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위크=김윤혁 기자 최근 ‘36주 태아 낙태 사건’이 논란이 되며 낙태죄 논의가 다시 수면 위로 떠올랐다. 우리나라는 1953년 형법 제정 당시부터 낙태를 금지하고 처벌하는 규정을 뒀다. 하지만 2019년 헌법재판소가 낙태죄를 “임신한 여성의 자기결정권을 과도하게 침해한다”고 판단하며 헌법불합치 결정을 내렸다. 이후 2021년부터 관련 조항이 효력을 잃었지만 7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후속 입법이 마련되지 않고 있다. 그 사이 임신중절 관련 의료 서비스를 희망하는 여성들은 합법도 불법도 아닌 회색지대에서 홀로 모든 사회적 고통과 책임을 짊어지고 있는 형국이다.
◇ 헌법불합치 결정 이후 7년… 길어지는 입법 공백
손솔 진보당 의원은 9일 ‘모자보건법 일부개정법률안’을 대표발의했다고 밝혔다. 입법 배경에는 2019년 4월 헌법재판소(헌재)의 낙태죄 헌법불합치 결정과 그로 인한 입법 공백이 있다. 이전까지 형법은 임신한 여성의 자기낙태를 불법으로 금지해 왔다. 의료인이 임신한 여성의 촉탁 또는 승낙을 받아 낙태하게 한 경우 역시 불법이었다.
그러나 헌재는 “자기낙태죄 조항은 모자보건법이 정한 예외를 제외하고는 임신기간 전체를 통틀어 모든 낙태를 전면적·일률적으로 금지한다”면서 “이를 위반할 경우 형벌을 부과함으로써 임신의 유지·출산을 강제하고 있으므로, 임신한 여성의 자기결정권을 제한한다”라고 판단했다. 또 “모자보건법상의 정당화 사유에는 다양하고 광범위한 사회적⋅경제적 사유에 의한 낙태 갈등 상황이 전혀 포섭되지 않는다”고 지적하며, 2020년 12월 31일까지 개선입법을 위한 유예 기간을 뒀다.
이후 낙태죄 대체 입법을 위한 법안 발의가 이어졌지만 모두 본회의의 문턱을 넘지 못한 채 임기 만료로 폐기됐다. 임신 주수별 낙태 허용 범위 및 사유, 임신 기간 구분 기준의 타당성, 임산부에 대한 충분한 정보 제공 보장 방안 등 주요 쟁점을 두고 첨예하게 입장이 갈렸기 때문이다. 그렇게 유예 기간이 끝나며 낙태죄 관련 조항의 효력도 모두 상실됐지만 후속 입법은 이뤄지지 않았다.
◇ 여성 임신중절 권리 보장… 건강보험 적용·허용 한계 삭제
손 의원은 개정안에 △‘인공임신중절’ 용어를 ‘인공임신중지’로 변경 △약물 투여 등을 통한 임신중절 허용 △임신중절 허용 한계 조항 삭제 △임신중절 관련 의료 서비스에 건강보험 적용 등의 내용을 담았다. 용어 변경은 ‘낙태’ ‘중절’ 등 부정적인 용어를 ‘임신중지’ 또는 ‘임신중단’ 등의 중립적인 용어로 정비하라는 국민권익위원회의 권고를 성문화하려는 것으로 보인다.
또 개정안은 약물 투여 등의 방법으로도 임신중지가 가능하도록 했다. 임신중지 의약품이 안전성과 효과성을 인정받아 세계보건기구에 의해 필수의약품으로 지정된 지 약 20년이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현행 모자보건법은 임신중지 방법으로 수술만을 규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개정안이 통과된다면 비공식 경로로 약을 구해 복용한 뒤 부작용을 겪는 사례 등의 오남용을 막을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
또 보건복지부장관이 임신·출산 관련 중앙상담기관을, 광역자치단체장이 지역상담기관을 지정할 수 있도록 하는 조항을 신설했다. 이를 통해 임신중절 관련 상담과 지원을 희망하는 여성들이 보다 체계적인 지원을 받을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아울러 ‘인공임신중절수술의 허용 한계’ 조항도 전면 삭제했다. 현재 이 조항은 △본인이나 배우자가 우생학적 또는 유전학적 정신장애나 신체질환이 있는 경우 △본인이나 배우자가 대통령령으로 정하는 전염성 질환이 있는 경우 △강간 또는 준강간에 의해 임신된 경우 △혈족 또는 인척 간 임신 △임신의 지속이 모체의 건강을 심각하게 해치고 있거나 해칠 우려가 있는 경우 등에 한해 임신중지를 허용하고 있다.
문제는 이와 같은 특수한 경우를 제외하면 임신중지 관련 의료 서비스에 건강보험이 적용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는 곧 여성의 경제적 부담, 나아가 자기결정권과 건강권 침해까지 이어진다는 지적이 제기돼 왔다. 이에 손 의원은 허용 한계 조항을 삭제해 임신중지와 관련한 의료적 지원 범위를 넓히겠다는 입장이다. 이를 위해 같은 날(9일) 임신중지를 위한 의료서비스에 요양급여를 적용하는 내용의 ‘국민건강보험법 일부개정법률안’도 함께 발의했다.
이러한 내용을 담은 법안이 처음 발의된 것은 아니다. 헌법불합치 판결 이후 21대 국회에서 수차례 비슷한 내용의 발의가 있었지만 결국 임시 만료 폐기됐다. 2020년에는 낙태죄 폐지와 후속 입법을 요구하는 국민동의청원이 10만명 이상의 동의를 받아 국회에 제출되기도 했다. 또 22대 국회 들어 더불어민주당 박주민, 유인순, 남인순 의원 등이 유사한 법안을 발의했고 현재 상임위원회에 계류 중이다.
한편 ‘임신중지 법·제도 개선 및 임신중지 약물 도입’은 이재명 정부 출범 당시 제시된 123대 국정과제 가운데 하나이기도 하다. 이 때문에 그동안 다른 현안에 밀려 논의가 지지부진했다는 지적도 있지만, 관련 법안이 잇따라 발의되고 대통령의 추진 의사도 있는 만큼 향후 국회 논의에 속도가 붙을 가능성도 있다는 전망이 나온다.
낙태죄 헌법불합치 결정 이후 7년이 지났지만 관련 입법은 여전히 제자리걸음이다. 낙태에 대한 찬반 논쟁으로 입법이 지연되는 동안 임신중절을 둘러싼 혼란과 부담은 결국 여성 개인에게 전가됐다. 이번 개정안이 국회를 통과해 제도의 사각지대를 메우고, 임신중지에 대한 사회문화적 규범과 인식을 새로 정비하는 계기가 될 수 있을지 주목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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