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마이데일리 = 최주연 기자] 중동 전쟁이 장기화 조짐을 보이면서 국내 금융권에 1970년대 오일쇼크 ‘데자뷔’가 나타나고 있다. 5대 금융그룹(KB·신한·하나·우리·NH농협)이 일제히 차량 5부제를 도입하며, 과거 에너지 위기 국면에서 등장했던 수요 통제 방식이 민간 영역까지 빠르게 확산되는 흐름이다.
25일 금융권에 따르면 5대 금융은 임직원 차량 운행을 제한하는 5부제를 시행하고 전력 절감 조치를 병행하고 있다. 전날 정부 요청 직후 실행에 들어갔다는 점에서 사실상 비상 대응 체제에 준하는 조치로 해석된다.
이번 대응이 주목되는 이유는 정책의 성격에 있다. 차량 5부제와 같은 이동 제한은 1970년대 1·2차 오일쇼크 당시 주요국이 도입했던 대표적인 수요 억제 수단이다. 당시 산유국의 공급 축소로 유가가 급등하자 각국은 차량 운행 제한과 주유 통제, 공공 에너지 사용 규제 등을 통해 소비를 직접 줄이는 방식으로 대응했다.
현재 상황이 당시와 같은 전면적 공급 충격으로 이어졌다고 보기는 어렵지만, 위기 초기 단계에서 등장하는 정책 대응이 재현되고 있다는 점은 시장에 적지 않은 긴장 신호를 던진다.
글로벌 에너지 시장의 불안도 빠르게 확대되는 모습이다. 국제에너지기구(IEA)의 파티 비롤 사무총장은 최근 연설에서 “현재 상황은 1970년대 오일쇼크와 2022년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당시 가스 공급 충격이 결합된 수준”이라고 평가하며 강한 우려를 나타냈다. 중동 주요 에너지 시설 피해와 함께 호르무즈 해협 봉쇄 가능성까지 거론되면서, 세계 경제가 중대한 위협에 직면했다는 경고다.
실제 이란을 둘러싼 군사 충돌 이후 국제 유가는 상승 압력을 받고 있으며, 액화천연가스(LNG) 생산 거점까지 공격 대상에 포함되면서 원유와 가스 공급 불안이 동시에 확대되는 양상이다. 사태가 장기화될 경우 에너지 시장 전반에 연쇄적인 충격이 불가피하다는 관측이 나온다.
◇ “단순 지정학 리스크 아니다”…금융시장 전이 경고
한 거시경제 전문가는 “에너지 가격 상승이 물가를 다시 자극할 경우 금리 인하 기대가 후퇴하면서 금융시장 변동성이 확대될 수 있다”며 “지금은 단순한 지정학 리스크가 아니라 금융 리스크로 전이될 가능성을 봐야 하는 국면”이라고 말했다.
이 같은 상황에서 금융권은 민간 가운데 가장 빠르게 집단 대응에 나섰다. KB금융은 전 계열사를 대상으로 차량 5부제를 시행하고 화상회의 확대와 실내 온도 관리 등을 병행하고 있으며, 신한금융은 임원 차량까지 포함해 적용 범위를 넓혔다. 하나금융은 공조 시스템 효율화와 야간 조명 통제에 나섰고, 우리금융은 대중교통 이용 유도와 함께 하이브리드 차량 도입 확대를 추진 중이다. NH농협금융 역시 전 계열사 단위로 절감 조치를 시행하고 있다.
과거 미세먼지 저감 조치 당시에도 차량 운행 제한이 권고된 바 있지만, 금융권이 그룹 단위로 일괄 시행에 나선 것은 이례적이라는 평가다.
업종 특성도 이러한 대응 속도에 영향을 준 것으로 분석된다. 제조업과 달리 생산설비 가동 부담이 없는 사무직 중심 구조인 만큼 차량 운행 제한이나 에너지 절감 조치가 곧바로 생산 차질로 이어지지 않는다. 여기에 지주사를 중심으로 계열사 전반에 동일한 방침을 신속하게 적용할 수 있는 의사결정 구조도 작용했다.
금융권의 에너지 절감은 단순한 ESG 차원의 캠페인을 넘어 에너지 비용 상승이 금융사의 수익성과 건전성에 미칠 영향을 사전에 차단하려는 움직임으로도 해석된다. 중동 리스크가 확대될 경우 국제 유가 상승이 인플레이션을 자극하고, 이는 다시 금리 경로의 불확실성을 키우는 구조로 이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정부 역시 대응 수위를 끌어올리고 있다. 공공부문 차량 5부제를 강화하는 동시에 민간 참여를 요청하면서 에너지 사용을 자율적으로 제한하는 ‘준 통제’ 국면에 진입했다는 평가가 나온다. 이재명 대통령은 국무회의에서 원유와 천연가스 수급 불안을 언급하며 절전과 대중교통 이용 동참을 당부했다.
◇ 협상 기대감에 시장 안정…“하지만 불확실성 여전”
중동 긴장이 완화될 수 있다는 기대감이 반영되면서 이날 금융시장은 비교적 안정적인 흐름을 보이고 있다. 원/달러 환율은 상승 압력이 다소 완화되고, 국내 증시 역시 반등세를 나타내는 모습이다. 이날 코스피는 전 거래일보다 126.41포인트(2.28%) 상승한 5680.33에 개장한 뒤 상승폭을 늘리며 오전 10시 26분 기준 5734.47에서 거래되고 있다. 같은 시간 환율은 전 거래일보다 4.10원(0.27%) 내린 1492.90원을 기록했다.

그러나 협상 여부와 전개 방향이 여전히 불확실한 만큼, 에너지 수급 리스크와 금융시장 변동성에 대한 경계는 지속될 필요가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전문가들은 현재 상황을 두고 신중한 평가를 내놓고 있다. 글로벌 에너지 공급망과 비축 여건을 고려할 때 1970년대와 같은 전면적 오일쇼크로 이어질 가능성은 제한적이라는 시각이 있는 반면, 정책 대응이 예상보다 빠르게 등장했다는 점에서 위기 초기 신호로 봐야 한다는 분석도 나온다.
결국 이번 금융권의 차량 5부제 도입은 단순한 절약 조치를 넘어 ‘전쟁 → 에너지 충격 → 정책 개입 → 기업 행동 변화’로 이어지는 위기 전이 메커니즘이 현실화되고 있음을 보여주는 사례로 읽힌다.
한 시장 전문가는 “에너지 가격 변동성이 다시 확대될 경우 물가와 금리 경로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며 “현재 시장 안정은 구조적 해소가 아닌 기대감에 기반한 측면이 크다”고 말했다. 이어 “변동성은 언제든 다시 확대될 수 있는 구간”이라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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