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고아성, ‘나’를 마주한 시간… ‘파반느’

시사위크
배우 고아성이 넷플릭스 영화 ‘파반느’를 향한 각별한 애정을 드러냈다. / 넷플릭스
배우 고아성이 넷플릭스 영화 ‘파반느’를 향한 각별한 애정을 드러냈다. / 넷플릭스

시사위크=이영실 기자  배우 고아성에게 ‘파반느’는 단순한 한 편의 작품이 아니다. 2017년 처음 시나리오를 접한 이후 긴 시간을 품어온 끝에 마침내 세상에 내놓게 된 영화다. 준비와 촬영, 후반 작업까지 긴 시간을 지나 관객 앞에 서기까지의 과정은 그에게 특별한 감정으로 남았다. 고아성은 “‘메리지 블루’ 같은 기분”이라며 이 이야기를 비로소 세상에 내놓는 소감을 전했다.

‘파반느’는 마음의 문을 닫고 살아가던 세 사람이 서로에게 빛이 돼주며 삶과 사랑을 마주하게 되는 이야기를 담은 영화다. 박민규 작가의 소설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를 원작으로 한 작품으로, 이종필 감독만의 독창적이고 섬세한 시선으로 사랑을 잃은 청춘들이 다시 감정을 배워가는 과정을 그린다.

극 중 고아성은 사람들의 불편한 시선 속에 숨어 살아온 여자 미정 역을 맡아 필모그래피 첫 멜로에 도전했다. 미정은 음울한 인상으로 타인의 시선을 견디며 살아온 인물이지만, 자신에게 거침없이 다가오는 경록(문상민 분)과 요한(변요한 분)을 만나며 닫혀 있던 마음을 조금씩 열기 시작한다. 

고아성은 체중을 늘리고 걸음걸이와 의상, 분장까지 세밀하게 변화시키며 캐릭터 구축에 공을 들였다. ‘삼진그룹 영어토익반’에 이어 다시 고아성과 함께한 이종필 감독은 “‘어둠과 빛’을 모두 표현할 줄 아는 배우이며 진정한 의미의 아름다움과 사랑스러움을 미정을 통해 보여줬다”고 평가했다. 최근 시사위크와 만난 고아성은 ‘파반느’를 오랜 시간 품어온 이유와 미정이라는 인물을 만들어간 과정, 그리고 작품이 자신에게 남긴 변화에 대해 솔직하게 털어놨다.

-완성된 결과물을 보고 어떤 감정이 들었나. 

“솔직히 말해서 눈물을 참을 수 없었다. 이렇게 오랫동안 품고 준비하는 기간, 촬영하는 기간, 후반 작업하는 기간을 거친 영화가 거의 처음인 것 같았다. 그래서 이 영화를 오픈하기 전에 약간 이상한 심적 변화가 있었다. 나는 결혼을 해 본 적은 없지만 ‘메리지 블루(Marriage Blue)’란 이런 걸까 생각했다. 이 영화가 내 곁을 떠나간다는 게 믿을 수가 없었다. 2017년부터 마음을 품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시사회를 하고 이런 날 기분이 너무 이상했는데, 오히려 공개하고 나서 많은 분들이 리뷰를 해주고 내가 촬영 때 겪었던 쓸쓸한 마음이랄까, 혼자 가지고 있다고 생각했던 일렁거림을 관객분들이 느껴주시는 것 같아서 오히려 더 행복해진 것 같다.”

-10년 동안 품고 있던 작품이라고. 어떤 믿음이 있었나.

“원래 원작을 좋아하기도 했고 이종필 감독님이 각색한 시나리오를 보고도 정말 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옛날 내 작업실이 있었다. 그곳에서 이종필 감독님의 시나리오를 처음 봤는데, 그 울림이 있었던 그 새벽의 한순간을 여전히 잊지 못하는 것 같다. 정말 운명처럼 내 가슴에 들어왔던 순간이 있었고 오늘까지 이어진 긴 여정의 마무리인 것 같아서 마음이 참 이상하다. ‘파반느’를 준비하면서 이종필 감독님을 처음 알게 됐고, ‘파반느’가 미뤄지고 나서 ‘삼진그룹 영어토익반’을 먼저 하게 됐다. 연출자를 만나면 그가 바라보는 세상이나 시점을 엿볼 수 있는데, 그런 부분을 이종필 감독님에게서 느끼면서 ‘파반느’의 꿈을 점차 키워왔던 것 같다. 감독님이 만진, 내가 알고 있던 소설을 전적으로 믿게 됐다.”

