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詩가 있는 노래] - 사랑, 그 쓸쓸함에 대하여 - 양희은 ⑤

프라임경제
[프라임경제] 2004년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시인들이 뽑은 시 보다 더 시 같은 노래말이 선정됐다. 1위는 박시춘 작곡 손로원 작사의 '봄날은 간다', 2위는 조용필의 '킬리만자로의 표범', 3위는 정태춘이 부른 '북한강에서' 였다. 4위로 뽑힌 게 양희은이 작사한 '사랑, 그 쓸쓸함에 대하여'였고 5위, 6위 또한 양희은이 부른 한계령과 아침이슬이다.

'사랑, 그 쓸쓸함에 대하여'는 가사의 절절함 때문에 많은 사람의 사랑을 받고 있는데 시 보다 더 시 같아 모두의 심금을 울리는 듯하다. 이 노래는 누가 들어도 글쓴이의 깊고 깊은 사연이 느껴지고, 저마다 품고 있는 사랑의 상처나 기억을 일깨우는 듯함이 주관적이지는 않다. 

다행히 이렇게 아름다은 노랫말을 쓰게 된 사연은 추측이 가능하다. 2019년 <현장토크쇼 택시>가 방영됐다. 출연자 양희은 선생에게 고정캐스트 개그맨 김구라가 물었다. 

"예전에 가수 서유석선생과 동거설 등 스캔들이 있었는데 사실이에요?"

침묵이 흐르자 옆에 있던 아나운서 전현무가 "보통 그런 스캔들은 아무 일 없이 나지 않던데요" 라고 압박(?)하는 듯이 되물었다. 

그러자 양희은은 "근거가 없지는 않다. 그러나 나 또한 현역에서 활동 중이고 그 분도 여러 곳에서 일하고 계시는데 그 얘기는 하고 싶지 않다"며 더 묻지 말라고 잘라 말했다. 그래서인지 서유석의 가족관계는 알려진 바 없고 언론노출을 극도로 피한다고 한다.

양희은은 6.25 전쟁이 한참이던 1952년 8월13일 태어났다. 아버지는 단신 월남해 육사 4기로 6.25 참전 후 미국유학까지 다녀온 대령 출신 양정길씨, 어머니는 명동 부띠크 주크양장점의 고용 디자이너 였던 서울예대 성악과 출신 윤순모여사. 그들의 장녀로 서울 종로구 가회동에서 태어나 재동초, 경기여중고를 졸업했다. 여동생 두 명 중 바로 밑은 양희경 배우다. 

그러나 1961년 아버지가 이북에서 넘어온 여자와 바람이 나 일찍 집을 나갔고, 간질환으로 39세를 일기로 작고하던 1964년, 양희은은 초등힉교 6학년이었다. 그러자 옷 만드는 손재주가 좋았던 어머니는 미아리로 이사를 가 양장점을 차려 생활을 이어갔다. 

양희은은 1968년 경기여고에서 오크클럽창립행사에 사회를 맡았고 초청 받아온 송창식, 윤형주 등이 양희은의 노래를 듣고 "너 대학 들어가면 꼭 한 번 찾아 오라고" 했다. 양희은은 고등학교때도 신문반과 영어웅변대회에서 1등을 하는 등 재주꾼이었다.

그러나 양희은이 모 대학에 떨어져 재수하기 시작한 어느 날 그 양장점은 누전으로 불이나 홀라당 다 타버렸고,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어머니가 보증을 선 엄마 친구까지 도망을 간 까닭에 오갈 데가 없었다. 

재수시절 생계가 막막했던 양희은은 재동초 시절 YMCA어린이 합창단원으로 동창인 김민기를 찾아갔다. 극단 학전을 운영하다 작년 7월21일에 작고한 김민기는 1951년 3월31일생으로 그 당시 서울대 회화과 1학년생이었다. 

이미 양희은의 노래 실력을 알고 있었던 김민기는 집안사정을 듣고 양희은을 6년 선배인 서유석에게 소개했다. "얘가 뭔데"라며 퉁명스럽게 말하던 서유석은 양희은의 노래를 듣자마자 본인이 노래하던 명동의 코스모스살롱 사장에게 데리고 갔고, 결국 양희은은 거기서 노래한 수입으로 재수생활을 이어갈 수 있었다.

또 70년 재수시절 때 한 번 찾아오라던 송창식의 말이 기억났다. 송창식은 평생을 살면서 단 한번도 누구를 추천해 본 적이 없었는데 이 때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양희은을 추천해 자기공연의 일부를 양희은에게 내주었다. 이렇게 저렇게 재수를 끝내고 서강대 사학과에 입학한 양희은을 서유석이 찾았다. 아침이슬이란 노래 레코드 취입을 위해 이연실, 남궁옥분도 생각했으나 너로 결정했다고.

