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대표 극지인⑮] 굴삭기와 기타가 그리는 ‘남극의 선율’

시사위크

이얼음의 땅 ‘남극’은 흔히 ‘미지의 대륙’이라 불린다. 인류의 손길이 제대로 미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세상의 끝’ 남극에서 지구의 미래를 준비하는 이들이 있다. 남극세종과학기지의 월동연구대와 하계연구대가 그들이다. 거대한 빙하, 바다를 떠도는 유빙, 몸을 가눌 수 없을 정도의 강한 블리자드(눈보라). 어떤 위험에도 그들은 남극을 지킨다. 우리는 이들을 ‘국가대표 극지인’라 부르기로 했다. 시사위크 남극특별취재팀이 남극세종과학기지를 찾아 그들을 만나봤다. [남극특별취재팀=김두완 기자, 박설민 기자]

 제38차 남극세종과학기지 월동연구대의 민진홍 대원은 베테랑 중장비대원일뿐만 아니라 기타 연주까지 섭렵한 ‘남극의 김광석’이다./ 사진=남극특별취재팀
제38차 남극세종과학기지 월동연구대의 민진홍 대원은 베테랑 중장비대원일뿐만 아니라 기타 연주까지 섭렵한 ‘남극의 김광석’이다./ 사진=남극특별취재팀

 

내 조그만 공간 속에 추억만 쌓이고

까닭 모를 눈물만이 아른거리네

작은 가슴을 모두 모두어

시를 써봐도 모자란 당신

먼지가 되어 날아가야지

바람에 날려 당신 곁으로

시사위크|남극=남극특별취재팀  한국에서 1만7,240km 떨어진 서남극 남극반도의 킹조지섬. 고(故) 김광석의 ‘먼지가 되어’의 익숙한 멜로디가 흘렀다. ‘남극세종과학기지’의 월동연구대원들과 하계연구대원들은 하나가 돼 기타 연주에 맞춰 노래를 불렀다. 그 순간 만큼은 지구 끝, 남극이 아닌 한국의 콘서트장을 방불케 했다.

이 공연의 주인공인 기타 연주자는 민진홍 대원이었다. 제38차 남극세종과학기지 월동연구대원이다. 그의 역할은 굴삭기, 로더 등 기지 내 중장비 운용을 담당하는 중장비대원이다. 동시에 기지의 음악공연을 책임지는 ‘예술가’ 역할도 맡고 있다. 한 손에는 굴삭기를, 다른 한 손으론 기타를 연주하는 낭만의 중장비대원, 민진홍 대원을 만나봤다. 

2024년 12월 24일, 크리스마스 이브 세종기지의 크리스마스 파티에서 기타를 연주하는 민진홍 대원./ 사진=남극특별취재팀
2024년 12월 24일, 크리스마스 이브 세종기지의 크리스마스 파티에서 기타를 연주하는 민진홍 대원./ 사진=남극특별취재팀

◇ 기타부터 중장비·보트까지 다루는 ‘남극의 김광석’

2024년 12월 24일, 크리스마스 이브의 세종기지에 활기가 넘쳤다. 38차 월동대원들과 하계대원들 모두 ‘펭귄과 함께하는 크리스마스 파티’에 들떴다. 이희영 조리장과 최홍준·김태연 하계 조리보조대원들은 오랜만에 솜씨를 부려 호텔 부럽지 않은 크리스마스 만찬을 선보였다.

식사를 마친 후 남극 크리스마스 파티의 꽃인 ‘음악 공연’이 시작됐다. 어쿠스틱 기타를 들고 온 민진홍 대원은 그간 숨겨놨던 기타 연주 솜씨를 뽐냈다. 세종기지 관객들의 요청에 따라 연주곡을 바꾸는 민진홍 대원은 마치 콘서트장의 전문 기타 연주자를 연상케 했다.

민진홍 대원은 “김광석 노래를 굉장히 좋아해 기타를 시간 날 때마다 짬짬이 연습한 것이 어느덧 10년이 됐다”며 “한번 해보고 싶은 것은 해봐야 한다는 것이 제 성격이라 기타도 연습을 하게 된 것 같다”고 말했다.

