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마이데일리 = 심지원 기자] 삼성전기가 단일 제품 기준 역대 최대 규모인 4조원대 패키지기판(FC-BGA) 시설투자에 나서며 인공지능(AI) 반도체용 고부가 기판 시장 공략을 본격화한다. 적층세라믹콘덴서(MLCC)를 중심으로 안정적인 수익 기반을 확보한 가운데 FC-BGA를 차세대 성장동력으로 키워 사업 포트폴리오를 다변화하겠다는 전략이다.
29일 전자공시시스템에 따르면 삼성전기는 세종사업장 FC-BGA 생산라인 증설에 4조2700억원을 투자하기로 결정했다. 투자액은 삼성전기의 지난해 말 연결 기준 자기자본 9조7973억원의 43.6%에 해당한다. 투자는 이달부터 2028년 5월까지 진행되며 신규 라인은 2028년 9월부터 양산에 들어갈 예정이다.
삼성전기 베트남 생산법인도 패키지기판 생산시설 증설에 2조5100억원을 투자한다. 투자 완료 시점은 2028년 4월 말이며, 투자액은 베트남 법인의 지난해 말 자산총액의 103.4%에 해당한다.
이번 투자 배경에는 AI 반도체의 대형화가 자리 잡고 있다. AI 가속기가 GPU와 고대역폭메모리(HBM)를 함께 탑재하는 멀티칩 패키지로 진화하면서, 이를 떠받치는 FC-BGA도 대면적·고다층화하는 추세다. FC-BGA는 반도체 칩을 얹어 메인보드와 연결하는 패키지기판으로, 칩과 메인보드 사이에서 전기 신호를 전달하고 전력을 공급한다.
문제는 기판이 클수록 만들기 어렵다는 점이다. 한 패키지에 얹는 칩이 늘수록 연결해야 할 신호선과 전력선이 많아지고, 이를 담으려면 기판이 넓어지고 회로층이 늘어야 한다. 업계에서는 AI 가속기용 기판이 한 변 55~70mm 이상, 20층 이상으로 커지고 있는 것으로 본다.
특히 미세한 결함 하나에도 기판 전체를 폐기해야 해 수율 부담이 커지고 공정 시간도 길어진다. 이런 하이엔드 기판을 안정적으로 양산할 수 있는 업체는 손에 꼽힌다. 그 결과 수요가 공급을 앞지르는 병목이 생겼고, 삼성전기는 이 공급 부족(쇼티지)을 겨냥해 증설에 나섰다. 장덕현 삼성전기 사장도 올해 3월 정기 주주총회에서 서버·데이터센터용 FC-BGA 수요가 현재 생산능력보다 50% 이상 많다고 밝힌 바 있다.
이처럼 기판 수요가 공급을 웃도는 시장 상황과 더불어 고객사의 투자 지원도 투자 배경의 주요 원인으로 꼽힌다. 삼성전기는 이번 세종 투자가 글로벌 빅테크와의 중장기 협력을 기반으로 추진된다고 설명했다. 고객사가 투자금 일부를 지원하는 동시에 중장기 물량을 보장하는 구조다. 키움증권은 증설 비용의 상당 부분을 고객사 지원금과 장기공급계약(LTA)을 통해 충당할 수 있어 별도의 자금조달 필요성은 크지 않을 것으로 분석했다.
AI 가속기용 기판이 대면적·고다층화하면서 수율 부담이 커지고, 이에 따라 글로벌 기판 업체들의 생산능력 확대에도 제약이 따르는 상황이다. 삼성전기는 이 같은 시장 환경에서 고객사와 투자 부담을 나누면서 고사양 FC-BGA 생산능력 확대에 나선 것으로 풀이된다. 수요가 공급을 웃도는 시장에서 고객사와의 장기 협력을 기반으로 증설 효과를 극대화하겠다는 방침이다.
삼성전기의 글로벌 고객 기반도 대규모 증설의 배경으로 꼽힌다. 올해 삼성전기 반기보고서에 따르면 전체 매출의 97.0%인 6조4649억원이 수출에서 발생할 정도로 해외 매출 비중이 높다. 글로벌 고객사를 중심으로 안정적인 수요 기반을 확보하고 있는 만큼, 고부가 FC-BGA 시장 확대에 대응하기 위한 생산능력 확대에 나선 것으로 풀이된다. 또 현재 AI 서버·가속기용 고성능 FC-BGA 시장에서는 일본 이비덴과 신코전기, 대만 유니마이크론 등이 주요 업체로 꼽힌다. 삼성전기는 이번 대규모 투자를 통해 고사양 FC-BGA 생산능력을 확대하고 글로벌 선두 업체들과의 경쟁력을 높일 것으로 전망된다.

