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음의 땅 ‘남극’은 흔히 ‘미지의 대륙’이라 불린다. 인류의 손길이 제대로 미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세상의 끝’ 남극에서 지구의 미래를 준비하는 이들이 있다. 남극세종과학기지의 월동연구대와 하계연구대가 그들이다. 거대한 빙하, 바다를 떠도는 유빙, 몸을 가눌 수 없을 정도의 강한 블리자드(눈보라). 어떤 위험에도 그들은 남극을 지킨다. 우리는 이들을 ‘국가대표 극지인’라 부르기로 했다. 시사위크 남극특별취재팀이 남극세종과학기지를 찾아 그들을 만나봤다. [남극특별취재팀=김두완 기자, 박설민 기자]

시사위크|남극=남극특별취재팀 서남극 남극반도 남쉐틀랜드 군도(South Shetland Islands)의 킹조지섬. 이곳에 위치한 ‘남극세종과학기지’는 하나의 ‘시계’와 같다. 매시간 18명의 월동연구대원이라는 부품이 태엽처럼 맞물려 돌아가야 정확한 임무 수행이 가능하다.
이 중 ‘제38차 남극세종과학기지 월동연구대’의 서준영 대원은 남들보다 조금 더 바쁘다. 기지 내 모든 중장비를 운용할 뿐만 아니라 대원들의 두발 정리를 돕는 ‘이발사’가 되기도 한다. ‘시사위크 남극특별취재팀’은 스물여덟, 세종기지의 젊은 ‘만능태엽’ 서준영 대원의 하루를 함께 동행해 봤다.
◇ 3가지 중장비를 자유자재로… 세종기지의 ‘만능 중장비대원’
남극의 여름인 11월부터 2월은 월동연구대가 가장 바쁜 시기다. 비교적 맑은 날씨와 안전한 파도때문에 하계연구대가 활발히 활동할 시간이기 때문이다. 극지연구소(KOPRI) 등 각종 연구기관부터 대학, 기업에 이르는 다양한 하계대 연구자들의 현장 활동을 돕는 것이 월동대의 핵심 임무이기도 하다.
특히 해상연구활동에 필요한 조디악(고무보트), 소형선박을 운행할 때면 중장비대원들은 필수적으로 투입된다. 수백kg에서 1톤 가까이 되는 선박을 옮길 땐 굴착기 등 중장비가 필요하다. 얼음과 진흙, 바닷물로 미끄러워진 남극 지형에서 중장비를 운행해야 한다. 때문에 실력이 뛰어난 중장비대원들은 기지의 가장 중요한 인력으로 손꼽힌다.


그런 의미에서 서준영 대원은 이번 제38차 월동대에서 독보적 존재다. 그는 세종기지에서 중장비 관리 및 운용을 담당하고 있다. 특히 굴삭기부터 로더, 크레인에 이르는 주요 중장비 3종은 모두 그의 손을 따라 운용된다.
극지연구소의 ‘남극과학기지 월동대원 직무기술서’에 따르면 중장비대원의 필수 자격조건은 ‘건설기계운전 관련 자격증 2개 이상 소지자’다. 서준영 대원은 그보다 많은 1종을 전부 다룰 수 있다. 때문에 기지 내 거의 모든 임무와 작업에서 서준영 대원은 필수 인원으로 참여한다.
하계대 연구원들 현장 보조를 마친 후에도 서준영 대원은 휴식할 틈이 없었다. 사용한 중장비들의 상태를 점검해야 하기 때문이다. 험하고 고립된 환경인 남극에서 장비에 큰 고장이 발생하면 임무 수행에 차질이 발생할 수 있다. 특히 센서 등 전자부품의 경우 정밀 수리가 사실상 불가능해 주의가 필요하다.
서준영 대원은 “세종기지의 중장비가 고장나면 대원들이 직접 수리를 직접해야 하는데 부품이 없을 경우가 있다”며 “보통 가장 위험한 것은 전자센서 쪽이다. 중장비가 워낙 첨단화가 돼 있다 보니 진단하기 어렵고 고치기도 힘들다”고 말했다.
이어 “세종기지는 부품과 지원 물품 등이 잘 구비돼 있지만 문제는 남극이라는 환경이, 바다가 근처에 있고 날씨도 추워 장비 부식이 빠르다는 것”이라며 “때문에 중장비대원들은 부식을 막기 위해 페인트칠과 점검을 지속적으로 해야 한다”고 설명했다.