민진홍 대원의 기타공연을 지켜보는 하계대 및 월동대원들의 모습./ 사진=남극특별취재팀
민진홍 대원의 기타공연을 지켜보는 하계대 및 월동대원들의 모습./ 사진=남극특별취재팀

물론 민진홍 대원이 기타만 잘 치는 것은 아니다. 기지 내 주요 장비 운영 전반을 책임지는 중장비대원 2인조 중 한 명이다. 서준영 대원과 함께 세종기지의 굴삭기, 로더 등 건설용 중장비를 운용·관리한다. 관련 자격증은 굴삭기, 지게차, 건설기계정비기능사 등을 가지고 있다. 또한 국내 대형자동차 기업에서 정비업을 담당하기도 한 ‘전문가’다.

민진홍 대원은 중장비뿐만 아니라 기지 내 조디악 운영에서도 활약 중이다. 남극으로 출발하기 전 ‘동력수상레저기구 조종면허’를 취득했기 때문이다. 해양경찰청에서 발급되는 이 자격증은 5마력 이상의 추진기관을 장착한 고무보트, 모터보트, 낚시보트를 조종할 수 있는 면허다.

민진홍 대원은 “원래 취미가 낚시였고 배에도 관심이 많았지만 시간이 부족해 그동안 면허 취득을 생각하진 않았었다”며 “하지만 남극행을 결심한 뒤 이곳 세종기지에서 활동할 때 큰 도움이 될 것 같아서 면허 취득에 도전, 세종기지 월동대 합격과 동시에 조종 면허도 취득할 수 있었다”고 말했다.

민진홍 대원이 기타만 잘 치는 것은 아니다. 기지 내 주요 장비 운영 전반을 책임지는 중장비대원 2인조 중 한 명이다. 서준영 대원과 함께 세종기지의 굴삭기, 로더 등 건설용 중장비를 운용·관리한다./ 사진=남극특별취재팀
민진홍 대원이 기타만 잘 치는 것은 아니다. 기지 내 주요 장비 운영 전반을 책임지는 중장비대원 2인조 중 한 명이다. 서준영 대원과 함께 세종기지의 굴삭기, 로더 등 건설용 중장비를 운용·관리한다./ 사진=남극특별취재팀

◇ 밤에도 긴장을 놓지 못하는 중장비대원의 하루

늦은 밤, 한바탕 크리스마스 파티가 끝나고 기지 인원들은 각자 생활관으로 돌아갔다. 하지만 몇몇 인원은 휴식 대신 기지 상황실로 이동했다. ‘야간 당직’을 서기 위함이다. 세종기지에선 매일 밤 정해진 인원들이 야간 당직을 서며 기지 내부 및 주변을 순찰한다. 화재 위험과 기상이변, 장비 및 시설 고장 등을 점검하기 위해서다.

크리스마스 전날이었던 이날, 야간 당직은 민진홍 대원의 차례였다. 모두가 잠든 새벽 12시, 손전등 하나에 의지한 채 민진홍 대원은 밖으로 나섰다. 다른 한 손에는 전자패드가 들려 있었다. 각 시설 점검을 마친 후 관련 내용을 기록하기 위함이다.

민진홍 대원이 맡은 순찰 구역인 유지반 시설은 특히 꼼꼼한 점검이 필요하다. 물탱크와 발전기, 전기시설 등 기지 운영의 핵심 시설들이 이 유지반 건물 내부에 모두 자리 잡고 있기 때문이다. 만약의 사고에 대비해 준비된 대피소 점검도 유지반 대원들이 맡아 진행한다.

민진홍 대원은 “남극이라는 고립된 환경에 위치한 세종기지는 화재 등 사고가 발생하면 그 피해가 상상을 초월한다”며 “때문에 기지 시설들, 특히 기지 안전과 직결된 유지반 시설은 철저한 점검과 관리가 필요해 야간에도 꼼꼼하게 순찰을 해야 한다”고 설명했다.

민진홍 대원은 야간 당직 시간, 굴삭기와 지게차, 조디악보트 등 중장비 상태 점검도 함께 진행했다. 남극의 밤은 일반 지역과는 다르다. 추위뿐만 아니라 소금기 가득한 바람, 눈과 비가 섞인 강풍 등에 의해 잔고장을 일으킬 수 있기 때문이다. 남극에서는 작은 고장도 작업에 불편을 줄 수 있다. 뿐만 아니라 대형 사고로 이어질 수도 있어 야간에도 상태 점검이 이뤄진다.

