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위크=이영실 기자 비운의 왕 단종은 늘 연약한 얼굴로 기억돼 왔다. 그러나 영화 ‘왕과 사는 남자’(감독 장항준)는 그 익숙한 이미지에서 한발 비켜선다. 단종 이홍위로 분한 박지훈은 슬픔에 머무는 대신, 끝까지 무너지지 않으려 애썼던 한 인간의 시간을 따라간다. 말보다 눈빛을 앞세우고 침묵 속에서 감정을 쌓아 올리는 방식을 통해서다.
‘왕과 사는 남자’는 폐위된 어린 왕 단종과 그를 둘러싼 인물들의 선택을 통해 권력과 인간의 관계를 다시 묻는 영화다. 역사에 기록된 비극을 단순한 연민으로 소비하지 않고 만약 그 시간이 조금 더 이어졌다면 무엇이 달라졌을지를 상상하게 한다. 장항준 감독은 단종을 ‘나약한 왕’이라는 틀에 가두지 않는다. 끝내 비극으로 향하지만 그 과정만큼은 결코 비굴하지 않게, 스스로 존엄을 지켜내려 했던 인물로 그린다.
박지훈은 극단적인 체중 감량, 건조한 목소리, 절제와 폭발을 동시에 담은 눈빛으로 ‘사람’ 이홍위의 얼굴을 빚어냈다. 슬픔에 잠긴 아이로 단순화하지 않고 왕이기 이전에 한 사람으로서 감당해야 했던 고립과 두려움에 집중하며 연기의 밀도를 높였다. 박지훈은 최근 시사위크와 만나 단종을 연기하며 마주한 무게와 고민의 시간, 그리고 그 안에서 놓지 않고자 했던 감정들을 솔직하게 털어놨다.
-첫 상업영화다. 관객을 만나는 기분이 어떤가.
“영광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영화 시장도 어려운데 그런 환경 속에서 대선배, 훌륭한 감독님과 함께 소중한 추억을 하나 만들어낸 것 같다. 감사하게 느끼고 있다. 평소 작품에 대한 반응을 찾아보는 편은 아닌데 (장항준) 감독님이 직접 메시지를 보내주고 있다. 계속 좋은 말들을 보내줘서 그것을 보며 또 하나의 좋은 추억이 생겼구나, 좋은 예쁜 작품이 하나 생겼구나 하는 생각하고 있다.”
-작품을 택하기까지 고민도 많았을 것 같고 부담도 컸을 것 같다.
“마음이 되게 무거웠다. 비운의 왕 단종, 어린 선왕을 연기한다는 것 자체가 한편으로는 너무 죄송하기도 했다. 아직 내 연기에 대한 의심이 많은 사람이라서, 이걸 스크린에 고스란히 담아낼 수 있을까, 내 얼굴과 감정으로 헤아릴 수 있을까 하는 고민을 상당히 많이 했다. 부담감에 시달리고 있을 때 장항준 감독님이 네 번째 미팅에서 ‘지훈아, 단종은 너여야만 해’라고 말해줬다. 차를 타고 집으로 가는 길에 정말 영화를 한 편 본 것처럼, 어쩌면 해볼 수 있지 않을까, 어쩌면 감독님을 믿고 도전해 봐도 되지 않을까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부담감을 결국 이겨내고 하겠다고 했다.”
-체중도 많이 감량했다고.
“감독님에게 하겠다고 말한 상태에서 가장 먼저 이뤄야 했던 목표는 체중 감량이었다. 대본은 그다음의 문제였다. 피폐해진 모습이라기보다 ‘피골이 상접했다’는 표현을 듣고 싶었다. 말랐다는 느낌보다는 너무 안됐다, 입술도 버석하게 말라 있고 아무것도 하기 싫어 보이는 아이처럼 보이고 싶었다. 사과 한 쪽만 먹으며 버텼다. 촬영을 하면서도 물 같은 것도 최대한 안 먹으려고 했다. 목소리에 버석함이 있기를 바랐기 때문에 물도 최대한 안 먹었고 그렇게 두 달 반 정도 체중 감량을 했다.”