◇ 지하철 광고에서 출발한 ‘남극 도전기’
서준영 대원은 올해로 29세다. 기지에선 막내인 안승민 고층대기 대원 다음으로 젊다. 하지만 중장비 운용 경력은 5년, 보유한 자격증도 3개다. 기지 임무 현장에서 서준영 대원은 거대한 중장비를 수족처럼 다룰 수 있었던 비결이다.
서준영 대원은 “저의 왜소한 체구와 달리 사람이 할 수 없는 일을 척척 해내는 중장비들을 보면서 매력을 느끼게 됐다”며 “이에 특성화고등학교를 다니면서 중장비에 대한 공부를 했고 군 복무 시절에도 육군에서 굴착기 운전 병사로 근무하며 경력을 쌓았다”고 말했다.
군 복무 이후 대한건설기계안전관리원(KCESI)에서 중장비 요원으로 근무했다. 안정적인 직장과 편안한 생활이었다. 하지만 서준영 대원은 마음 한편에 자리 잡은 모험심이 계속 끓어올랐다. 특히 ‘미지의 영역’과 같은 아무나 쉽게 가지 못하는 곳에 한 번 가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말했다.
그러던 와중, 출근길 지하철에서 광고 하나를 보게 됐다. 바로 극지연구소의 ‘남극세종과학기지 제38차 월동연구대 모집’ 광고였다. 이곳에서 중장비대원을 선발한다는 내용을 확인하자 가슴 깊숙한 곳에 있던 모험심이 다시 한번 솟구쳤다. 그리고 몇 달에 걸친 지원 과정을 거쳐 지금 남극에 오게 됐다.
서준영 대원은 “처음 월동대에 도전하면서 합격은 아마 불가능할 것이라 생각했다”며 “그러다 한 단계씩 합격 통보를 받고 나서부터는 가능할 것이라 기대가 커졌다”고 말했다.
이어 “어린 시절 생각했던 남극과 같은 미지의 영역에 직접 오게 됐다는 것이 처음엔 믿기지 않았다”며 “오히려 처음 도착했을 땐 황홀한 느낌보다는 외딴 섬에 온 것이 아닌가 어안이 벙벙했다”고 첫 입남극 소감을 밝혔다.

◇ 남극의 ‘세종기지 미용실’이 열린 이유
하계대 연구자 지원과 기지 작업, 장비 점검·관리를 마친 저녁, 월동대에게도 휴식 시간이 찾아왔다. 월동대원들은 하루의 피로를 씻기 위해 샤워를 하거나 독서, 운동, 취미, 산책 등 여가 시간을 보냈다.
이때 서준영 대원은 서둘러 기지 시설유지반 샤워실로 이동했다. 하지만 이는 개인정비 때문이 아니었다. 바로 기지 인원들의 ‘두발 정리’를 하기 위함이었다. 군 복무 시절 중장비 병사 업무와 함께 ‘이발병’ 업무도 맡았던 경험 덕분이다. 이때 배웠던 이발 기술로 지금은 세종기지 인원들의 미용을 책임지고 있다.
샤워실에서 서준영 대원이 이발 채비를 갖추는 동안, 갑자기 ‘세종기지 미용실’이 북적북적해졌다. ‘손님’들이 여럿 찾아왔기 때문이다. 중장비대원 파트너인 민진홍 대원과 월동대 연구반의 우재호 생물대원이었다. 두 대원 모두 서준영 대원의 ‘미용실’에는 처음 방문한 손님이었다.

첫 번째 타자는 우재호 대원이었다. 웃는 얼굴로 ‘책임은 못진다’는 말과 함께 서준영 대원의 손이 바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이발전동기와 가위가 지나가자 우재호 대원의 머리카락이 조금씩 잘리기 시작했다. 처음 장난기 가득했던 서준영 대원은 어느새 진지한 ‘이발사’처럼 머리를 다듬고 있었다.
이발이 끝나자 덥수룩했던 우재호 대원의 머리카락은 깔끔하게 정돈돼 있었다. 이를 지켜본 김원준 세종기지 월동대장은 “머리를 자를 수 있는 것 자체가 남극에서는 엄청난 ‘특권’”이라고 말했다. 실제로 지난해 12월 남극서 만난 제37차 월동대원들은 대다수가 장발에 덥수룩한 머리 상태로 출남극을 했었다.
서준영 대원은 “군 복무 시절에 배운 것이라 훌륭하다고는 못하겠지만 대원들을 위해 열심히 두발 정리를 도우려고 한다”며 “월동대가 1년간 남극에서 머무는 동안 세종기지에서 중장비대원과 이발사 역할을 동시에 하도록 노력하겠다”고 밝혔다.
이어 “세종기지에서 생활하는 동안 가장 중요한 것은 건강이라고 생각한다”며 “제38차 월동대원들과 무탈하게 임무를 마친 후 집으로 돌아갈 수 있도록 하겠다”고 각오를 전했다.
/ 박설민 기자, 김두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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