민진홍 대원은 “가장 걱정이 되는 고장은 유압중심부와 엔진 고장, 즉 중대결함이다”라며 “이 경우 단순히 기계 성능이 떨어지는 것이 아닌 운행 자체가 불가능해지는데 부품, 수리가 가능하면 다행이지만 그렇지 않을 경우 큰 어려움이 생길 수 있다”고 말했다.

. 모두가 잠든 새벽 12시, 손전등 하나에 의지한 채 기지 전반을 순찰하는 민진홍 대원의 모습./ 사진=남극특별취재팀
. 모두가 잠든 새벽 12시, 손전등 하나에 의지한 채 기지 전반을 순찰하는 민진홍 대원의 모습./ 사진=남극특별취재팀

◇ 강릉 청년, 남극 땅을 밟기까지

이처럼 민진홍 대원은 제38차 월동대에선 없어선 안될 중장비대원이자 활력소다. 하지만 다른 월동대원들처럼 ‘반드시 남극에 가겠다’는 오랜 꿈이 있어 지원하게 된 것은 아니었다. 우연히 ‘극지연구소(KOPRI)’의 월동대원 모집 공고를 보고 도전하게 됐다는 것이 민진홍 대원의 말이다.

민진홍 대원은 “몇 년 전 쯤 펭귄이 귀여워 유튜브를 보다가 알고리즘을 타고 극지연구소 홍보 채널의 남극 세종과학기지 채용 공고를 보게 됐다”며 “남극은 내 인생에 쉽게 가볼 수 있는 곳은 아니라고 생각했는데 월동대에 합격하기만 한다면 좋은 경험과 경력을 쌓을 수 있지 않을까 도전하게 됐다”고 말했다.

이어 “강원도 강릉시의 동네에서 자동차 정비일을 하던 엔지니어였던 내가 설마 남극에 갈 수 있을까 생각했지만 최종 합격 통보를 받고 너무나 기뻤다”며 “그동안 작은 일이라고 하나씩 열심히 했던 것이 이런 좋은 결과를 얻을 수 있었던 원동력이 아닐까 생각한다”고 말했다.

민진홍 대원은 “푼타아레나스에서 출발한 비행기가 남극에 착륙한 직후 처음 봤던 남극의 빙하는 말로 표현하기 힘든 벅찬 감정을 일으켰다”며 “월동대로 기지에 머무는 긴 시간 동안 그동안 못했던 것, 일 핑계로 못했던 자기 계발에 힘쓰고 싶다”고 전했다./ 사진=남극특별취재팀
민진홍 대원은 “푼타아레나스에서 출발한 비행기가 남극에 착륙한 직후 처음 봤던 남극의 빙하는 말로 표현하기 힘든 벅찬 감정을 일으켰다”며 “월동대로 기지에 머무는 긴 시간 동안 그동안 못했던 것, 일 핑계로 못했던 자기 계발에 힘쓰고 싶다”고 전했다./ 사진=남극특별취재팀

제38차 월동대가 남극에 온 지 어느덧 6개월이라는 시간이 훌쩍 지났다. 하지만 민진홍 대원은 여전히 처음 남극에 도착했을 때의 설렘이 남아있다고 말한다. 기지 앞의 거대한 마리안소만 빙벽과 펭귄들, 눈덮인 세종봉과 백두봉을 바라볼 때면 ‘내가 진짜 남극에 오긴 왔구나’라는 느낌을 다시 한 번 받는다고 했다.

민진홍 대원은 “푼타아레나스에서 출발한 비행기가 남극에 착륙한 직후 처음 봤던 남극의 빙하는 말로 표현하기 힘든 벅찬 감정을 일으켰다”며 “고향인 강릉에도 눈이 많지만 그것과는 전혀 다른 느낌이라 긴장감도 함께 몰려왔다”고 회상했다.

이어 “월동대로 기지에 머무는 긴 시간 동안 그동안 못했던 것, 일 핑계로 못했던 자기 계발에 힘쓰고 싶다”며 “모든 배운 것은 어디든 다시 사용할 수 있다는 것이 좌우명인만큼 남극에서의 경험을 인생의 중요한 양분으로 삼겠다”고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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