1971년 양희은이 이곡을 발표하자 그야말로 대박이 터졌다. 누구나 불렀고 이 노래를 모르는 사람은 있어도 한 번만 부른 사람은 없다는 유행어를 만들어 내기도 했다. 그러나 아침이슬은 1973년 건전가요로 지정된 것이 무색하게도 2년후 금지곡이 됐다. 1975년 유신체제를 두고 찬반 국민투표를 하던 날 학생 시위대가 이 곡을 부르기로 한 것이 발각되면서 금지곡이 됐다. 

또 다른 이유도 있다. 북한에 금수산태양궁전이 있듯이 '태양은 묘지 위에' 란 가사가 또 '붉게 타오르고'는 적화통일을, 이슬은 형장의 이슬을 연상케 한다는 이유가 보태졌다. 

지금은 이해 할 수 없는 레드콤플렉스일 수 밖에 없지만 서슬이 시퍼렇던 시절이니 이해는 간다. 이 때 금지된 총 곡수가 2000곡이 넘었고, 양희은은 대학졸업까지 40여곡을 발표했으나 거의 대부분인 30여곡이 금지돼 활동이 위축될 수밖에 없었다. 

그러다 30살 즈음에 난소암이 걸려 2년을 고생했다. 이 때 배우가 된 동생 양희경이 병간호로 너무 고생을 하자 양희은이 한마디 한다. "죽을 사람은 죽고 살 사람은 살어, 너무 애쓰지 마라"라는 말은 언론에 퍼져 유행어가 되기도 했다.

87년 금지곡이 해금되던 해 양희은은 미국 뉴욕에서 슈퍼마켓을 하던 49년생 조중문씨와 만난지 3주만에 결혼, 미국생활을 시작했다. 그러나 미국생활 3년이 지나면서 무료했던 양희은은 오스트리아 빈 국립음대에서 유학하던 65년생 음악감독 이병우를 뉴욕으로 불렀다.

그리고 8곡을 완성했는데 그 중 6곡이 양희은이 작사했고 '사랑, 그 쓸쓸함에 대하여'도 이 때 발표하면서 조용히 귀국을 했다. 1993년 양희은이 나이 마흔 때이다.

귀국후 양희은은 많은 일을 하게된다. 못다한 노래, 내 나이 마흔살에를 발표했고, 1999년부터 MBC라디오 여성시대, 2006년엔 15집 앨범으로 당신만 있어준다면과 인생의 선물 등을 발표했는데, 많은 프로와 집필에 관해서는 생략하기로 한다.

아침이슬 뒷애기를 빼놓고 갈 수는 없겠다. 이 곡은 1970년 8월에 수유리로 이사 간 김민기가 술을 마시고 공동묘지에서 자다가 아침햇살을 받으면서 깨어났을 때를 경험해 그저 가사로 옮겼을 뿐이라고 한다. 민주화 관련해 쓰지는 않았다고 누차 강조한 바 있다.

이 노래가 양희은이 부르게 된 것은 김민기가 이 곡을 만들어 악보를 찢어 쓰레기통에 버렸는데, 그 찢어진 악보를 맞춘 양희은이 자신이 부르고 싶다고 했더니 마음대로 하라고 해 양희은의 노래가 됐다는 내용도 인터넷상에 많다. 

그러나 서유석씨는 한 방송과의 인터뷰에서 본인이 양희은에게 주었다는 얘기를 했다. 왜냐하면 김민기가 본인을 찾아와 이 노래를 불러달라고 했는데 자기와는 안 맞는다는 결론을 내린 결과였단다. 이 노래가 히트를 치자 김민기도 한 달후에 피아노버전으로 불렀는데 거침없는 양희은의 아침이슬과는 사뭇 다르게 감성적이라고 한다.

1987년 민주화운동중에 백만관중이 연달아 부른 까닭에 1990년 북한정권이 서유석의 독도아리랑과 함깨 의도적으로 수입해 청년층, 학생들사이에서 대유행이 되었는데, 탈북출신 동아일보 주성하 기자는 북한에서 군생활 할때 합창한 노래였으나 이 곡이 남한노래라는 사실은 몰랐었다고 한다. 

그러나 역효과가 났는지 1996년 고난의 행진 기간에 금지곡이 됐는데 2010년에는 이 곡을 불렀다고 강제노역에 처했다는 기사까지 있었다고 한다. 아침이슬은 누가 불러도 기분이 좋아지고 힘이 솟아오르며, 가슴이 벅차오른다. 그야말로 한국 가요사에 길이 남을 걸작이다.












이상철 제이민그룹 회장/ 칼럼니스트·시인·대지문학동인/ 한국HR서비스산업협회 회장(前)/국회 환노위 정책자문위원/ 국회의원 보좌관(대구)/ 쌍용그룹 홍보실 근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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