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은 빠르게 경제 성장을 이뤘다. 숨 돌릴 틈도 없이 바쁘게 달려온 끝에 선진국 대열에 들어섰다. 다만 초고속성장은 우리 사회에 과실만을 안겨주지 않았다. 과도한 수도권 집중과 지역 간 불균형을 초래해 한국 사회를 병들게 한 원인이 됐다. 전국 지역 곳곳이 저마다의 문제로 시름하고 있는 현재, 우리는 어디서부터 해법을 찾아가야 할까. [편집자주]
시사위크=이미정 기자 전북 전주는 조선시대 ‘출판문화 도시’로 명성을 떨쳤던 지역이다. 전라감영이 자리했던 전주에선 고품질 한지와 목판 인쇄 기술이 발달하면서 출판·기록문화가 꽃을 피웠다. 당시 전주에서 간행된 목판본 책은 ‘완판본(完板本)’이라 불렸다. 이러한 역사를 가진 영향일까. 전주는 ‘책 문화’ 활성화에 열성적인 도시다. 인구감소위기가 대두된 가운데 전주는 도서관과 책을 매개로 사람을 끌어모으고, 지역 활성화의 해법을 찾아가고 있다. 특히 이달로 시행 만 5주년을 맞은 ‘전주도서관여행’은 지역에 새로운 활력을 불어넣고 있다.
◇ ‘여행자’를 환영하는 전주도서관… 특화 도서관 곳곳에
전주역에서 도보 7분 거리에 자리한 첫마중길엔 빨간색 컨테이너로 조성된 건물이 있다. 바로 2021년 4월 개관한 ‘첫마중길여행자도서관’이다. 빨간 컨테이너 2개 동으로 나눠진 이 도서관은 여행과 예술을 주제로 한 특화도서관이다. 시중에서 찾아보기 어려운 예술 관련 도서와 아트북, 전주 여행과 관련한 서적으로 서가가 꾸며져 있다. 이 도서관은 전주를 찾는 여행자들의 라운지이자 독서문화 쉼터 공간으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전주는 인구수(62만명) 대비 도서관 인프라가 풍부한 도시다. 전주시에 따르면 7월 기준 △시립도서관 13개 △직영 특성화도서관 13개 △공립 작은도서관 26개 △사립 작은도서관 95개 등 총 147개가 운영되고 있다.
이 가운데 여행·시·전통문화·예술·자연·음악·창작 등의 다양한 특화도서관이 존재한다. 전주시는 ‘책이 삶이 되는 책의 도시’라는 비전 아래, 최근 몇 년간 도서관 공간 혁신을 적극적으로 꾀해왔다. 도서관을 단순한 책 대출이나 열람실 공간을 아닌, ‘지역 문화거점’이자 ‘인문관광’ 자원으로 육성하기 위한 일환이다. 이에 기존 도서관을 복합문화공간으로 재단장하거나 다양한 테마를 갖춘 특화도서관들이 속속 들어섰다.
2019년 12월엔 트윈세대(12~16세) 전용 공간을 갖춘 개방형 복합문화공간인 전주시립도서관 ‘꽃심’이 개관했다. 이어 △시청 로비에 들어선 열린도서관(책기둥) △숲속에 자리한 시집특화도서관(학산숲속시집) △예술가 마을에 들어선 예술특화도서관(서학예술마을) △헌책특화도서관(동문헌책) △한옥마을도서관 △덕진공원에 자리한 한옥도서관(연화정) 등 특성화 도서관이 줄줄이 문을 열었다.
전주 대표 시립도서관인 완산도서관은 리모델링을 거쳐 2024년 7월 책·예술·미디어가 함께하는 복합문화공간으로 재탄생했다. 완산도서관 ‘자작자작 책 공작소’에 입주작가 집필실과 강의실, 출판체험실 등이 조성돼 있다. 여기에 지난해 개관한 ‘아중호수도서관’은 호숫가 수변로에 들어선 음악특화도서관으로 감성문화 명소로 부상했다.
◇ 전주 ‘도서관 여행’… 인문관광에 새로운 모델 제시
전주시는 이러한 도서관 자원을 엮어 ‘도서관 여행’을 전국 최초로 시행하고 있는 지자체다. 2021년 7월 첫선을 보인 ‘전주 도서관 여행’은 전용 버스를 타고 도서관해설사의 설명을 들으며 지역 내 특색 있는 도서관과 문화공간을 코스별로 탐방하는 프로그램이다. 초기엔 도서관만을 테마로 한 코스를 운영했다가 점차 지역 내 문화공간도 연계하고 있다. 올해는 9개 코스로 매주 토요일 3회(하루코스 1회·반일코스 2회) 상시 운영되고 있으며, 지역 서점과 정원(덕진공원)을 연결한 코스가 신설됐다.