이 같은 대규모 투자를 뒷받침하는 것은 MLCC를 중심으로 한 컴포넌트 사업이다. 올해 상반기 컴포넌트 부문 매출은 3조579억원으로 전체 매출의 45.9%를 차지했다. 전체 설비투자비용 6828억원 가운데서도 76.3%인 5208억원이 컴포넌트 부문에 투입됐다. 안정적인 실적 기반을 갖춘 MLCC 사업이 회사의 수익성을 지탱하고 있는 셈이다.
MLCC 수요 확대는 신규 수주로도 이어지고 있다. 삼성전기는 지난 1일 글로벌 대형 기업과 1조722억원 규모의 AI 서버용 MLCC 공급계약을 체결했다고 공시했다. 단일 MLCC 공급계약으로는 역대 최대 규모로, 계약기간은 내년까지다. 지난해 5월 이후 실리콘 커패시터와 AI 서버용 MLCC 관련 장기공급계약(LTA) 규모는 누적 3조3200억원에 달한다. 이 가운데 실리콘 커패시터 수주액만 1조5570억원이다.
MLCC 사업에서 확보한 기반은 FC-BGA를 비롯한 신규 성장동력에 대한 투자로 이어지고 있다. 현재 패키지솔루션 부문 매출은 1조4966억원으로 전체의 22.4% 수준이다. 세종사업장 신규 FC-BGA 라인이 2028년 가동에 들어가면 생산능력이 확대되면서 패키지솔루션 부문의 매출 성장 기반도 강화될 것으로 관측된다.
삼성전기는 연구개발(R&D)도 확대하고 있다. 올해 반기 기준 R&D 비용은 4741억원으로 매출의 7.1%를 차지했다. 생산능력 확대와 함께 고사양 제품 중심의 기술 경쟁력을 강화해 AI 반도체용 기판 시장에서 입지를 확대하겠다는 것으로 보인다.
다만 자기자본의 40%를 웃도는 대규모 투자가 2028년까지 집중되는 만큼 연간 자본적지출(CAPEX) 부담 확대는 과제로 남는다. 반기 기준 6800억원 수준이던 설비투자가 연간 2조원 이상으로 늘어나는 만큼 투자 재원을 안정적으로 확보하면서 영업현금흐름을 유지하는 것이 향후 재무건전성의 주요 변수로 작용할 전망이다.
수율 안정화까지 걸리는 시간도 변수다. 업계에서는 대면적·고다층 FC-BGA의 경우 신규 설비가 본격적인 양산 수율을 확보하기까지 수년이 소요될 수 있다고 본다. 세종 신규 라인은 2028년 9월부터 양산에 들어가는 만큼 증설 효과가 매출에 본격 반영되기까지는 시차가 불가피하다. 금·구리 등 원자재 가격 변동에 따른 원가 부담도 수익성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 증설 이후 신규 라인이 가동된 이후 대면적·고다층 제품에서 안정적인 수율을 확보할 수 있느냐에 향후 승패가 달릴 전망이다.
장덕현 사장은 “AI와 고성능 컴퓨팅 시장이 빠르게 성장하면서 고부가 반도체 기판은 반도체 성능과 공급망 안정성을 좌우하는 핵심 부품으로 중요성이 커지고 있다”며 “삼성전기는 차별화된 기판 기술력과 안정적인 공급 역량을 바탕으로 AI·서버·전장 등 고성장 시장에서 FC-BGA 사업 경쟁력을 강화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한편 증권가에서는 이번 증설을 반영해 3분기 실적 전망치를 높이고 있다. 하나증권은 삼성전기의 3분기 영업이익을 6615억원, KB증권은 6601억원으로 전망했으며 시장 컨센서스는 6000억원 안팎이다. 하나증권은 이번 증설을 통해 삼성전기가 3~5년치 수주 물량을 확보한 것으로 평가하며 매수 의견과 목표주가 300만원을 유지했다.
삼성전기 역시 지난 2분기 실적 콘퍼런스콜에서 3분기 타이트한 수급과 LTA 확대, 평균판매가격(ASP) 상승 효과를 바탕으로 역대 최대 실적을 달성할 것으로 전망했다. 앞서 삼성전기의 2분기 영업이익은 4404억원으로 2021년 3분기 이후 가장 높은 수준을 기록한 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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