-단종을 단순히 나약한 이미지로만 그리지 않았다. 감독의 의도에 맞춰 군왕으로서의 기개를 지닌 단종을 어떻게 해석하고 표현하고자 했나.
“시나리오를 보면서 그 부분이 많이 느껴졌다. 단종이 비굴하지 않게, 너무 비극적으로만 끝나지 않게 페이지의 한 줄을 쓰고자 하는 의도가 너무 잘 보였다. 특히 마을 사람들을 만나고 쌓아가는 과정에서 ‘그래도 이 사람은 왕이었지’라는 인상이 점점 살아나고 눈빛이 변해 가는 지점들이 인상 깊었다. 마지막은 비극으로 끝나지만, 이 어린 왕은 결코 나약하기만 한 인물은 아니었다는 메시지가 분명했다. 정통성을 충분히 지닌 왕이었고, 만약 그가 계속 왕위를 이어갔다면 역사가 바뀌었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까지 들었다. 비운의 왕으로만 남지 않았을지도 모른다는 의도가 시나리오 곳곳에서 느껴졌다. 장항준 감독님이 직접 말로 설명해 주지는 않았지만, 시나리오를 읽으면서 그 의도는 충분히 전해졌다.”
-그 지점을 표현하는 연기도 인상적이었다. 소리를 지르거나 감정을 표출하는 장면에서 단순히 강한 척이 아니라 진짜 강한 인물로 보였다. 감독이 강조한 점과 배우가 의식한 부분은 무엇이었나.
“더 이상 나로 인해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을 잃고 싶지 않다고 느낀다. 태산이 누워 있는 모습을 보면서 그 순간이 정말 싫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결국 또 나로 인해 내 사람들이 하나둘 사라져 가는 모습을 현장에서 마주했을 때, 그 왕은 어떻게 호통을 쳤을까를 많이 고민했다. 그 장면을 위해 여러 테이크를 찍어봤다. 어린아이처럼 소리를 질러보기도 했고 정통성을 지닌 왕이 목소리를 냈을 때는 어땠을지 상상하며 굵직한 발성으로도 시도해 봤다. 개인적으로는 후자가 맞다고 생각했다. 여러 테이크 끝에 (유)해진 선배와 장항준 감독님 역시 후자가 더 맞는 방향이라고 말해줬던 기억이 난다.”
-매 작품 눈빛 연기를 향한 호평이 많았는데 이번에도 역시 눈빛이 인상적이었다. 감정의 결에 따라 눈빛 연기를 어떻게 다르게 가져가려고 했는지 궁금하다.
“차이를 두려고 특별히 신경 썼던 건 없다. 다만 슬픔의 감정을 조금 더 디테일하게 잡아가는 과정이 있었다. ‘약한영웅’이 어린 인물의 소외된 이미지였다면, 단종은 그 슬픔 안에 무언가가 더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정말 나 홀로 남은 사람, 이제는 가족도 없고 매화와 함께 유배를 떠나야 하는 상황에서의 심정을 계속 떠올렸다. 어리지만 그 안에 더 깊이 잠겨 있는 슬픔이 있어야 맞겠다고 느꼈다. ‘약한영웅’ 때가 친구들과 어울리지 않겠다고 스스로 고립시키는 공허함이었다면, 이홍위는 더 단절돼 있고, 더 무기력하며, 더 아래의 낭떠러지에 서 있는 듯한 슬픔을 표현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런 지점을 디테일하게 가져가려 했다.”
-실제 나이보다 훨씬 어린 역할이기도 했다. 그 지점에 대해 고민한 것은 없나.
