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자는 27년 전인 1999년 '하나의 꿈'을 가진 역사학도의 눈으로 역사를 바라보던 젊은 시절의 기억이 떠올랐고, 그때 마음속 깊이 품었던 질문들이 다시 살아났다.
그리고 역사적 만남을 마주한 이 특별한 날의 기억은 단순한 회상이 아니라, 긴 시간을 돌아 다시 이어지는 역사와 앞으로 다가올 새로운 미래에 대한 희망의 서사로 조용히 가슴 속에 쌓이고 있었다.
역사는 때로 직선으로 흐르지 않는다. 한 시대의 인연이 끊어진 듯 보이다가도, 긴 시간을 돌아 다시 이어지며 새로운 의미를 만들어낸다. 서울 용산의 언덕 위에 자리한 숙명여자대학교와 대한제국 황실의 만남은 바로 그런 역사적 순간을 떠올리기에 충분했다.
1895년 2월 2일에 광무황제가 발표한 교육에 관한 조칙인 '교육입국조서(敎育立國詔書)'에는 이러한 글귀가 있다.
"지식의 개명은 곧 교육의 선미(善美)로 이룩된 것이니, 교육은 실로 국가를 보존하는 근본이라 하리로다."
즉 “나라를 부강하게 하는 것은 사람이고 사람을 강하게 만드는 것은 교육”이라는 뜻으로 국가의 미래가 불확실한 상황에서 교육에 투자한다는 결정은 단순한 정책적 판단을 넘어선 것이었다.

이후 1906년 광무황제와 순헌황귀비는 어쩌면 대한제국이 미래 세대에게 남긴 '마지막 희망의 씨앗'과도 같은 명신여학교를 세웠다. 이것이 훗날 숙명여자대학교로 이어졌다.
오늘의 숙명여대는 단순한 대학이 아니다. 대한제국 황실이 국가의 미래를 위해 세운 ‘황립 교육기관’의 정신을 품은 학교다. 그러나 일제강점기와 근현대의 격변 속에서 황실과 학교 사이의 역사적 연결은 점차 희미해졌다. 국가 체제의 변화와 정치적 환경 속에서 황실의 이름은 역사 속으로 밀려났고, 숙명여대 역시 창학의 뿌리를 충분히 드러내기 어려웠다.
그렇게 한 세기가 흘렀다. 그리고 2026년, 숙명여대 창학 120주년을 앞두고 뜻깊은 장면이 다시 펼쳐졌다. 대한제국 황실 후손들이 중심이 된 의친왕기념사업회(이사장 이준)와 숙명여대(총장 문시연)가 손을 맞잡고 업무협약을 맺은 것이다. 이 자리에는 광무황제의 후손인 이준 황손이 함께했다.
120년 전 황실이 세운 황립학교와 황실의 종통인 운현궁과 사동궁 후손이 다시 마주한 순간은 긴 세월 동안 잠들어 있던 역사가 조용히 깨어나는 듯한 장면이었다. 학교의 건물과 교정 그리고 수 많은 졸업생들이 이어온 시간 속에서 황실의 창학 정신은 유구히 이어지고 있었고, 이제 다시 현재의 언어로 되살아나기 시작한 것이다.
이 만남이 특별한 이유는 과거의 상징을 복원하는 데만 있지 않다. 오히려 미래를 향한 새로운 상상력에 있다. 이번 협약을 통해 숙명여대가 축적해 온 교육과 연구 역량은 황실문화 유산을 기반으로 한 콘텐츠 제작, 문화 브랜딩, 교육 프로그램, 장학사업, 창업 등 다양한 협력으로 추진될 예정이다. 이는 단순한 문화 행사나 역사 기념사업이 아니라, 한국의 전통과 현대 교육이 결합하는 새로운 시도다.
오늘날 세계는 문화와 스토리를 경쟁력으로 삼는다. 영국의 옥스퍼드와 케임브리지, 일본의 가쿠슈인처럼 왕실과 깊은 역사적 관계를 가진 대학들은 그 자체로 하나의 문화 브랜드가 된다.
이러한 맥락에서 숙명여대가 대한제국 황실의 역사와 정신을 재발견하는 일은 단순한 과거 회귀가 아니라 한국적 정체성을 가진 '교육 브랜드'의 재탄생을 의미한다.
황실의 역사와 대학의 교육이 만나는 지점에는 언제나 인간에 대한 믿음이 있다. 광무황제와 순헌황귀비께서도 나라를 부강하게 하는 것은 결국 사람이며, 사람을 강하게 만드는 것은 교육임을 믿었던 것이다. 120년 전 여성교육 불모지였던 우리 땅에 황실이 품었던 교육의 꿈이 오늘날 다시 호흡을 맞추며 미래를 향한 새로운 이야기를 시작했다.숙명여대는 수 많은 여성 인재를 길러내며 한국 사회의 변화를 이끌었다. 정치, 경제, 문화, 학문 각 분야에서 숙명 출신 여성들이 새로운 시대를 만들어갔다. 그 과정에서 숙명은 단순한 대학을 넘어 여성 교육의 상징적 공간으로 성장했다.
숙명여대는 과거의 시간이 현재의 생명력과 공존하는 공간이다. 이제 그 위에 또 하나의 이야기가 더해졌다. 120년 전 시작된 작은 씨앗이 긴 시간을 지나 다시 싹을 틔우고 있다. 그리고 그 싹은 이제 과거의 유산을 넘어 미래의 문화와 교육으로 자라날 준비를 하고 있다.
대한황실이 품었던 교육의 꿈과 오늘의 대학이 지닌 역량이 다시 만나 새로운 숲을 키워가겠다는 약속이다. 어쩌면 우리는 지금, 역사의 또 다른 출발선에 서 있는지도 모른다.
"역사는 사라지지 않는다. 때때로 잠들어 있다가 다시 깨어날 뿐이다."
이종엽 발행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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