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재필 ‘에세이’] H에게-가슴을 거쳐 발까지 가는 공부

시사위크
김재필(미 델라웨어대학 사회학 박사)
김재필(미 델라웨어대학 사회학 박사)

한글을 늦게 배웠네. 초등학교에 들어가기 전까지는 내 이름도 쓸 줄 몰랐어. 비료 부대 외에는 종이 보기가 힘든 농촌에서 유아기를 보냈으니 그럴 수밖에. 부모님도 농사일에 바빴기 때문에 자식들 조기 교육에는 전혀 관심이 없었지. 어쩌면 그게 나에게는 큰 행운이었는지도 몰라. 사시사철, 넓은 들판과 영산강 모래밭에 나가 실컷 뛰놀 수 있었으니까. 덕분에 책과 공부에 대한 반감이 생기지 않아서 일흔 살이 넘은 나이에도 눈만 뜨면 책을 찾고, 매우 즐겁게 공부하고 있는 것 같거든. 도시에서 50년 이상 살았어도 자연을 사랑하는 생태 감수성을 간직하고 있는 것도 다 그렇게 지낸 유년기 덕분이라고 생각해.

초등학교에 다닐 때도 책을 많이 읽지 않았네. 당시에는 교과서 이외에 읽을 만한 책이 많지 않았어. 동화책 한 권 읽지 않고 초등교육 과정을 마쳤으니 아쉽기는 하지. 초등학교 4학년 때 대처로 전학을 한 후에는 자주 동네 만화방에 드나들기 시작했네. 그렇게 많은 책을 거기서 처음 봤어. 주로 야구 관련 만화를 찾아서 읽었지. 마구(魔球)를 던지는 투수가 있다는 걸 그때 알았네. 중학생이 되어 만화방에서 많이 빌려 읽은 건 무협지야. 뻔한 줄거리였지만 얼마나 재미있었는지… 요즘 게임에 중독된 애들처럼 만화방에 무협지 신간이 들어오면 바로 빌려다가 읽었어. 밤에 잠 한숨 자지 않고 서너 권을 읽던 날도 있었지.

본격적인 책 읽기는 군대에 있을 때 시작했네. 강원도 인제의 깊은 산골에서 암호병으로 복무했기 때문에 혼자 있는 시간이 많았지. 책을 읽지 않으면 할 일이 없었어. 거의 매주 인제읍에 외출 나가 문고본 책들을 사서 작은 암호실 골방에 쌓아놓고 읽었지. 대부분 소설책과 시집이었어. 중고등학교 때 읽지 못한 소설들을 다 읽었어. 시를 좋아하게 된 것도 그때부터야. 두꺼운 벽돌 책 성경을 사서 구약 창세기부터 신약 요한계시록까지 밑줄 그어가며 세 번 완독했던 것도 군 복무할 때야. 내 손때가 묻은(well-thumbed) 그 성경책은 지금도 잘 보관하고 있네.

이번 추석 연휴에도 여느 날과 다름없이 책만 읽고 지냈네. 자식들과 손자·손녀들이 다녀갔지만 오래 붙잡지 않았어. 소식(小食)하고 술도 마시지 않은 후로는 애들과 함께 있는 시간이 마냥 편한 것만은 아니야. 그래서 식사할 때만 함께하고 나머지 시간은 서재에 내려가 책과 놀았어. 비록 반지하이지만 수천 권의 책이 있는 서재가 꽤 아늑하거든.

10여 년 전부터 노년을 즐기기 위해 다양한 장르의 책들을 읽기 시작했네.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하면 할수록 즐거운 게 공부’라는 걸 알게 되었지. 내가 읽는 책에는 돈을 버는 데 도움을 주는 건 하나도 없네. 그냥 내가 좋아서 읽는 책들이야. 노자와 장자, 불교와 동학, 꽃과 나무, 시와 소설, 소동파와 이덕무, 물리학과 천문학을 포함한 자연과학 등등 분야가 매우 넓고 다양해. 요즘은 사진 찍으러 밖에 나갈 때가 아니면 집에서 책만 붙들고 있을 때가 많아. 덕분에 젊었을 때보다 훨씬 더 마음이 평온해진 것 같아서 좋아. 세속적인 욕심이 다 사라져 버렸거든.

순전히 즐겁게 살려고 책을 읽기(Reading for pleasure) 시작했지만, 다양한 분야의 책을 읽다 보니 나도 모르게 내가 변해버렸네. 지난 편지에서 말했던 것처럼 노년을 쉽게 살 수 없게 된 거야. 인류의 미래를 위협하는 기후 재앙과 기술적 특이점(Singularity)에 다가선 인공지능을 두 눈으로 보면서도 쉽게 살 수 있다는 게 더 이상한 것 아닐까?

쇠귀 신영복 선생은 공부를 머리에서 가슴을 거쳐 발로 가는 ‘가장 먼 여행’이라고 말했네. 대한민국은 세계에서 대학 진학률이 가장 높은 나라이니 머리로 공부하는 사람은 매우 많아. 하지만 가슴을 거쳐 발로까지 가는 공부를 하는 사람은 드물어. 대부분 머리 공부로 끝나고 말지. 그래서 지식인들마저 말과 행동은 점점 더 거칠어지고, 공감 능력과 부끄러움을 잃어버렸지. 공부해서 알게 된 것을 직접 실천하면서 사는 사람을 보기 힘든 세상이야.

남은 세월 신영복 선생 말대로 자신과 세계를 동시에 변화시키는 공부를 계속할 걸세. 책을 통해서 일신우일신(日新又日新)하고, 아는 것을 조금이라도 실천하면서 살고 싶네. 이런 말을 하니 신천옹(信天翁) 선생이 저 멀리서 웃고 있구먼.

“가난으로 반 꾸러미의 엽전도 모으지 못하는 처지에 굶주림에 시달리는 세상 사람들을 구하려 하고, 어리석고 둔해 단 한 권의 책도 다 통해 깨닫지 못하는 주제에 세상 모든 서책을 다 보려고 한다. 진실로 탁 트인 사람이거나 아니면 아주 어리석은 자라고 하겠다. 아아, 이덕무야! 이덕무야! 네가 바로 그렇지 않느냐.” (이덕무, 『선귤당농소』)

꼭 나에게 하는 말 같아서 나도 따라 웃고 있네. 지금까지 그럴듯한 말은 자주 하면서도 행동은 따라가지 못했던 사람 중 하나가 나였거든. 그러니 다시 자문할 수밖에. 이런 내가 ‘탁 트인 사람’일까? 아니면 ‘아주 어리석은 자’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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