‘파반느’로 새로운 얼굴을 보여준 고아성. / 넷플릭스
‘파반느’로 새로운 얼굴을 보여준 고아성. / 넷플릭스

-당시 개인적인 상황이나 배경이 캐릭터와 겹쳐 보이는 지점도 있었나.

“그런 변화가 수년 동안 있었다. 처음 2017년에 봤을 때는 미정이 곧 나 그 자체라는 마음이 있었다. 그런데 그 이후에 ‘항거: 유관순 이야기’라는 영화, 그리고 ‘삼진그룹 영어토익반’ ‘한국이 싫어서’ 같은 작품을 통해 자존감이 높고 자기가 부족한 것을 알지언정 결핍이 있더라도 바른 것을 향해 나아가고 옳음을 향해 나아가는 당당한 인물들을 연기했다. 그런 인물들을 연기하다 보니 내 안에 있던 어떤 후미진 구석 같은 것들을 묻어두고 살아온 몇 해가 있었다. 그런데 다시 이종필 감독님이 ‘파반느’ 시나리오를 줬을 때 예전에 묻어뒀던 나의 가장 나약한 모습을 꺼내 마주해야 하지 않을까, 그 과정이 필요하다고 필연적으로 느껴졌다. 그래서 다시 마주했다. 개인적인 심경의 변화는 있었지만 나의 가장 어두운 면을 마주하다 보니 오히려 촬영장에서 더 자유롭게 표현할 수 있었다.”

-연기에 중점을 둔 부분은. 

“이종필 감독님의 각색 버전에 집중하고자 했다. 원작 소설을 영화화한 경험이 있는 나로서는 원작 소설을 영화화할 때의 마음가짐이 좀 다른 것 같다. 레퍼런스도 탄탄하게 갖춰져 있고 시나리오 이외의 것을 상상해야 되는 부분에 도움을 많이 받을 때도 있다. 그런데 이번 작품은 외형적인 조건보다 어둠 속에서, 어둠이 편했던 마음을 닫은 채 살아가던 한 인물이 조금씩 한 줄기 빛을 찾게 되고 마음을 서서히 열게 되는 과정을 보여주는 것이 가장 중요하지 않을까 생각했다.”

-이종필 감독에게 ‘이 캐릭터의 눈빛을 할 수 있을 것 같다’고 말했다고. 어떤 의미였나.

“그 당시에 굉장히 마음속에 새기고 있던 한 선배님의 인터뷰가 있었다. ‘만약 노숙자 연기를 하려면 허름한 행색이나 무더기 옷, 그을린 피부 같은 대표적인 요소들을 제외하고도 눈만 봐도 노숙자임을 알 수 있어야 한다’는 말이었다. 그것이 연기의 가장 중요한 부분이라고 생각해서 명심하고 있었다. 감독님이 ‘고아성은 미정을 하기에는 너무 당당하다’고 말했을 때 사실 나는 그런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표현하면서 그런 이야기를 했다. 미정을 연기하기에 앞서 다양한 시나리오 각색 버전이 있었는데, 나도 한때는 배우의 파격 변신이나 특수 분장을 통해 표현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한 적도 있었다. 하지만 외형적으로 어떻게 보이느냐보다 자기가 얼마나 나약한지 아는 사람의 눈빛을 장착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지 않을까 하는 과정을 거쳤다.”

고아성(왼쪽)이 캐릭터 구축 과정을 떠올렸다. / 넷플릭스
고아성(왼쪽)이 캐릭터 구축 과정을 떠올렸다. / 넷플릭스

-외적인 모습이 굉장히 중요한 캐릭터였다. 어떻게 만들어 나갔나.

“소설에서는 ‘화려한 가수들이 등장하는 연말 무대에 갑자기 예상치 못한 인물이 나와 요들송을 부르는 듯한 느낌이었다’고 표현이 돼있다. 거기에서 힌트를 얻고자 했다. 그것을 실제로 구현하는 데에는 많은 스태프 분들이 도움을 주셨다. 분장 감독님이 나와 ‘괴물’을 함께 했던, 나의 첫 영화 때부터 봐주셨던 분이다. 내가 중학생 때부터 알고 지낸 분이기도 하다. 그분이 워낙 잘하는 분이다. 특수 분장의 대가이기도 하고 ‘올드보이’의 오대수 헤어스타일을 만들어낸 분, ‘은교’의 할아버지 특수 분장을 하신 분, 최근에는 ‘마스크걸’의 주오남 역할을 만들어낸 분이기 때문에 그분을 전적으로 믿고 맡겼다.” 