이달로 시행 만 5주년을 맞은 도서관 여행은 매년 참가자가 늘고 있다. 매월 초 일정 인원(회당 17명)의 신청을 받고 있는데, 인기 코스는 빠르게 매진된다는 전언이다. 전주시 도서관산업과에 따르면 2021년 7월부터 올해 5월 말까지 상시 프로그램 누적 기준으로 7,126명(539회)이 도서관여행을 다녀갔다. 기관 대상 도서관여행, 특수학급 대상 책누리도서관여행, 2박3일 워케이션 및 1박2일 전주서 스테이 등 체류형 프로그램까지 포함할 경우, 총 참여자는 1만1,709명(838회)으로 집계됐다.
◇ 지역 서점·문화공간 코스 신설… 지역경제 선순환 효과 기대
전주시 도서관산업과 관계자는 “현재 상시 프로그램 여행 외에도 기관, 특수학급 대상 책누리도서관여행, 2박3일 워케이션, 1박2일 전주서 스테이 등 체류형 도서관 여행 등으로 운영 방법을 다각화해 여행 참여자의 특성에 맞는 맞춤형 여행을 제공하고 N차 여행 방문을 유도하고자 있다”며 “전주의 책방, 문화공간, 전주정원 등과 코스를 연계 운영하며 도서관뿐만 아니라 전주의 다양한 문화 콘텐츠를 함께 만나볼 수 있도록 하고 있다”고 전했다.
독창적인 도서관 공간을 깊이 있는 해설과 함께 경험하고, 책 읽기, 음악 감상, 뷰 감상, 로컬 문화 체험을 동시에 즐길 수 있는 점은 전주 도서관 여행의 매력도를 높이고 있다. 여기에 지역의 기록문화와 출판, 책 문화도 자연스럽게 접할 수 있는 점도 차별점이다.
도서관 여행 시범사업 첫해부터 ‘도서관해설사’로 활동하고 있다는 전선영 씨는 ‘시사위크’와의 전화인터뷰를 통해 “전주 도서관 여행에 오신 분들은 ‘새로운 전주’를 발견한 기분이라는 말씀을 많이 한다”며 “다른 지역에서 오신 분들도 ‘전주의 매력을 새롭게 알게 됐’며 ‘이사 오고 싶다’는 말도 했다. 지역 주민들은 자부심을 느끼고 간다. ‘좋은 도시에 살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고 말하는 분도 많았다”고 전했다.
‘도서관해설사’는 단순히 도서관과 프로그램을 설명하는 역할만 맡지 않다. 지역 내 독서 및 창작 지원 생태계, 책방, 책 축제 등 책 문화 전반을 소개하면서 지역의 매력을 알리는 매개체 역할을 한다.
전선영 씨는 “전주는 인구 대비 도서관이 많고, 다양한 책 행사를 접할 수 있는 도시”라며 “시민들을 위한 독서 지원 정책도 풍부하다. 도서관은 지역의 책문화 생태계의 순환을 돕는 고리 역할을 하고 있다. 지역 책방과 상생해 북큐레이션, 문화행사를 기획하기도 하고, 서적 구입 지원 정책도 진행 중이다. 그리고 이번엔 상시 여행프로그램 코스에 지역서점이 처음으로 포함됐다”고 설명했다.
◇ 도서관 여행, ‘책의도시’ 전주 알리는 연결고리
실제로 전주는 굵직한 책 축제 행사가 많은 지역이다. 전주독서대전, 전주국제그림책도서전, 전주책쾌 등이 대표적이다. 출판사, 창작자, 지역 서점, 시민들이 어울어지면서 함께 만들어가는 각각의 책 축제에는 매년 수만명의 방문객이 찾고 있다. 이달 열린 독립출판 북페어 행사인 전주책쾌도 전년보다 규모를 키우면서 성황리에 개최됐다.
여기에 전주시는 시민의 독서 진흥과 지역 서점 활성화를 돕기 위한 ‘책쿵20’ 제도도 운영 중이다. 2021년부터 시행된 ‘책쿵20’ 제도는 전주에 주소지를 둔 시립도서관 회원 모두에게 대출 도서를 반납할 때 1권당 50포인트를 적립해 주고, 지역 서점에서 책을 사면 20%의 할인을 제공하는 독서 복지 서비스다. 시민들의 독서량 증가, 지역 서점 매출 상승에 이바지하고 있는 제도로 평가된다. 또한, 전주시는 특색 있는 도서관과 독립서점을 연계한 코스별 여행 지도를 만들어 안내하고 있다. 전주도서관 홈페이지엔 동네 책방에서 진행한 문화행사 정보도 손쉽게 접할 수 있다.
이러한 책문화 지원 힘입어 전주 내엔 특색 있는 책방이 꾸준히 생겨나고 있다. 전주도서관에 따르면 7월 기준 지역서점 인증을 받은 동네서점은 73곳으로 파악된다. 지난해 독립서점 ‘일요일의 침대’을 오픈한 운영 중인 서지석 대표는 독립서점을 열게 된 계기 중엔 ‘전주의 책 문화 정책’도 영향을 미쳤다고 전했다.
