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재필 ‘에세이’] H에게-화신풍(花信風) 따라 피는 봄꽃

시사위크
김재필(미 델라웨어대학 사회학 박사)
김재필(미 델라웨어대학 사회학 박사)

‘이십사번화신풍(二十四番花信風)’이라는 말을 들어봤나? 줄여서 화신풍(花信風)이라고도 하지. 24절기 중‘소한(小寒)부터 곡우(穀雨)까지 스물네 번 꽃 소식을 전하는 바람이 있다’라는 뜻이야. 한 절기에 세 종씩 모두 스물네 종류의 꽃이 피고 지니, 닷새마다 새로운 꽃이 피었음을 알리는 바람이 있다는 거지. 꽃을 좋아하는 사람은 이런 꽃바람을 감지하는가 보네. 봄이 되면 엉덩이가 들썩거려 집에 가만히 있지 못하는 병이 도지니 말일세. 이럴 때는 카메라를 들고 동네 야산에 올라가거나 배낭을 챙겨서 먼 길을 떠날 수밖에 없어.

지난 3월 하순에 전남 신안에 가서 꽃바람을 흠뻑 맞고 왔네. 1,004개의 섬이 있다는 천사섬에서 이틀 동안 증도, 임자도, 암태도, 반월도, 박지도, 자은도 등을 돌아다녔지. 퍼플섬 중 하나인 반월도에서는 3시간 이상 걸었어. 작년 7월에 허리 병이 난 이후 처음으로 8km가 넘는 길을 걸었네. 자은도 분계 해수욕장을 거쳐 ‘무한의 다리’에 갔을 때는 도저히 더 이상 걸을 수 없어서 멀리서 사진만 몇 장 찍었네. 두 발이 저리고 이빨이 아파서 벤치에 누워 쉴 수밖에 없었어.

나는 꽃이든, 사람이든, 장소이든, 한 번 마음을 주면 쉽게 바꾸지 못하네. 충성심이 강하다고나 할까. 어느 장소든 일단 마음에 들면 최소한 다섯 번은 가야 뭐가 보여. 신안도 이번이 네 번째야. 이전에 친구들과 함께 걸었던 길을 그대로 걸었지만 처음 간 곳처럼 새롭더군. 반월도의 해안 둘레길을 걸을 때는 바닷가 언덕에 무리를 지어 피어 있는 노란 유채꽃 향기를 듬뿍 들이마실 수 있어서 황홀했지. 남쪽 바다에서 살랑살랑 불어오는 명지바람의 리듬에 맞춰 춤을 추니 마음이 얼마나 화사해지는지… 서울을 떠나기 이틀 전부터 앓았던 치통(齒痛)을 잊을 정도로 신이 났어. (서울에 돌아오자마자 치과에 가서 사진 찍었더니 흔들리는 이빨의 뿌리가 끊겼다고 하더군.)

신안의 섬들을 걸으면서 설렘이 노인의 마음을 어떻게 바꾸어 놓은지를 직접 확인할 수 있어서 좋았네. 반칠환 시인이 <두근거려 보니 알겠다>에서 “봄이 꽃나무를 열어젖힌 게 아니라/ 두근거리는 가슴이 봄을 열어젖혔구나// 봄바람 불고 또 불어도/ 삭정이 가슴에서 꽃을 꺼낼 수 없는 건/ 두근거림이 없기 때문// 두근거려 보니 알겠다”라고 읊었던 이유를 제대로 알게 된 거지.

남녀노소 누구에게나 설렘이 없는 삶은 죽은 거나 다름없네. 세상에 신기한 것도 경이로운 것도 없다는 게 얼마나 슬픈 일인가. 늙어도 마지막 숨을 쉬는 날까지 설레고 두근거리는 마음을 꼭 붙들고 살아야 하는 이유지. 설렘은 뭔가를 기대할 때 살며시 느껴지는 마음의 떨림이야. 그 기대가 꼭 이루어져야만 하는 건 아니지. 설레는 마음을 가질 수 있다면 그것으로 충분한 거야. 설렘 그 자체가 소중한 것이고, 경이로운 삶을 살게 하는 묘약이니까.

누구도 인생을 두 번 살 수는 없네. 누구나 처음이자 마지막 길을 걷고 있지. 푸른 호기심 잃지 않으면 두려움보다는 설렘을 갖고 즐겁게 걸을 수 있어. 이왕 혼자서 걸어야 할 길이라면 설렘을 동무 삼아 여기저기 해찰하면서 소걸음으로 걷고 싶네. 머지않아 붉은 노을로 아름답게 물든 서쪽 바다에 도착한다는 걸 늘 명심하면서.

지난 20여 년 동안 꽃을 찾아 전국 방방곡곡 돌아다녀서 좀 아네. 4월에는 닷새가 아니라 날마다 새로운 꽃이 핀다는 것을. 그러면 날마다 꽃바람과 명지바람이 불겠지. 이럴 때는 신경림 시인처럼 차에서 내려 걸을 수 있어야 하네.

“이렇게 서둘러 달려갈 일이 무언가/ 환한 봄 햇살 꽃그늘 속의 설렘도 보지 못하고/ 날아가듯 달려가 내가 할 일이 무언가/ 예순에 더 몇 해를 보아온 같은 풍경과 말들/ 종착역에서도 그것들이 기다리겠지// 들판이 내려다보이는 산역에서 차를 버리자/ 그리고 걷자 발이 부르틀 때까지/ 복사꽃숲 나오면 들어가 낮잠도 자고/ 소매 잡는 이 있으면 하룻밤쯤 술로 지새면서// 이르지 못한들 어떠랴 이르고자 한 곳에/ 풀씨들 날아가다 떨어져 몸을 묻은/ 산은 파랗고 강물은 저리 반짝이는데”

<급행열차를 타고 가다가>라는 시인데, 남쪽 지방에 강연이 있어 기차를 타고 가다가 중간에서 내려 걸어가는 시인의 모습이 멋지지 않은가? 우리는 노인이 되어서도 날마다 다람쥐 쳇바퀴 돌 듯 하루하루 살고 있네. 그런 삶에 대한 문제의식도 별로 없어. 환한 봄 햇살 꽃그늘 속의 설렘도 보지 못하고, 가을 산을 붉게 물들인 단풍 속에서 하던 일을 멈추고 며칠 지낼 용기도 없지. 그러면서도 ‘백수가 과로사한다’라는 흰소리를 입에 달고 살아. 하지만 우리에게는 많은 시간이 남아 있지 않네. 4월에는 시인처럼 ‘복사꽃숲 나오면 들어가 낮잠도 자고’ 예쁜 꽃을 만나면 함께 이야기를 나누는 기회를 자주 갖고 싶어. 이렇게 작심하고 나니 벌써 마음이 설레는구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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