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원과 해방의 미학, 장르 '박해영'…'아저씨', '해방일지', '모자무싸' 중심으로 [MD 기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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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마 '무도가 자신의 무가치함과 싸우고 있다' 홈페이지 캡처./JTBC

[마이데일리 = 서기찬 기자] 드라마 '모두가 자신의 무가치함과 싸우고 있다'(이하 '모자무싸')가 안방극장에 깊은 여운을 남기며 막을 내렸다.

화려한 막장 요소나 자극적인 연출 없이도 이 작품이 강력한 마니아층을 형성하며 신드롬을 일으킨 이유는 명확하다. 세상이 정한 기준에 미치지 못해 스스로를 '무가치하다'고 느끼는 현대인들의 깊은 내면을 정조준했기 때문이다.

박해영 작가는 인물들의 상처를 날 것 그대로 드러내고, 이를 담담하게 위로하는 특유의 필력으로 시청자들을 완벽하게 매료시켰다.

드라마 시장에서 대중성을 넘어 평단과 마니아를 동시에 사로잡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박해영은 이를 해냈다. 이제 방송가와 대중은 그의 작품을 단순히 '웰메이드 드라마'라 부르지 않는다.

스릴러, 로맨틱 코미디처럼 하나의 독립된 문법과 스타일을 구축한, 이른바 ‘박해영’이라는 장르가 탄생했다고 입을 모은다.

‘장르’가 된다는 것의 의미

본래 ‘장르(Genre)’란 유사한 형식, 스타일, 혹은 주제적 특징을 공유하는 작품들의 분류 체계를 뜻한다.

대중문화에서 특정 작가의 이름이 곧 장르가 된다는 것은, 그 작가만의 독창적인 서사 구조와 일관된 메시지가 대중에게 하나의 견고한 ‘브랜드’로 각인되었음을 의미한다.

드라마 '나의 아저씨' 포스터./tvN

작가 박해영은 '나의 아저씨'(2018), '나의 해방일지'(2022), 그리고 이번 '모자무싸'(2026)에 이르기까지 자신만의 뚜렷한 작품 세계를 변주해 왔다.

그가 한국 드라마 지형도에서 독보적인 장르로 자리 잡을 수 있었던 밀도 높은 공통점 네 가지를 분석해 본다.

‘박해영 장르’를 관통하는 네 가지 본질

1. 변두리 인생과 루저들이 전하는 가치

그의 작품 속 주인공들은 언제나 주류에서 밀려난 주변인들이다.

'나의 아저씨'의 이지안은 사채 빚에 시달리는 사회초년생이었고, '나의 해방일지'의 삼 남매는 경기도 변두리에서 서울로 지친 출퇴근을 반복하는 평범한 직장인이었다.

'모자무싸' 역시 제목 그대로 황동만을 비롯하여 사회적 기준에서 낙오되어 자신의 무가치함과 처절하게 사투를 벌이는 이들이 중심축을 이룬다.

작가는 이 소외된 루저들의 삶을 연민의 시선으로 바라보는 데 그치지 않고, 그들의 지극히 평범하고도 벼랑 끝에 몰린 일상을 현미경처럼 세밀하게 파고들며 역설적으로 그 존재들의 숭고한 가치를 증명해 낸다.

2. '술자리'라는 공간이 갖는 취중진담의 인간학

박해영의 세계에서 ‘술자리’는 단순한 유흥의 공간이 아니다. 가면을 벗어던진 인간 본성이 날것 그대로 드러나는 가장 성스러운 해방의 공간이다.

'나의 아저씨' 속 ‘정희네’에 모여 밤새 술잔을 기울이던 동네 아저씨들, '나의 해방일지'에서 염미정과 구씨가 침묵 속에 나누던 소주, 그리고 '모자무싸'에서 인물들이 무가치함의 고통을 털어놓으며 나누는 술잔이 그렇다.

취기가 오르는 순간, 인물들은 가식과 방어기제를 내려놓고 가슴 깊은 곳에 묻어둔 진짜 속마음(취중진담)을 꺼내어 놓는다. 이 술자리를 통해 인물들은 서로의 상처를 확인하고, 비로소 연결된다.

드라마 '나의 해방일지'./JTBC

3. 남녀 간의 사랑을 넘어선 '인간 본질적 애정'

그의 드라마에는 흔한 로맨스의 공식이 없다. 남녀 주인공은 단순한 이성 간의 설렘이나 소유욕을 넘어, 인간 대 인간으로서 서로를 구원한다.

'나의 아저씨'의 박동훈과 이지안이 나눈 감정은 사랑이라는 단어로 다 담을 수 없는 깊은 연대감이었고, '나의 해방일지'의 미정과 구씨는 서로를 감정적으로 가득 채워주는 ‘추앙’의 관계였다.

'모자무싸' 역시 이 연장선에 있다. 남녀 간의 치정이나 로맨스 대신, 서로의 결핍을 온전히 품어주고 존재 자체를 인정하는 '본질적인 인류애'를 다루며 시청자들에게 차원이 다른 정서적 포만감을 선사한다.

4. 일상적 대사 속에 숨겨진 철학적 성찰

박해영 장르의 가장 강력한 무기는 단연 대사다. 거창한 수식어 없이 무심하게 던져지는 대사들은 삶에 대한 깊은 철학적 성찰을 담고 있다.

"편안함에 이르렀는가", "날 추앙해요"라는 대사가 신드롬을 일으켰듯, '모자무싸'에서도 가슴을 후벼 파는 날카롭고도 따뜻한 명대사들이 쏟아졌다.

비참한 현실을 피하지 않고 정면으로 응시하게 만드는 그의 문장들은, 시청자들로 하여금 드라마를 보는 행위를 넘어 자신의 삶을 스스로 돌아보게 만드는 강력한 힘을 발휘한다.

위로가 필요한 시대가 선택한 이름

결국 박해영 작가가 하나의 장르가 될 수 있었던 이유는, 무한 경쟁 속에서 매일같이 스스로의 가치를 증명해 내야만 하는 현대인들에게 ‘그렇지 않아도 괜찮다’는 무언의 구원을 건네기 때문이다.

소외된 이들의 굽은 등을 어루만지고, 술잔을 빌려 진심을 전하며, 단순한 사랑을 넘어선 깊은 연대로 인간을 품어 안는 서사. '나의 아저씨', '나의 해방일지'를 거쳐 '모자무싸'로 정점을 찍은 그의 세계관은 차갑고 삭막한 이 시대에 왜 우리가 계속해서 ‘박해영’이라는 장르를 기다리고 소비할 수밖에 없는지 그 당위성을 명확히 보여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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