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호국보훈의 달, 추모의 마음

맘스커리어
▲윤석구 한국열린사이버대학교 특임교수 / 경영학 박사

[맘스커리어 = 윤석구 한국열린사이버대학교 특임교수 / 경영학 박사] 6월이 되면 유독 마음이 차분해진다. 호국보훈의 달이라는 말이 괜히 있는 게 아니구나 싶다. 나라를 위해, 조국을 위해 목숨 바치신 호국영령들을 생각하면 저절로 옷깃이 여며지고 고개가 숙여진다.

동작동 국립묘지에 고모부가 잠들어 계신다. 6.25 전쟁이 터진 지 얼마 안 된 때, 스무 살도 안 된 나이에 학도병으로 차출되어 전방 고지에서 장렬히 전사하셨다. 그런데 고모는 참 오래도록 남편이 돌아올 거라 믿으셨나 보다. 매년 생신날마다 정성스레 미역국을 끓여 올리셨으니까. 무려 40여 년 동안 말이다. 그러다 현충원에 안장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나서야 미역국이 제사 음식으로 바뀌었다.

얼마나 한이 맺히셨을까. 그 서러운 마음이 얼마나 깊으셨으면 끝내 남편 곁에 묻히는 것도 거부하셨다. 그 마음을 어떻게 다 헤아릴 수 있겠나. 다행히 유일한 피붙이 사촌누이가 "천상에서라도 함께 계시라"며 천안에서 고모를 모셔와 근년에 국립묘지에 합장했다. 이제야 두 분이 나란히 계시니, 고모부도 마음이 편하실 것 같다.

 

▲[사진=윤석구 한국열린사이버대학교 특임교수 / 경영학 박사]

 

예전에 대전충청 지역에서 근무할 때 대전 국립현충원과 자매결연을 맺었다. 정해진 국립묘지 구역에서 직원들과 함께 잡초를 뽑고 비석도 정성스럽게 닦곤 했다. 6월 6일 현충일 주간이면 태극기도 꽂고 손을 잡고 추모 행사에 정성을 기울였다. 그때 대전국립현충원장님이 하신 말씀이 지금도 귀에 생생하다. "시간이 될 때 국립현충원 한 바퀴 찾는 그 마음이라도 애국의 길입니다."

지난주 금요일 저녁 비행기를 타고 토요일과 일요일 이틀간 중국 대련을 다녀왔다. 한때 고구려 땅이었던 그곳을 가보니 감회가 새로웠다. 심양과 연태, 러시아 연해주 우수리스크 등 주변 도시는 가본 적이 있지만, 부끄럽게도 교과서에 나오는 뤼순감옥이 대련시 인근에 있다는 걸 정확히 몰랐다. 한때 러시아에 조차 되었다는 사실도 이번에 알게 되어 정말 부끄러웠다.

대련과 뤼순감옥을 꼭 언급하고 싶은 이유가 있다. 바로 안중근 의사가 법정에서 사형 선고를 받고 순국하신 매우 소중한 곳이기 때문이다.

19세기 후반 러시아 제국이 동방으로 확장하면서 바다가 얼지 않는 부동항 확보에 나섰던 배경이 있다. 러시아는 17세기부터 시베리아를 정복하며 동쪽으로 나아갔고, 19세기 중반 청나라의 국력이 약해진 틈을 타 만주 지역으로 들어왔다. 1858년 아이훈 조약으로 아무르강 이북을, 1860년 베이징 조약으로 연해주를 차지하며 동해로 진출했다. 이후 러시아는 겨울에도 얼지 않는 군사 요충지인 뤼순에 주목했다. 청일전쟁 후 일본이 요동반도를 차지하려 하자, 러시아는 삼국 간섭으로 이를 막은 뒤 1898년 청나라와 뤼순-대련 조차 조약을 맺어 25년간 이곳을 빌려 극동 전략의 핵심 거점으로 삼았다. 이런 러시아의 남진이 결국 일본과의 충돌, 즉 러일전쟁(1904-1905)으로 이어졌고, 전쟁에서 이긴 일본이 뤼순을 점령하면서 러시아가 1902년부터 짓기 시작한 뤼순감옥을 1907년부터 확장해서 썼다. 이런 역사적 배경 속에서 뤼순의 법정과 감옥은 수많은 한국인과 중국인 독립운동가들이 수감되어 고초를 겪고 순국한 비극의 현장이 되었다.

뤼순감옥에 가서 안중근 의사가 사형 선고를 받았던 그 법정을 직접 보았다. 옥중에서 붓을 들어 글을 쓰시던 그 작은 책상도, 마지막 순간을 맞으신 교수대까지도 모든 것이 그대로 보존되어 있었다. 차가운 감옥 벽을 손으로 만져보니 안의사님이 마지막까지 품었을 조국에 대한 사랑이 느껴져서 눈물이 저절로 흘러내렸다.

안중근 의사는 1909년 10월 26일 하얼빈 역두에서 "코레아 우라!"를 외치며 이토 히로부미를 처단한 후, 이곳 뤼순감옥으로 끌려와 수개월간 옥고를 치르다가 형장의 이슬로 사라지셨다. 그분의 "한국인 안중근"이라는 당당한 자기소개와 "위국헌신군인본분(爲國獻身軍人本分)"이라는 신념이 이 공간에 고스란히 배어 있다. 뤼순감옥에서 재판을 받고 순국하는 아픈 역사를 간직한 곳이다.