-배우의 아이디어가 반영된 부분이 있다면.

“미정의 집이 드러나는 몇 신이 있다. 작은 공간이지만 미정의 삶이 다 녹아 있는 듯한 인상이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미정은 기본적으로 집에 거울이 없을 것 같았다. 그래서 화장을 해야 하는 장면에서는 미정의 의도로 설치된 것이 아닌, 옷장에 달린 거울에 밥상을 끌어다 놓고 화장을 했으면 좋겠다는 아이디어를 냈다. 그런 아이디어들을 감독님이 반영해 줬다.” 

-이종필 감독은 어떤 연출자인가.

“배우의 입장을 가장 잘 아는 감독님인 것 같다. 실제로 배우 출신이기도 하고 여전히 배우의 꿈을 지니고 있기도 하다. 배우가 현장에서 가장 나약해지는 지점들을 누구보다 잘 알고 먼저 다가와 헤아려주는 분이다. 카메라팀 출신이기도 해서 어떻게 하면 배우가 카메라 앞에서 편안한지도 아는 분이다. 굉장히 유쾌하기도 하다. 처음 알았던 감독님을 최근 ‘파반느’ 마무리 작업을 하면서 다시 봤을 때 영화 속에서 경록이 대학에 들어가 친구들과 함께 있는 장면을 미정이 바라보는 장면이 떠올랐다. 그 심정을 똑같이 느꼈다. 둘이서만 늘 작업을 해왔다. ‘파반느’라는 시나리오 하나를 들고 감독님을 알게 됐고, 제작사가 정해지지도 않았을 때 감독님과 둘이 작업실을 오가며 이야기를 나눴던 숱한 날들이 있었다. 그것으로도 모자라 서울에 있는 여러 백화점을 둘이 헌팅하면서 다니던 시절도 있었다. 그런데 이제 감독님을 좋아하는 팬들도 많아졌고 영화계에서 사랑받는 분이 됐다. 그 모습을 보면서 영화 속 경록을 바라보는 미정의 마음처럼 감독님의 예전 모습이 겹쳐 보였고, 이제 더 많은 사랑을 받으시겠구나 하는 느낌이 들었다.”

고아성이 이종필 감독에 대해 언급했다. / 넷플릭스
고아성이 이종필 감독에 대해 언급했다. / 넷플릭스

-이종필 감독은 ‘못생김’을 ‘못난 마음’으로 재해석했다고 했는데, 배우는 어떻게 해석했나.

“그게 나의 마음이었다. 감독님이 설명해 주신 것도 같은 지점이긴 했지만 나 역시 그렇게 접근하고 싶었다. 사랑 앞에서 작아지는 마음, 그리고 불안함 같은 것들을 중점적으로 표현하고 싶었다.”

-문상민, 변요한과의 호흡은 어땠나.

“문상민을 처음 만났을 때가 기억난다. 감독님과 둘이 미팅을 하고 있을 때 내가 궁금해서 방문했다. 그때 이미 경록이 돼서 나타난 느낌이었다. 오랜 시간 생각해 왔던 경록의 얼굴을 하고 다가오는 듯한 느낌이었다. 그날 어쩌다 리딩까지 같이 하게 됐는데 혼자서 연습했던 대사를 경록과 주고받다 보니까 혼자 감격스러운 순간이 있었다. ‘너였구나, 내가 너를 기다려왔구나’ 하는 순간이 있었다.

변요한은 작품을 많이 봤지만 이상하게 한 번도 마주친 적이 없었다. 처음 ‘파반느’를 통해 만났을 때 ‘이 세 인물의 조화가 독특하게 이뤄지겠구나’ 하는 기분 좋은 예감이 들었다. 변요한이 박요한을 연기하는 모습을 카메라보다 더 가까이서 느낄 수 있었는데, ‘지금 이 순간을 절대 잊지 마, 청춘은 영원한 거니까’라고 말하는 장면에서 그 말을 변요한이 본인에게 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걸 보고 너무 슬펐다. 나도 청춘이 영원하지 않다는 것을 아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미정의 얼굴로 리액션을 딱히 정해놓고 현장에 가지는 않았다. 경록의 어깨에 기대서 청춘이 영원하지 않다는 것을 모르는 듯한 변요한의 얼굴을 통해 자연스럽게 리액션할 수 있었다.”