“딱히 그런 부분을 신경 썼던 건 없다. 다만 마지막 개울가에서 물장난을 하는 듯한 장면이 있는데, 그 장면에는 비하인드가 있다. 원래는 손을 씻으려고 개울가에 앉아 있었던 장면이었는데, (유)해진 선배가 그 모습을 보고 ‘저 장면도 한번 찍어보자’고 해서 탄생한 신이었다. 그 장면을 보면서 나 역시 납득이 갔다. 사실 17살이면 친구들과 뛰어놀고 싶을 나이인데, 혼자 유배를 와 있는 상황이라는 점이 너무 가슴 아프게 느껴졌다. 마을 사람들처럼이라도 뛰어놀고 싶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왕이기 전에 한 명의 청소년이고 어린아이였다는 점에서 그런 감정들을 장면을 찍으면서도 계속 신경 쓰게 됐고 충분히 공감이 가는 지점들이 있었다.”
-극이 전개되며 단종의 눈빛이 변해가는 과정이 보이는데, 완성된 영화를 보며 스스로 변화가 잘 담겼다고 느낀 장면이나 기억에 남은 순간이 있다면 무엇인가.
“모포를 걸치고 갓을 쓴 채 얼굴이 클로즈업되며 번개가 치는 장면이다. 그 시점부터 이홍위가 변화하기 시작하는 시기라고 느꼈다. 한명회도 ‘이제 눈빛이 달라졌다, 범의 눈이 됐다’고 말하는데 그 기점을 기준으로 이후에는 더 나약해진 홍위가 아니라, 뭔가 달라졌다, 조금 힘이 생겼다는 포인트를 계속 의식하며 연기했다.”
-유해진과의 호흡은 어땠나.
“선배의 연기를 평가할 수 있는 위치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다만 선배와 함께 촬영하면서 매 순간순간 놀랐다. 선배가 주는 에너지에 정말 많이 놀랐고 그 에너지를 잘 받아서 다시 돌려드려야겠다는 생각밖에 없었다. 선배는 연기를 ‘기브 앤 테이크’라고 말했는데, 그 말을 현장에서 계속 지켜내고 싶었다. 촬영이 끝난 뒤 그 말을 다시 떠올려 보니, 선배와 나 사이의 에너지가 점점 커지던 순간들이 작품 안에 잘 남아있지 않았나 싶어 다행스럽고 감사한 마음이 크다.”
-유지태의 한명회는 어땠나. 마주했을 때 위압감과 감정은 어땠는지.
“밖에서 신하들이 소리를 지르고 가만히 앉아 있었는데 한명회가 터벅터벅 걸어오는 순간, 누가 오는지 알잖나. 그런데 정말 눈을 못 마주치겠더라. 고개를 숙이고 앉아 있는데도 유지태 선배의 위압감, 아우라 같은 게 느껴졌다. 정말 눈을 못 마주치겠더라. 무서워서. 장항준 감독님에게도 못 쳐다보겠다고 말했더니 ‘너 편한 대로, 마음 가는 대로 해라’고 해줬다. 그렇게 위압감에 눌려 선배를 쳐다보지 못했던 기억이 있다. (단종이) ‘감히 왕족을 능멸하는가’ 하면 (한명회가) ‘저것이 아주 왕인 줄 아는구나’ 하며 탁 걷어내는 장면이 있는데 무서움이 남아있음에도 불구하고, 결코 내가 원하는 것들, 내가 잃고 싶지 않은 것들이 있기 때문에 그렇게 호통을 쳤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럼에도 여전히 너무 무서운 존재로 남아있었던 것 같다. 그런 감정을 숨기면서 극을 이끌어가야 했는데 선배가 준 에너지는 낮은 톤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무서울 정도로 강렬했다.”
-시사회 때 많이 울었다고 했는데, 그때 느꼈던 감정과 단종이라는 캐릭터가 남긴 감정의 여운은 어떤 것이었는지 궁금하다.