결국 대련은 제국주의 열강들의 각축장이 되어 주권을 잃었고, 그 과정에서 러일전쟁과 항일 독립운동의 아픔이 서린 역사의 현장이 되었다.

대련에서 뤼순 법정과 뤼순감옥을 보며 나라의 독립을 위해 순국하신 안중근 의사를 추념하니, 2018년 여름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시베리아 열차를 타고 연해주 우수리스크에 가서 최재형 선생 기념관을 방문했던 기억이 되살아났다. 안중근 의사의 하얼빈 역사적 의거가 최재형 선생의 큰 역할 덕분에 가능했던 만큼, 그 당시 상황을 함께 추모의 마음으로 되새긴다.

블라디보스토크 역에서 출발한 기차가 끝없는 시베리아 벌판을 가로질러 우수리스크로 향했다. 창밖으로 펼쳐지는 광활한 대지를 바라보며 이 낯선 땅에서 조국의 독립을 위해 헌신한 선열들의 마음을 헤아려보려 했다. 얼마나 외로우셨을까, 얼마나 그리우셨을까.

우수리스크에 도착해서 최재형 선생에 대해 더 자세히 알게 되었다. 함경도 경원에서 태어나 어린 나이에 러시아로 건너가신 분이다. 온갖 어려움을 겪으면서도 굳건한 의지로 재산을 모으셨는데, 그 모든 것을 조국의 독립을 위해 바치셨다. 정말 한 편의 서사시 같은 삶이었다. 최재형 선생은 우수리스크 근처 연추 지역에서 '도헌'으로 선출될 만큼 러시아 사회의 존경을 받으셨다. 하지만 개인의 성공에 만족하지 않고 연해주로 건너온 의병들을 적극 지원하셨다. 좋은 소총을 구해 의병들에게 보급하고, 항일 의병 세력을 하나로 묶는 동의회를 결성하여 일본군과 맞서 싸우셨다.

『대동공보』를 인수하여 무력투쟁과 함께 언론을 통해 동포들의 애국심을 일깨우고 독립 의식을 키우려 하셨다. 최재형 기념관에서 선생의 유품들을 보며 가슴이 뜨거워졌다. 일제에 체포되어 순국하면서도 가족에게 피해가 갈 것을 염려해 피신하지 않으셨다는 이야기는 참된 애국자의 면모를 보여준다.

무엇보다 감동적인 건 최재형 선생 댁에서 안중근 의사와 동지들이 "단지동맹"을 맺었다는 사실이다. 손가락을 잘라 혈서로 조국 광복을 맹세한 그 역사적인 순간이 바로 우수리스크에서 이루어진 것이다. 안중근 의사가 하얼빈으로 떠나기 전 최재형 선생은 사격 연습도 도와주시고, 의거 자금도 후원하셨다.

이토 히로부미 처단 후에는 『대동공보』를 통해 이 소식을 상세히 보도하여 전 세계에 안중근 의사의 의거를 알리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셨다. 두 분의 인연은 단순한 만남을 넘어 조국 광복이라는 같은 꿈을 향한 진짜 동지애였다. 그런 최재형 선생의 독립운동 공로를 2022년도 중앙일보 장세정 논설위원은 현충원에 묘지 복원 등에 정부의 노력이 필요하다는 기사 제기가 하였지만 여하튼 선생을 가까이서 추모할 수 있게 되어 다행으로 생각하며, 장 위원의 노고에도 깊은 감사를 드린다.

 

▲[사진=윤석구 한국열린사이버대학교 특임교수 / 경영학 박사]

 

짧은 2일간의 대련에서 뤼순으로 향하는 길은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는 묵직한 여행 같았다. 대련의 현대적인 고층빌딩들이 사이로 일제강점기 건축물들과 어우러진 뤼순 법정, 뤼순감옥, 러시아 거리의 건물들이 나타나면서 역사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기분이었다.

이런 분들 덕분에 우리가 지금 자유를 만끽하며 자유 대한민국 국민으로 살아가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정말 감사한 일이다. 이번 6월 푸른 하늘 아래에서는 국화 한 송이 들고 동작동 국립묘지 고모부 비석 앞에 술 한 잔 올려드리며 영령들의 숭고한 희생정신을 마음에 새겨야겠다.

멀리 하얼빈 역두에서 울려 퍼진 "코레아 우라!"의 함성이, 뤼순감옥 차가운 벽에 새겨진 "위국헌신(爲國獻身)"의 유묵의 붓글씨가, 연해주 우수리스크 벌판에 흘린 동지들의 피땀이 오늘도 우리 가슴에 뜨거운 파동으로 전해진다. 그분들이 꿈꾸었던 광복된 조국, 그 꿈이 현실이 된 이 땅에서 우리는 감사와 경건함으로 살아가야 할 것이다.

 

맘스커리어 / 윤석구 한국열린사이버대학교 특임교수 / 경영학 박사 [email protec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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