-이 작품이 남긴 의미는 무엇인가. 

“너무 크다. 우선 같은 감독님과 두 번 작업을 했다는 것이 배우로서는 진짜 행복한 일이다. 이렇게 긴 세월을 준비하기도 했지만 촬영이 끝나고 나서 함께한 친구들과 지난 한 시절을 보낸 느낌이 들 때가 있었다. 문상민, 변요한도 처음 만났지만 그들과 진짜 청춘의 한 시절을 보낸 것 같은 추억이 들어 기분이 이상하기도 했다. 이렇게 지난 영화를 떠나보내기에 앞서 또 이렇게 제 개인적으로 크게 다가오는 영화를 하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점점 깊어지는 고아성. / 넷플릭스
점점 깊어지는 고아성. / 넷플릭스

-이 작품을 통해 사랑이나 청춘에 대해 새롭게 생각하게 된 점이 있나.

“청춘을 다시 생각해 봤다. 젊은 날에는 젊음을 모른다고 하지만 문상민, 변요한과도 나이 차이가 조금씩 있는데 한 시절을 보낸 크루라면 모두 같은 청춘이라고 생각한다. 사실 해피엔딩은 아니다. 결국 모두가 헤어지고 각자의 삶으로 어른이 되는 과정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정은 전과 같지는 않다고 생각한다. 그 청춘, 친구, 사랑을 통해서 혼자 있어도 든든하고 단단해진 사람이 됐다고 생각했다. 마지막 신에서도 먼저 간 친구들, 먼저 간 어른들을 생각하게 됐다. 내가 그 사람들을 다시 만났을 때 어떤 얼굴을 하고 있을까 생각해 보게 되는 뜻깊은 순간이었다.”

-작품에서 표현하고 싶었던 사랑의 모습은 무엇이었나.

“멜로 영화는 처음이다. 작은 로맨스 코드가 있는 작품들은 있었지만 장르 자체가 멜로인 작품은 처음이다. 개인적인 소망이 있었다. 만약 멜로를 하게 된다면 꼭 이런 장면이 들어갔으면 좋겠다고 생각한 것이 있었다. 사랑이라는 개념은 두 사람이 양방향으로 이루는 것이지만, 사실 사랑의 가장 큰 가치는 혼자 있을 때도 씩씩해지고 단단해지는 모습이라고 생각했다. 미정이 혼자 있을 때도, 경록과 함께 있지 않을 때도 달려가고 전화를 하려고 달려가는 모습, 전보다 씩씩해진 모습을 담을 수 있어서 좋았다. 자신이 없는 상태로 시작했지만 서서히 마음을 열어가는 과정을 가장 잘 표현하고 싶었다.”

-묻어뒀던 나약한 면을 마주했다고 했는데, 그 과정이 개인 고아성과 배우 고아성에게 어떤 변화나 영향을 줬나.

“언젠가는 꺼내야 한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물론 연기를 하면서 내가 그런 사람이라고 믿는, 당당한 사람이라고 믿는 그 행위도 중요하지만 ‘언젠가는 다시 솔직한 나 자신을 마주해야 할 때가 오겠지’라고 막연히 생각했다. 그런데 그게 ‘파반느’라는 계기여서 너무 행복했다. 소설에 ‘나는 두렵다, 평생을 다친 채로 살아왔는데 활짝 열린 채로 버림받으면 다시는 닫을 수도 없을 것 같다’라는 문장이 있다. 영화에까지 가져오지는 않았지만 나는 그 문장을 늘 품고 있었다. 활짝 열린 채로 ‘파반느’를 떠나보내면 나는 어떡하나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그래도 미정처럼, 미정이 영원히 씩씩하길 바라는 마음으로 나도 씩씩하게 살 수 있을 것 같다.”

-아직 영화를 보지 않은 시청자들에게 전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사랑하고 사랑해야 할 당신을 위해, 역시나 누군가를 사랑하고 사랑해야 할 당신을 위해.’ 영화 속에 나오는 대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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