집단 삭발에 나섰고, 2022년에는 555명이 삭발투쟁을 벌이며 ‘발달장애 국가책임제’ 도입을 촉구했다.
그런 점에서 이번 ‘발달장애인 돌봄 국가책임제 추진방안’은 지난 8년 간 발달장애인 자녀를 둔 부모들이 흘린 피와 땀, 눈물이 맺은 결실인 셈이다.
이날 현장에 참석한 조정식 국회의장은 “‘발달장애인의 삶을 가족의 몫으로만 남겨둘 것인가, 국가와 사회가 함께 책임질 것인가’는 오랜 시간 여러분께서 우리 사회에 던져온 질문”이라며 “‘발달장애인 돌봄 국가책임제 추진방안’은 오랫동안 이 자리에 계신 여러분이 눈물로 호소하고 행동으로 요구해온 국가책임이 구체적인 정책으로 제시됐다는 점에서 매우 중대한 변화이자 여러분이 일궈낸 소중한 결실”이라고 말했다.
이어 “현장의 요구가 법과 제도로 이어지고 충분한 예산과 집행력을 갖출 수 있도록 국회도 적극적으로 뒷받침하겠다”고 약속했다.
이 밖에도 남인순 국회 부의장을 비롯해 박홍근 기획예산처 장관, 서미화‧박주민‧고민정‧이정헌 더불어민주당 의원, 최보윤 국민의힘 의원 등이 참석해 발달장애인 부모들의 노고를 격려하고 국가책임제의 안정적인 정착을 위한 지원 의지를 밝혔다.
◇ 암 치료 미루며 버티는 부모들… 발달장애인 돌봄 국가책임제 ‘안착 속도’ 관건
‘발달장애인 돌봄 국가책임제 추진방안’은 발달장애인이 보통의 일상을 누릴 수 있는 지역사회 지원체계 구축을 목표로 한다. 이를 위해 △생애주기에 따른 맞춤형 돌봄 강화 △일상 속 자립과 사회참여 확대 △지역사회 중심의 촘촘한 지원체계 구축 등 3대 전략을 중심으로 11대 추진 과제와 50개 세부과제를 담았다.
우선 주간활동서비스 대상자를 현재 1만5,000명에서 2027년 2만명, 2030년 3만명까지 단계적으로 늘려 대기수요 해소에 나선다. 갑작스러운 보호자의 부재 등에 대응하기 위한 최중증 긴급돌봄 제공기관도 현재 2개소에서 내년 5개소로 확대한다.
야간 돌봄이 필요한 최중증 발달장애인에 대한 지원도 강화한다. 가정 내 보호가 어려운 최중증 발달장애인을 대상으로 24시간 개별 1대1 지원 서비스를 우선 확대하고, 현재 평일에만 운영되는 해당 서비스를 주말까지 이용할 수 있도록 지원 범위를 넓힌다.
발달장애인의 자립과 사회참여를 뒷받침하기 위한 고용 지원도 확대한다. 장애 특성을 고려한 재직자 훈련 지원 대상을 2026년 400명에서 2027년 720명으로 늘리고, 중증장애인 근로지원인도 현재 1만1,700명에서 2027년 1만2,200명으로 확충할 계획이다.
발달장애인 자녀를 둔 부모들은 국가가 돌봄의 책임을 공식적으로 인정하고 구체적인 대책을 내놓았다는 점에서는 의미 있는 진전이라고 평가했다. 다만 정책이 안착하기까지의 공백을 최소화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목소리를 냈다.
강정배 전국장애인부모연대 사무총장은 “발달장애인 돌봄 국가책임제를 통해 돌봄에 국가적 책임이 있고 정부가 그 책임을 지겠다는 의지를 밝혔기 때문에 정책적으로는 확실한 진전이라고 본다”면서도 “약 6년을 제도의 안착기로 본다면 그 사이 발생하는 많은 상황에 어떻게 대응할 것인지 고민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어 “현재 회원들 가운데 자신의 암 치료를 늦춰가면서까지 자녀를 돌보고 있는 분들이 있다”며 “그들에게 6년이라는 시간은 너무 길다. 제도가 안착하기까지의 기간을 어떻게 메워나갈 것인지 역시 현장의 중요한 과제라고 생각한다”고 강조했다.
정책이 서류에만 머물지 않고 발달장애인 당사자의 실질적인 삶의 변화로 이어져야 한다는 목소리도 나왔다.
서은경 전국장애인가족지원센터협의회 회장은 “국가책임제의 성과를 ‘얼마나 많은 사업을 만들었는가’가 아니라 ‘당사자와 가족의 삶이 얼마나 달라졌는가’로 평가해야 한다”며 “사업량이 늘어났다고 해서 실제 돌봄의 공백이 사라졌다고 단정할 수 없다. 신청할 자격은 있지만 이용할 기관이 없거나, 서비스 시간이 가족의 현실과 맞지 않거나, 최중증이라는 이유로 현장에서 이용이 거절된다면 제도는 서류에만 존재하게 된다”고 지적했다.
특히 위기가 발생한 이후 개입하는 방식에서 벗어나 일상 속 돌봄 공백을 사전에 메울 수 있는 체계가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서 회장은 “현재 긴급돌봄은 보호자의 입원이나 경조사와 같이 이미 위기가 발생한 상황을 중심으로 설계돼 있다”며 “하지만 가족에게는 병원 진료나 비장애 자녀의 행사, 휴식, 직장생활처럼 일상에서 반복되는 돌봄 공백도 절박하다”고 말했다.
이어 “부모가 완전히 소진된 뒤에야 작동하는 제도가 아니라 소진되기 전에 이용할 수 있는 제도로 정착될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민용순 전국장애인일자리협의회 회장 역시 국가책임제가 실질적인 변화를 만들어내기 위해서는 정책과 현장의 간극을 좁혀야 한다고 목소리를 냈다.
민 회장은 “과거에는 가족이 책임지고 국가가 서비스를 지원했다면, 이제는 국가가 책임지고 지역사회가 함께 지원해야 한다. 단순한 서비스 확대가 아니라 책임 구조의 변화가 이뤄져야 한다”며 “제도가 있다는 것과 내가 실제로 이용할 수 있다는 것은 다르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현재는 지역별 서비스 격차가 존재하고 기관 간 지원체계가 분절돼 있으며, 당사자의 선택권도 부족하다. 부모가 직접 서비스를 찾아다녀야만 이용할 수 있는 현실도 여전하다”고 지적했다.
끝으로 민 회장은 “국가책임제의 완성은 ‘정책의 숫자’가 아니라 ‘달라진 삶’으로 증명돼야 한다”며 “정부는 책임과 실행수단을 보장하고, 현장은 구체적인 실행모델을 제안하며, 당사자는 자신의 삶을 스스로 결정할 수 있어야 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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