◇ 도서관·책 문화 정책, 동네 책방도 살린다
서 대표는 “전주시의 책에 관한 관심과 지원이 밑바탕이 돼 전주의 여러 서점이 각각의 색을 지닌 채 운영하고 있다며 “저 역시 전주의 여러 서점을 애용하던 중 책을 통해 연결되는 독서모임 중심의 서점을 열게 됐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도서관 여행을 비롯해 책 행사 그리고 여행객 개인이 책방 투어를 목적으로 전주시에 방문하는 등의 유입 경로가 늘어나면서 서점은 물론 지역 경제에도 긍정적인 영향을 미치고 있다고 보고 있다”고 전했다.
한옥마을에서 ‘책보책방’을 운영 중인 책방지기 백선옥 대표는 최근 몇 년간 변화를 부쩍 느끼고 있다고 전했다. 백 대표는 “2024년 5월부터 서점 운영을 시작했다”며 “전주가 문화예술 정책 지원을 적극적으로 하면서 활동가들도 많아지고 있다. 도서관과 책방 지원 정책이 활발해지면서 전주에 작은 독립책방들이 많이 생기고 있다. 도서관 여행 체험 행사를 통해 책방을 방문한 사람들이 다시 찾거나 지인에게 입소문을 내기도 한다. 이러한 소개를 받고 방문한 사람들도 있다”고 전했다. ‘책보책방’은 올해 전주 도서관 여행 ‘책담길’ 코스 중 한 곳에 포함됐다. 방문자에게 책 키링 제작 체험을 제공하고 있다고 한다.
전주 책방지기들은 도서관과 책문화 정책이 사람을 끌어모으는 데 충분한 가능성을 보여주고 있다고 말했다. 9년째 서점을 운영 중인 ‘잘 익은 언어들’의 책방지기 이지선 대표는 “동네 책방에 방문객이 늘어난 데에 도서관 여행과 책방지원 사업이 영향을 주고 있다고 보고 있다”며 “사람들이 도서관을 많이 찾아다니면서 책을 조금 더 친근하게 느껴, 책방도 더 찾아오시는 것 같다”고 말했다.
◇ 도서관·책 생태계… ‘인구 유입’ 촉매제될까
전주도서관 여행에는 20·30대 여행객의 참여가 늘어나고 있다. 전주시가 올해 상반기 전주 도서관 여행의 상시 프로그램 참여자 중 262명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20·30대가 차지하는 비율은 45.4%로 전년 대비 5%p(퍼센트포인트) 증가했다. 전체 응답자 중 재참여 의사를 밝힌 비율은 98.1%에 달했다. 전주 도서관 여행 참여를 위해 전주를 방문했다고 응답한 비율은 89.6%, 타지역 참가자(54%) 중 2일 이상 전주에 머무는 여행자 비율 또한 52%로 넘겼다. 도서관 여행이 일회성 관광이 아닌, N차 관광과 체류 관광으로 가능성을 시사하고 있는 셈이다.
3년 전 서울생활을 정리하고 고향인 전주로 돌아왔다는 청년 오유미(29) 씨는 도서관 여행을 통해서 지역의 숨은 매력을 발견했다고 한다.
지난 봄 전주 도서관 여행 책연필코스를 처음 경험한 뒤 도서관 여행의 매력에 푹 빠졌다는 그는 지난달엔 책담길 코스(완산도서관·연화정 도서관+덕진공원·책보책방)를 신청해 다녀왔다.
오유미 씨는 “도서관이 ‘시민의 삶을 풍족하게 할 수 있구나’를 새삼 깨달았다. 또한, 전주 내에 다양한 도서관이 있고, 시가 다양한 지역 서점, 책 문화 정책을 펼치고 있다는 점도 도서관 여행을 통해 자세히 알게 됐다. 책에 관한 관심도 더 커졌다. 도서관 여행을 계기로 독립서점이 운영하는 독서 모임을 하게 됐고, 북페어 전주책쾌도 참여하게 됐다. 모임을 통해 책에 관한 이야기도 나누고 지역 활동도 자연스럽게 하게 됐다”고 말했다. 그는 전주의 책문화 생태계가 청년들의 문화 욕구를 채우고 각계각층의 관계 인구도 끌어모을 수 있을 것으로 기대했다.
전주시는 도서관과 책을 매개로 지역 활성화와 인구 유입의 새로운 기반을 만들어내고 있다. 향후 과제는 ‘지속가능성’에 집중된다. 좋은 생태계가 유지되기 위해선 지속적인 시 차원의 적극적인 예산 투자가 필요하다. 지역과 도서관과 책 문화 자산이 지역 여건 개선을 넘어, 지역 경제에 활력을 불어넣는 동력이 될지 주목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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