“촬영을 하면서 감정적으로 너무 힘들었다. 시사회 때 영화를 처음 봤는데, 특히 마지막 신을 찍던 날의 기억이 너무 선명하게 떠올랐다. ‘저들에게는 죽기 싫다, 차라리 그대의 손으로 죽겠다’고 말하며 마지막을 직감하는 장면이었는데, 그날 현장이 엄청나게 고요했다. 모두가 정말 중요한 신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 그날 유해진 선배가 유독 나를 보지 않더라. 나를 보면 감정이 깨질 거라는 걸 바로 느꼈다. 그래서 최대한 멀리서 인사만 하고 신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런데 문이 열리고 선배가 들어오는 순간, 리허설이었는데도 눈물이 쏟아졌다. 정말 오랜만에 보는 아버지의 모습 같았다. 내가 느껴 본 최고의 순간이었다. 다시는 이런 호흡을 느낄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감정이 북받치기도 했다. 내 얼굴을 찍어야 하는데 눈물을 너무 많이 흘렸다. 가슴이 아플 정도로 울었던 기억이 난다. 다시는 느끼지 못할 최고의 날이었다. 감정적으로 선배가 준 에너지가 가장 크게 남아있는 순간이 아니었나 싶다.”
-장항준 감독도 유해진도 입을 모아 칭찬하더라. 현장에서 어땠기에 칭찬이 자자한가.
“원래 말수가 많은 편이 아니고 매사에 진중하고 생각을 많이 하는 편이다. 무엇을 잘 보여야겠다고 계산하거나, 오늘은 이렇게 다가가야겠다고 마음먹고 접근하는 스타일은 아니다. 그런 점들을 선배와 감독님의 눈에는 예쁘게 보인 것 같다. 꾸미지 않고 그냥 한 사람으로 다가가는 모습 자체를 좋게 봐주신 게 아닐까 싶다.”
-이번 작품을 통해 배우로서 가장 발전했다고 느낀 지점은 무엇인지.
“감독님과 리딩을 정말 많이 했고 작품 안에서 캐릭터의 디테일을 만들어가는 과정들을 많이 배운 것 같다. 이 대사에 어떻게 힘을 실어줄 수 있을지, 어떻게 무게를 더할 수 있을지에 대해 장항준 감독님이 이야기를 많이 해줬다. 대사의 어미나 말의 끝에 힘을 주면 조금 더 무게감 있게 보인다는 말들도 많이 들었고, 그런 부분들을 많이 배웠다. 디렉션이 워낙 정확했고 배우가 이해하기 쉽게 설명해 줘서 집중해서 바라보고 들었다. 마치 수업을 듣는 학생처럼 현장에서 하나하나 흡수했던 것 같다.”
-아역부터 시작해 지금에 이르기까지 연기를 계속 이어가게 만드는 재미는 무엇인가.
“작품을 찍어가면서 매번 새로운 것들을 배우고 새로운 호흡을 경험하고 새로운 사람들을 보며 배워가는 과정이 연기의 재미인 것 같다. 내가 이 캐릭터로 연기를 하고 있지만, 다른 배우들이 그 캐릭터에 어떻게 빠져들고, 어떻게 대사를 치고, ‘기브 앤 테이크’를 어떻게 만들어가는지를 지켜보는 것도 흥미롭다. 그런 궁금증을 안고 현장에서 함께 만들어가는 과정 자체가 굉장히 재미있다고 느낀다.”
-앞으로 연기적으로 도전해 보고 싶은 방향이나 욕심이 있다면.
“어떤 작품이든 도전해 보고 싶다. ‘되게 슬프고 혼자 동떨어져 있는 캐릭터가 잘 어울린다’는 이야기를 본 적이 있는데, 내가 정말 이런 캐릭터만 잘 어울리는 걸까라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그래서 더더욱 다양한 작품에 도전해 보고 싶다는 생각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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